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성 베드로와 관련된 유물, 예술품이 여러 개 있다. 그중 관람객에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청동 조각상인 ‘왕좌에 앉은 성 베드로’다. 대성당에 처음 설치됐을 때부터 많은 순례자가 성인의 은혜를 받겠다며 발을 만지고 또 만진 데다 지금도 많은 관람객이 길게 줄을 서서 계속 만지는 바람에 청동이 얼마나 닳았는지 마치 거울처럼 반질거릴 정도다. 일부에서는 5세기에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13세기에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만든 작품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나비첼라’라는 모자이크도 있다. 14세기 최고의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가 1305~13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설치한 모자이크인데, 새 대성당을 지을 때 산산히 부서진 조각 중 일부를 겨우 구해내 새로 설치한 작품이다. ‘배’라는 뜻인 나비첼라는 예수 그리스도가 파도에 휩싸인 배에서 12사도를 구해내는 장면을 담았는데, 예수는 성 베드로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민다. 이 장면 때문에 예수가 베드로에게 나중에 교황이 된다는 암시를 준 것이라고 기독교에서는 해석한다.
성 베드로가 예수로부터 교회의 권위를 물려받은 증거로 받아들여지는 ‘성 베드로의 의자’라는 카테드리 페트리도 있다. 일부 기독교인은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초대 교황으로서 포교 활동을 할 때 사용했던 의자’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9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머리’ 카를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에 갔을 때 교황 요한 8세에게 선물한 것이다. 고령이었던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포교할 때 신도들이 그의 나이를 고려해 틈틈이 앉아 쉴 수 있도록 의자를 선물해줬을 가능성은 있지만, 지금 대성당에 있는 의자는 그때 사용했던 것은 아닌 게 분명하다. 카를 황제가 선물한 것은 원래 나무 의자였지만 지금은 17세기에 조각가 지안 로렌조 베르니니가 만든 청동금박 케이스에 담겼다.
이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에 성 베드로와 관련된 유물, 작품이 많다는 것은 이곳이 ‘성 베드로의 집’이라는 걸 상징하며, 대성당 지하 공동묘지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무덤 때문에 대성당을 지었고, 여러 예술 작품도 제작했고, 많은 순례자가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대성당에는 정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고 그의 유해가 있는 것일까?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이 생길 때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완벽하게 사라졌지만 성 베드로가 묻혔다는 지하 무덤만은 옛날 그 자리에서 옛날 그 모습을 유지했다. 맨 처음 새 성 베드로 대성당 사업을 맡은 건축가 브라만테가 교황 율리오 2세에게 무덤을 옮기자고 제안했지만 교황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일축했다. 새 대성당 건축 사업에도 반대가 극심한 판국에 성 베드로 무덤까지 옮기려 하다가는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율리오 2세의 우려가 기우는 아니었다. 사실 교황청 역사를 살펴볼 때 교황이 측근에게 암살당한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9세기 사라센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침탈하는 걸 막지 못한 요한 13세가 측근들이 준 독약을 먹고 몽둥이로 얻어맞아 암살당한 걸 시작으로 생전에 퇴임했다가 감옥에 갇혀 살해당한 13세기 첼레스티노 5세까지 무려 13명이 암살당했거나 암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만들었을 때에도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가는 게 매우 어려웠지만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된 이후에는 무덤을 찾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됐다. 길을 아는 사람은 길을 설명하는 지도나 글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죽어 버렸다. 이후 역대 교황이 무덤을 확인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정은 20세기 중반까지도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성 베드로의 무덤이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실제로 있기는 한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교황청으로서는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발굴 작업을 해 보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겠다고 발굴 작업을 하려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일부분을 부수어야 했다. 무덤이 있다고 알려진 발다키노 바로 앞의 ‘성 베드로 고해성사실’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그 일대를 들어내거나 부수어야 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는 게 의미 있는 일일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성 베드로가 이곳에서 순교해서 묻혔다고 옛 기독교 성인들이 ‘말씀’을 후세에 전했으면 믿을 일이지 왜 의심을 품느냐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믿지 않는 것과 뭐가 다르냐는 것이었다. 무덤이 있는지,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를 궁금하게 여기면서 대성당을 파헤치겠다는 것은 신성모독이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무덤을 찾기 위해 대성당을 지하까지 파내려가다가 대성당 바닥이 붕괴되는 일도 벌어질지도 몰랐다. 발굴 결과에 따라 나중에는 인류의 역사에 큰 흔적을 남길 일이 될 수도 있었지만 실수했다간 엄청난 부작용을 낳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길 수도 있었다. 여러 교황이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찾고 싶어 했으면서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의 교황 비오 12세(재임 1939~58년)는 이런 점에서 용감했던 데다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 직전인 1940년 무덤을 찾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성 베드로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고고학자들을 후원해 거의 10년간에 걸쳐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를 두 차례 발굴하게 했다. 그가 무덤 발굴 작업에 나선 것은 종교적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던 선임 교황 비오 11세(재임 1922~39년)를 성 베드로 무덤 옆에 묻기 위해 대성당 바닥을 파헤치는 작업을 하다 공동묘지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교황이라도 성 베드로 대성당을 함부로 파헤치는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비오 12세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전쟁 때문에 ‘모든 사람의 눈과 귀가 가려진’ 덕분이었다. 목숨이 오가는 전쟁에서 다들 살아남는 데 급급하다 보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그들이 하는 일을 몰랐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교황은 그 덕분에 1949년까지 10년 가까이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를 샅샅이 뒤졌다. 그 과정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이 꽤 파괴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굴단장은 독일 출신의 성직자인 루드비히 카스 추기경이었다. 카스 추기경과 발굴대원들은 성 베드로 고해성사실 옆을 부수고 아래로 내려가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지하에서는 높이에 따라 여러 제단이 차례로 나왔다. 옛 교황들이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묻히겠다며 층층이 만든 것이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보면 클레멘스 13세(재임 1758~69년), 갈리스토 2세(재임 1119~24년), 대 그레고리오(재임 590~604년)의 제단이었다.
제단을 지나 지하를 더 파들어 간 발굴단은 지하 5~12m 깊이에서 마침내 고대 로마의 네크로폴리스를 찾아냈다. 처마돌림띠 조각도 나왔는데, 석조 건물로 지은 고대 로마 이교도의 납골당인 마우솔레움에 사용된 처마돌림띠로 추정됐다. 이런 석조 건물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각 납골당에서는 납골 항아리, 관, 무덤, 아름답게 장식한 벽화가 나왔다. 그야말로 ‘죽은 자의 도시’였다. 1세기부터 4~5세기까지 납골당 건설 연도는 다양했다. 그곳에서 1000구 이상의 유해가 발견됐다. 유해는 대부분 겹겹이 쌓인 상태였다.
발굴단은 지하로 더 파고 내려가다 콘스탄티누스가 성 베드로 무덤 위에 있던 아나클레트의 예배당을 덮어씌운 ‘성 베드로의 추모실’, 즉 미모리아 페트리로 추정되는 구조물을 발견했다. 구조물을 뚫고 들어가자 ‘붉은 벽’이 나타났고, 벽에서는 아주 인상적인 벽감이 드러났다. 벽을 일부러 파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벽감이었다. 길이 77cm, 폭 28cm, 높이 31.5cm의 비밀스러운 은신처였다. 벽 바깥 부분은 온통 기독교 그라피티로 덮였다. 기독교의 영성을 보여주는 다양한 내용을 담은 그라피티였다. 예수는 물론 성모 마리아와 성 베드로의 이름이 분명히 새겨졌고 그들의 영광을 칭송하는 내용이었다.
여러 이유 때문에 벽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은 즉각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카스 추기경이 독단적으로 발굴 작업을 진행하는 바람에 고고학자들이 반발해 추기경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은 일까지 벌어졌다. 카스 추기경은 발굴단장인 만큼 모든 발굴 작업을 직접 통제하려 했고, 고고학자들은 발굴단장은 행정 업무만 처리하고 발굴 현장의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고 반발했다.
카스 추기경은 하루 일과를 마친 뒤 매일 늦은 저녁 지오반니 세고니라는 인부 한 명만 데리고 발굴현장으로 내려가 상황을 살펴보곤 했다. 어느 날 카스 추기경은 미모리아 페트리의 벽감에서 흙이 묻은 뼛조각과 마른 회반죽 조각, 섬유 조각 등을 발견했다. 이럴 경우 다음날 고고학자들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들에게 발견 내용을 기록하고 사진을 찍도록 맡겨야 했지만 고고학적 경험이 전혀 없었던 그는 세고니에게 “뼛조각 등을 모아 나무상자에 넣어 위로 올려 보내라”고 지시했다. 카스 추기경과 세고니 말고는 아무도 그 나무상자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며칠 뒤 미모리아 페트리에 돌아간 고고학자들은 벽감에서 발굴 작업을 이어갔다. 추기경과 세고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벽감에서 발견한 뼛조각 등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고고학자들은 벽감에서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대신 미모리아 페트리 바닥에 쌓인 뼈 수백 개를 수습해 상자 3개에 나눠 담았다. 처음에는 “의학적으로 볼 때 성 베드로처럼 건장한 체구의 노인의 뼈”라는 추정이 나왔다. 발굴단의 소견을 들은 교황청은 환호했다. 그들은 ‘드디어 성 베드로의 무덤도 발견하고 성 베드로의 유해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이때 교황청에서 좀 더 신중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나왔다. “뼈가 성 베드로의 것이라는 걸 발표하기 전에 더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 베드로는 신체적 기형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뼈에 그런 흔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뼈는 미모리아 페트리 바닥에 내버려진 것처럼 쌓인 모습으로 발견됐다. 객관적 시각으로 볼 때 누군가 무덤을 파헤쳐 바닥에 버린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뼈가 성 베드로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게 신중파의 주장이었다.
교황청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신중을 기하기 위해 당시 팔레르모 대학교 인류학과 학장이던 베네란도 코렌티 교수에게 뼈를 조사해 보게 했다. 일부의 우려대로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뼈는 1명의 뼈가 아니라 3명의 뼈이며, 동물 여러 마리의 뼈도 섞인 것이라는 게 밝혀졌다. 코렌티 교수가 3명의 뼈를 나눈 다음 더 정밀하게 조사해 보니 한 명은 여성이고 다른 두 명은 남성이었다. 두 남성 중 한 명은 호리호리한 체격의 50대, 다른 한 명은 건장한 체격의 70대 이상으로 조사됐다. 성 베드로가 순교할 당시 육체적 특징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코렌티 교수는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교황청에 구두로 내용을 미리 알렸다. 당연히 교황청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만 놓고 보면 유해를 ‘성 베드로일 수 있다’가 아니라 ‘성 베드로가 아닐 수 있다’라고 보는 게 옳았기 때문이었다.
실망한 발굴단은 발굴 보고서에서 ‘벽감의 은신처는 콘스탄티누스가 대성당을 만들 때 조성한 것이다. 성 베드로의 뼈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론을 내놓았다. 하지만 성 베드로의 뼈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고서의 추론은 그야말로 ‘근거 없는 추론’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나무상자를 빼놓고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다 보니 엉뚱한 추론이 나오고 말았다. 그들은 성 베드로의 유해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중세에 은신처가 열렸고 누군가 유해를 가져갔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카스 추기경이 벽감에서 발견해 나무상자에 담은 유해가 세상의 관심을 처음 받게 된 것은 엉뚱한 사람을 통해서였다. 인류학자이자 금석문 전문가인 로마대학교의 마르게리타 과르두치 교수였다. 50대 초반이었던 과르두치는 1953년 평소 잘 알던 교황청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교황청의 공식허가를 얻어 발굴현장을 둘러보게 됐다. 발굴 작업을 책임졌던 카스 추기경은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과르두치는 처음에는 수년간 지하 공동묘지와 미모리아 페트리 벽에서 발견한 각종 글자를 분석했다. 그곳에서 ‘HOMINIBUS CRESTIANUS AD CORPUS TUUM SEPULTIS(기독교인이 당신 근처에 묻혔다)’는 문구는 물론 ‘IN HOC VINCE(이것으로 승리하리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IN HOC VINCE’는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로마로 진군하다 하늘에서 키로(☧)와 함께 봤다는 신비한 문구였다.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지만 과르두치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작업을 마무리할 단계가 다가왔는데 분명하게 성 베드로와 관련된 내용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기적이 발생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려고 1960년 어느 날 현장에 내려갔다. 그때 하필이면 세고니가 혼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과르두치는 세고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벽감에서 뼈와 함께 흙, 빨간 회반죽 조각, 품질이 좋은 섬유 조각을 발견해 넣어둔 나무상자가 있는데 아무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세고니의 도움을 받아 지하 공동묘지 한쪽 구석에 보관된 나무상자를 보러 갔다. 나무상자에는 그의 말대로 뼈 등은 물론 거기에 든 유해가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의 벽감에서 발굴한 것이라는 내용을 적은 쪽지도 들어 있었다.
과르두치가 교황청과 미리 상의하지 않고 뼈가 든 상자를 독단적으로 연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1963년 새 교황이 된 바오로 6세(재임 1963~1978년)를 만나 새로 발견한 뼈에 대해 설명하기로 했다. 다행히 바오로 6세는 교황이 되기 전부터 과르두치 집안과 친하게 교류하던 사이여서 만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과르두치가 교황청에서 바오로 6세를 만난 것은 교황이 임기를 시작한 첫날인 1963년 6월 21일이었다. 그녀가 연구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자 교황은 매우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유해에 묻은 흙과 섬유의 화학적 성분 분석을 위해 추가연구가 필요하니 허가해 달라고 했다. 단순히 축하 인사를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은 교황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허가해 주었다. 만약 탁월한 결과가 나온다면 그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축하 선물은 있을 수 없었다.
과르두치는 유해에 묻은 흙과 섬유를 로마대학교 연구실로 가져가 1964년 봄과 여름에 걸쳐 화확적 성분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섬유 조각은 뿔고동에서 추출한 보라색으로 염색됐고, 섬유 조각에 수놓인 실의 금은 순금이며, 섬유에 묻은 흙은 미모리아 페트리 바닥의 흙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녀는 흙의 존재를 ‘뼈가 토장묘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성 베드로는 화장되지 않고 흙에 매장된 것으로 알려졌다.
과르두치는 교황청에 이 사실을 보고한 뒤 코렌티 교수에게 유해 감식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더 놀라웠다. 카스 추기경의 발굴단이 수습했던 3명의 뼈와 달리 성 베드로가 순교할 당시 육체적 특징과 완전히 일치하는 내용이었다. ‘한 명의 뼈다. 성별은 남자다. 몸이 건장하고 꽤 나이가 들었다. 60~70세 사이다. 흙으로 덮였다.’
과르두치는 중세에 동쪽에서 벽감이 열렸다는 1940년대 발굴단의 추론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로마의 벽 건설 전문가를 불러 벽감의 내부를 상세히 살펴봤더니 콘스탄티누스 시절부터 시작해서 발굴 작업이 이뤄진 1940년대까지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는 게 밝혀졌다. 1940년대에 실시한 발굴 작업이 1600년 만의 첫 개봉이었던 셈이었다.
과르두치는 교황을 다시 만나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 라테라노 대성당에 모셔진 이른바 ‘성 베드로의 머리’에서 일부를 뜯어내 나무상자 안 유해의 DNA와 일치하는지를 알아보겠다는 것이었다. 기독교 전설에 따르면 8세기 무렵 시칠리아를 점령한 사라센이 로마 성벽 밖에 있던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을 약탈하러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교황청은 두 성인의 유해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만 떼어내 성벽 안의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두 성인의 머리는 라테라노 대성당 대제단 위에 설치된 시보리움(발다키노)에 보관됐다.
바오로 6세는 뜻밖의 요청을 받고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유해를 교황청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는 없으니 교황청 담당 추기경의 관리를 받아 교황청에서 분석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라테라노 대성당의 ‘성 베드로의 머리’는 바티칸 실험실로 옮겨졌고 코렌티 교수가 그곳에 가서 분석 실험을 진행했다. 아쉽게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발견된 유해와 라테라노 대성당의 두개골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 똑같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성 베드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며, 둘 다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두 개가 일치했다면 그야말로 난리가 났을 것이다. 직선거리로 5km 떨어진 두 성당에 수백 년 이상 따로 보관된 두개골과 뼈의 유전자가 일치하다니! 기독교 기록과 전설로 전해진 ‘사라센 침략을 피하기 위해 두개골을 잘라 따로 보관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는 걸 입증하는 증거가 아닌가!
기술이 50년 전보다 더 발달한 지금이라도 두 뼈의 유전자를 다시 검사해볼 수도 있겠지만 교황청은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혹시 더 당혹스러운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교황청에서 이미 몰래 검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과르두치의 연구 결과를 담은 보고서는 1965년 초 교황청 출판사에서 발간됐다. 공식 발표는 없었지만 교황청 출판사에서 책을 찍었다는 것은 사실상 교황청이 보고서 내용을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책의 요점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 구조물은 발굴 때까지 한 번도 훼손된 적이 없다. 이곳에서 뼛조각 등이 발굴돼 나무상자에 담겨 1953년까지 지하무덤 인근에 훼손 없이 보관됐다. 뼛조각은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옮겨진 성 베드로 유해로 확인됐다. 뼛조각은 황금실로 짠 보라색 옷감으로 싸였는데 뼛조각의 주인이 최고위급 인사라는 걸 입증한다. 뼛조각을 분석한 결과 성 베드로가 순교할 당시 육체적 특징과 완전히 일치한다. 60~70대의 건장한 남성이다. 섬유에 묻은 흙은 시신이 화장된 게 아니라 매장됐다는 걸 입증한다.’
책이 나오자 세계 곳곳의 고고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에게서 반발이 거세게 터져 나왔다. 과르구치의 책은 허점투성이인 데다 구체적 근거조차 없으며 오직 그녀의 추정만이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고대 로마에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기독교인, 유대인이 많았고 유해가 1000구 이상 나왔는데 그 유해를 모두 조사하면 ‘건장한 남자 60~70대’가 한두 명이겠느냐는 주장도 있었다. 옷이 고급스럽다고 해서 성 베드로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박도 있었다. 게다가 나무상자에 담겼다는 뼈와 흙, 섬유의 신뢰성 문제도 제기됐다. 1940년대 발굴단 보고서에는 없던 내용인데 과르두치가 기적처럼 발견했다는 걸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설사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사이에 유해가 오염됐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인용한 반박도 있었다. 교황청이 16세기에 발간한 『폰티피칼레 로마눔』(『교황들의 책』)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 베드로의 원래 묘지에 덧붙인 관의 장식이 묘사됐다. ‘석관은 구리로 덮였다. 각 면의 길이는 152㎝다. 석관 위에는 무게 68㎏인 황금 십자가가 놓였다. 십자가에는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와 헬레나 아우구스타, 황제의 영광으로 빛나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가 적혔다.’ 이 반박의 핵심은 ‘성 베드로의 무덤이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 한 번도 훼손되지 않았다면 이 관과 황금 십자가는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찬반 논쟁은 1968년까지 이어졌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오랜 고민과 검토 끝에 그해 6월 26일 공식적으로 “성 베드로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유해는 교황의 발표가 나온 다음날 투명아크릴수지 상자에 담겨 원래 자리인 벽감 은신처로 돌아갔다. 유해를 돌려보내는 행사에는 교황과 여러 추기경 외에 과르두치 교수와 코렌티 교수도 참석했다. 요한 바오로 6세가 ‘성 베드로의 것으로 믿어지는 뼈’라고 쓴 두루마리가 상자 안에 함께 담겼다. ‘성 베드로의 뼈’가 아니라 ‘믿어지는 뼈’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었다. 벽감에 ‘은거하던’ 뼈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2013년 11월 24일이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미사에서 사상 처음 뼈 6개를 일반 대중에게 공개한 것이었다.
그런데 과르두치가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서 발굴한 뼈를 조사하기 시작한 1953년 예루살렘에서 놀랍고도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이 예루살렘 인근 감람산의 동굴에서 1세기 것으로 보이는 납골 항아리 수백 개를 발견한 것이었다. 현장을 조사한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물질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항아리에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이름도 적혀 있었다. 그중 ‘시몬 바 요나(Shimon Bar Yonah)’라는 글이 적힌 항아리가 모두를 흥분시켰다.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이었는데, 바로 성 베드로의 옛 이름이었다. 고고학자들이 이 같은 발굴 결과를 발표하자 가톨릭 계열 학자들은 격렬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항아리에 세파, 또는 베드로라는 분명한 글자가 없다’는 게 그들이 반발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만약 항아리 유해의 주인이 정말 성 베드로라면 어떻게 될까?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묻혔다는 성 베드로의 무덤과 유해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해 기독교 역사를 완전히 새로 써야 하는 것일까?
질문을 더 던져보자. 1940년대 발굴단이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에서 발굴했다는 뼈는 과연 누구일까? 과르두치의 연구는 정말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예루살렘의 항아리는 사실이 아닌 것일까?
어느 게 사실이고 진실인지는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연구가 가려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 진실인지 아닌지를 굳이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는 2000년 전 로마에서 피신하다 아피아 가도에서 만난 예수에게 “쿠오 바디스(Quo vadis, Domine‧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고 하는데 혹시라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기도 중인 성 베드로를 우연히 만난다면 한번 물어보고 싶다.
“쿠오 이비스티, 페트루스(Quo ivisti‧베드로여, 어디로 가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