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대성당(6)30년 전쟁과 새 성당 축성식

by leo


로마의 랜드마크인 콜로세움에서 출입구 반대쪽의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1.5km 정도 쭉 걸어가면 커다란 오벨리스크 하나가 나타난다. 오벨리스크 뒤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못지않게 큰 대성당이 보인다.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과 함께 로마의 4대 바실리카 마이오르(메이저 대성당)인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이곳의 정식 명칭은 ‘최고의 성 구세주와 성 세례자 요한 및 복음서 저자 사도 요한의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대성당의 정면 처마돌림띠에는 긴 글이 붙었다. ‘옴니움 우르비스 에트 오르비스 에클레시아룸 마테르 에트 카푸트.’ 사전을 꺼내 번역해 보면 흥미로운 답이 나온다. ‘로마와 세계 모든 성당의 머리이며 어머니.’ 이게 무슨 뜻일까?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곳이 세계의 모든 성당 중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 같은’ 성당이며, 세상 모든 교회의 모태 격인 ‘어머니 교회’라는 뜻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 라테라노 대성당이 ‘어머니 교회’라고? 성 베드로 대성당은 4대 바실리카 마이오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인정받는 성소다.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건설됐고, 4대 대성당 중에서 유일하게 바티칸시국 안에 자리를 잡았고, 교황청의 각종 행사도 이곳에서 열리는 게 그 증거다. 그런데 성 베드로 대성당이 ‘어머니 교회’가 아니라고?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은 이해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라테라노 대성당의 처마돌림띠에 붙은 글은 그냥 성당이 겉치레로 만든 게 아니다. 아무나 아무 곳에나 이런 글을 붙였다가는 전 세계 교회에서 난리가 날 수밖에 없다. 처마돌림띠의 표현이 보여주듯 4대 대성당 중에서 공식적으로 순위가 가장 높은 곳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교황인 로마 주교의 주교좌성당도 아니다. 그 역할을 맡은 곳은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로마 주교의 공식 의자인 카테드라도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한 기독교를 세계로 퍼뜨린 주역인 성 베드로가 들으면 섭섭할 수도 있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라테라노 대성당이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공식적으로 우위에 서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나이’가 가장 많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가장 오래된 성당이라는 이야기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318년에 완공돼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0년 이상 먼저 지어졌으며, 로마뿐 아니라 서유럽에서 최초의 교회였다. 종교의 자유를 얻은 고대 로마의 기독교인이 개인 저택의 지하실이나 카타콤베가 아니라 제대로 된 시설에서 최초로 예배를 드린 곳이 바로 여기였다. 당연히 모든 교회의 머리이며 어머니 교회라는 명칭을 받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라테라노 대성당이 이처럼 중요한 곳이다 보니 주변에는 종교적 가치를 가진 성당이나 건물이 즐비하다.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갔다 발견했다는,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를 모신 ‘예루살렘의 성 십자가 성당’과 역시 헬레나가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가져왔다는 ‘빌라도의 계단’, 즉 스칼라 산크타가 있는 산크타 산크토룸이라는 예배당이 대성당 인근에 있다. 스칼라 산크타는 예수가 유대 총독 빌라도의 저택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기 위해 내려갔던 계단이라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교황청도 역사를 되짚어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보면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니라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었다는 점이다. 1000년 이상 그곳에서 지내다가 바티칸으로 이전한 것이다. 지금도 라테라노 대성당 뒤편에는 당시 교황이 거주했던 라테라노 궁전이 있다. 그렇다면 왜 교황청은 애초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었던 것이며, 성 베드로 대성당은 어떻게 해서 교황청을 가져가게 된 것일까?


라테라노 대성당 일대는 원래 고대 로마 시대 평민 귀족이었던 라테라누스 가문의 땅이었다. 그래서 이곳에 라테라노라는 이름이 붙었다. 여기에는 라테라누스 가문의 큰 저택은 물론 다른 귀족이나 일부 황제 가족의 대형 저택도 있었다. 현재 라테라노 대성당 뒤편의 비아 데이 라테라니 거리가 저택이 몰려 있던 곳이다. 1959년 라테라노 궁전 뒤의 산 지오반니 병원 지하에서 대형 도무스의 흔적이 발견됐다.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오현제 중 한 명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어머니 도미티아 루킬라가 살았던 곳으로 밝혀졌다.


라테라누스 저택은 세월이 흘러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에는 도무스 파우스타라고 불렸다. 여러 역사학자는 ‘사두정치 때 서방의 황제였던 막스미니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가 저택의 주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기독교 기록에 따르면 파우스타는 콘스탄티누스와 결혼할 때 도무스 파우스타를 결혼 지참금으로 가지고 갔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파우스타의 오빠인 막센티우스를 누르고 로마제국의 통일 황제가 된 이후 교황 밀티아데스(재임 310~314년)에게 저택을 선물했다. 이때부터 도무스 파우스타는 라테라노 궁전으로 불렸으며, 1309년 교황 클레멘스 5세(재임 1305~1314년)가 아비뇽에 갇히게 될 때까지 역대 교황은 ‘도무스 데이(신의 궁전)’라고도 불린 도무스 파우스타에서 살았다. 황제는 또 같은 해에 라테라노 대성당을 짓기 시작해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임 314~335년) 시대이던 318년 11월 9일 축성식을 치렀다.라테라노 대성당과 궁전은 당시 로마를 보호하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안에 있어 외적의 침략에서 안전했기 때문에 교황이 거처하기에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다.



이번에는 교황청이 라테라노 대성당을 떠난 이유를 알아보자. 4세기 초부터 라테라노 대성당에 머물렀던 교황청이 라테라노 대성당을 떠나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가게 된 것은 14세기 교황의 아비뇽 유수(1309∼1377년)와 연이은 화재 때문이었다. 아비뇽 유수는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재앙 그 자체였다. 라테라노 대성당 뒤편 라테라노 궁전에서 살던 교황이 아비뇽에 갇혀 버리자 대성당을 관리하는 대부분 성직자도 떠나 버렸다. 교황이 부재한 사이 로마 시민들과 대성당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공포에 떨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308년 6월 6일 라테라노 대성당에 큰 불이 났다. 사흘 동안 이어진 불 때문에 대성당의 신도석 지붕과 라테라노 궁전이 큰 피해를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1360년에 다시 불이 나 대성당을 붕괴 직전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교황이 로마에 없으니 대성당을 보수하거나 새로 지을 수도 없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재임 1370~1378년)가 1377년 긴 아비뇽 유수를 끝내고 교황청을 로마로 다시 옮겼지만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전혀 기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성당의 위상을 더욱 떨어뜨리는 일에 불과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교황의 처소였던 라테라노 궁전이 화재로 전소돼 도저히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렇다고 해서 교황이 귀족의 집을 빌려 살 수는 없었다. 게다가 교황은 혼자가 아니라 많은 사제단과 수행단을 거느렸다. 아무리 적어도 수십 명은 됐을 것이다. 이 많은 사람이 로마 곳곳의 귀족 집에 흩어져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가는 교황청과 교황의 권위, 체면은 땅에 떨어질 게 뻔한 일이었다.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에 돌아간 것은 날씨가 서서히 싸늘해지는 가을인 9월이었다. 서둘러 숙소를 구하지 않으면 겨울 추위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는 일단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의 사제 숙소에 임시 처소를 마련했다. 나중에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으로 옮겼다. 최종적으로는 성 베드로 대성당 곁에 있던 바티칸 궁전으로 이주했다. 이렇게 옮겨 다닌 걸 보면 각 성당의 임시 숙소가 좁거나 초라해서 불편했던 게 분명하다. 만약 교황이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이나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 그대로 눌러앉았다면 오늘날 교황청과 바티칸시국의 위치는 바뀌었을지 모른다.


당시 성 베드로 대성당 옆에는 성당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지내거나 각종 행사를 준비할 때 이용하던 저택이 있었다. 건물을 처음 지은 사람은 서로마 멸망 이후 제56대 교황 심마쿠스(재임 498~514년)였다. 그가 건물을 지은 계기는 교황청의 정치적 갈등이었다.


심마쿠스는 498년 11월 22일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런데 숙적인 라우렌티우스가 비잔틴제국 황제 아나스타시우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같은 날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서 교황으로 선출됐다. 세력 싸움에서 밀린 심마쿠스는 라테라노 궁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갈 곳이 없어진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성당에는 사람이 지낼 방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그는 할 수 없이 성당 바닥에 누워 첫날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날이 밝자 성당 밖으로 나가 당분간 거처할 수 있는 집을 지었다. 쫓겨난 교황이 갈 곳이 없이 임시방편으로 지은 이 집이 나중에 교황의 처소이자 교황청과 바티칸시국의 시초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늘날 교황청과 바티칸시국의 시작은 교황의 정치적 욕심이 빚은 교회의 분열 때문이었던 셈이다.


심마쿠스는 당시 서로마의 왕이던 서고트족 출신의 테오도리크에게 누가 교황인지 판결해달라고 요청했다. 테오도리크는 ‘그날 시간을 따져 누가 먼저 선출됐는지, 그리고 교황청에 누구의 지지자가 더 많은지를 보고 결론을 내겠다’고 말했다. 테오도리크는 조사한 결과에 따라 심마쿠스의 지지자가 더 많은 걸로 결론짓고 그를 교황으로 인정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심마쿠스는 교황청에서 근무하던 많은 성직자에게 1인당 금화 400솔리디를 뇌물로 제공했다. 금화 1솔리디 무게는 4.5g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시세로 환산하면 400솔리디는 1억 5000만 원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었다.


심마쿠스가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버려진 저택은 약 300년 뒤 교황 레오 3세(재임 795~816년)에 의해 재건축됐다. 그는 로마와 이탈리아를 ‘야만족’의 침략에서 구한 프랑스의 국왕 샤를마뉴의 초대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800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했는데, 대관식에 참석한 샤를마뉴의 수행원단 숙소로 사용하기 위해 저택을 궁전으로 화려하게 개축한 것이었다. 이후 역대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오후 또는 밤늦게 열린 행사에 참석한 뒤 라테라노 궁전으로 돌아가는 게 어렵다고 판단되면 바티칸 궁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런 역사를 고려할 때 바티칸 궁전도 꽤 넓고 멋진 곳이었지만 교황이 장기간 숙박하거나 교황청을 아예 설치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레고리오 11세가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갔을 때 바티카누스 언덕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궁전 외에는 건물이라고는 보기 드물었다. 그때로부터 70년 뒤인 1450년에 그려진 성 베드로 대성당 드로잉을 보면 성 베드로 대성당과 교황 숙소, 시스티나성당 외에는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교황청 건물과 여러 정원이 들어선 모습은 없고 헐벗은 언덕에 불과하다.


라테라노 대성당에는 잘 곳이 없어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간 그레고리오 11세는 현장을 보고 처음에는 당황했거나 황당했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모몽에서 교황 클레멘스 6세(재임 1342~1352년)의 조카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삼촌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기 때문에 아주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깔끔하고 아름다운 숙소에서 지내는 것에 익숙했다. 그런 처지인 그에게 바티칸 궁전은 심하게 말하면 마구간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안이 없었다.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며 어쩔 수 없이 바티칸 궁전을 숙소로 삼아야 했다.


이후 우르바노 6세(재임 1378~1389년)와 후임 교황들이 애쓴 덕분에 바티칸 궁전 사정은 조금씩 나아져 교황 거주지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개선됐다. 현재의 바티칸 궁전은 특정 교황이 한꺼번에 종합적 계획을 갖고 만든 곳이 아니었다. 역대 여러 교황이 조금씩, 그리고 하나씩 신축하고 보수한 결과 오늘날 수십 개의 건물과 정원을 갖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레고리오 11세 이후 모든 교황은 이후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바티칸 궁전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15세기 교황 니콜라오 5세(재임 1447~1455년)는 바티칸 궁전을 아예 공식 교황 사무실로 선언했다.


그레고리오 11세는 처소를 겨우 구한 다음에야 로마를 살펴볼 여유를 갖게 됐다. 그의 눈에 들어온 로마는 충격적일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교황이 자리를 비운 60여 년 동안 로마 인구는 크게 줄었고 경제력도 매우 약해졌다. 당시 로마의 인구가 얼마나 많이 감소했던지 2만 명에도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의 강국이던 피렌체 등 여러 도시는 프랑스 출신인 교황이 로마로 돌아오는 것에 반대했고, 화난 교황은 이들에게 전쟁과 파문을 연거푸 선언했기 때문에 도움을 받을 처지가 아니었다.


관리 상태가 엉망진창인 사정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한 로마 시내의 모든 성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레고리오 11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처음 방문했을 때 그의 입에서는 탄식의 한숨이 터져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곳곳에서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고, 나무로 만든 문과 대제단은 썩어 문드러지는 악취가 났고, 곳곳에서 유리창이 깨져 찬바람이 거침없이 들어왔고, 벽이나 천장은 부식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시골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집을 가진 사람이라면 잘 아는 일이다. 집이라는 게 정말 특이해서 사람이 살고 있으면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사람과 함께 호흡하면서 튼실하게 유지되지만 살던 사람이 이사를 가서 빈집이 되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정신적으로 무너진 연인처럼 급속도로 노후해지고 심지어는 붕괴된다는 사실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교황이 로마를 지켰을 때에는 4세기에 건설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끊임없이 관리하고 보수했다. 때로는 소규모 보수였고 때로는 대규모 수리였다.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장식을 추가하는 데 그쳤다. 그래도 안전하고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교황이 아비뇽 유수 탓에 로마를 60여 년이나 비운 사이에 성 베드로 대성당의 상태는 엉망진창이 됐다. 관리, 보수만으로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거나 새로 지어야 했지만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황폐해졌든 부서졌든 그 자체만으로 성소였다. 대대적으로 재정비하지 않으면 무너질 판일지라도 여기에 함부로 손을 댄다는 것은 신성성을 파괴하는 행동이라고 기독교인들은 생각했다. 그들의 비판이 두려워 아무도 대성당을 크게 고치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단순히 썩은 문을 바꾸고 깨어진 창문을 새로 달고 부식한 벽과 천장에 새로 칠을 하는 정도에 그쳐야 했다. 게다가 교황이 앞장서서 대대적 보수를 추진하려고 해도 로마와 교황청에는 돈이 없었다. 이런 사정은 그레고리오 11세가 로마로 돌아간 이후 70여 년이 지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Viviano Codazzi


15세기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의 여행가 페로 타푸르가 1436~1439년 7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여행한 다음에 쓴 『여행과 모험』이라는 책에 당시 로마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처참한 모습이 담겼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엄청나게 크다. 지붕은 화려하게 장식됐다. 관리 상태는 매우 부실하고 지저분하다. 많은 곳이 부식됐다. 로마는 크기에 비해 인구가 무척 적다. 거의 내버려진 도시처럼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다. 큰 건물 잔해는 여기저기 널브러졌고, 공기는 정말 나빠 사람의 건강에 큰 해를 줄 정도다.’


세상에는 늘 고정관념에 어긋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15세기 중엽의 계몽주의자라고 불러도 될 만한 교황 니콜라오 5세(재임 1447~1455년)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이었다. 가난한 의사의 아들이었던 그는 젊었을 때 피렌체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여러 인문학자와 교류한 데다 교황의 외교관으로 많이 활동해 학식이 풍부하고 국제정세에도 탁월했으며 열린 식견도 가졌다. 교황이 된 뒤 피렌체에서 시작한 르네상스를 로마에 도입했고, 비잔틴제국에서 가져온 고서 등 장서 5000권을 갖춘 도서관을 열었는데, 이곳은 발전해 나중에 바티칸 도서관이 됐다. 그는 늘 주변에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네”라고 말하곤 했다. 르네상스가 로마에서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도입하고 적극 후원한 덕분이었다.


니콜라오 5세는 또 오랫동안 방치됐던 로마의 수도 시설을 개량했고 도로를 포장하고 성벽을 보강했다. 오늘날 트레비분수로 유명한 고대 로마의 수도 아쿠아 비르고를 1000년 만에 되살리고 무너진 산탄젤로 성을 재건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니콜라오 5세는 자금 부족으로 방치됐던 로마의 여러 성당 수리 사업도 진행했다. 그가 손을 댄 성당은 6세기에 건설된 산토 오피스톨리 성당, 성 바오로가 묻힌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4세기에 건설된 산타 마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 등 10여 개에 이르렀다. 기득권 세력이던 성직자, 로마 귀족이 교황청과 로마 형편에 맞지 않는 과다 지출이라며 비난했지만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니콜라오 5세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사실상 새로 짓다시피 재건축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이렇게 다짐한 것은 엄청난 두 사건을 목격해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첫 사건은 1450년 산탄젤로 성 다리에서 발생한 대참사였다. 그해는 50년마다 돌아오는 성년이었는데 유럽 곳곳에서 죄의 사면을 받으려면 순례자가 얼마나 많이 몰렸던지 성 베드로 대성당부터 산탄젤로 성 다리까지 인파로 꽉 막힐 정도였다. 사람들이 서둘러 대성당에 들어가려고 서로 미는 바람에 다리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해 무려 200명이 숨졌다.


두 번째 사건은 산탄젤로 성 다리 사고로부터 3년 뒤인 1453년 벌어진 비잔틴제국의 멸망이었다. 비잔틴제국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란 니콜라오 5세는 저도 모르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교황이 되기 전 열린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때 비잔틴제국의 팔레올로구스 황제가 참석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국 십자군 원정은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을 직접 목격했다. 잠시 고통스러운 묵상에 잠긴 교황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로마를 명실상부한 기독교의 중심도시로, 성 베드로 대성당을 기독교 최고의 성소로 만들어야하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의 아이디어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대대적인 재건축이었다.


니콜라오 5세는 이렇게 결심하기 이전에는 보수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끊임없이 보수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건축가이자 사제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성 베드로 대성당 상태를 조사한 뒤 만들어 올린 충격적인 보고서가 그의 마음을 바꿨다. ‘한 번만 더 충격을 받으면 성 베드로 대성당 남쪽 벽이 무너질 것이다. 다른 벽이 연쇄적으로 붕괴할 가능성도 있다.’


니콜라오 5세는 보고서를 읽고 너무 놀란 나머지 재건축 공사를 서두르기로 했다. 먼저 보수에 필요한 자재를 마련하기 위해 콜로세움을 해체하기로 했다. 그는 1차분으로 콜로세움에서 수레 2천522대 분량의 석재를 뜯어 대성당 앞으로 옮겼다. 구체적 보수 계획이 세워지면 공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로마와 교황청 곳곳에서 극렬한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반대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니콜라오 5세는 결국 죽을 때까지 대성당 보수 작업을 시작조차 할 수 없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손을 대지 못한 게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니콜라오 5세는 눈을 감기 직전 침대에서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문화적 소양이 부족한 대중의 마음에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눈으로 호소하는 무언가가 필요했지. 종교적 원칙에 입각한 신앙이라는 것은 너무 허약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은 것일 뿐이야. 만약 교황청이 신의 힘으로 이뤄진 엄청난 건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기념물을 되살린다면 그러한 신앙은 자라나서 더 강해질 텐데….”


그런데 개혁이라는 것은 처음에 물꼬가 터지는 게 어려울 뿐 길이 한번 열리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에는 이뤄지게 마련인 게 세상의 이치였다. 대부분이 신성모독이라면서 손도 못 대던 성 베드로 대성당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니콜라오 5세로부터 50여 년 뒤 교황 율리오 2세(재임 1503~1513년)는 니콜라오 5세보다 더 획기적인 방안을 발표했다. 대성당을 수리하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대성당을 아예 허물고 새로 짓겠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가 전운에 휩싸인 시기에 교황 자리에 오른 율리오 2세는 종교인이라기보다는 정치인, 장군 같은 성격을 더 많이 가진 인물이었다. 교황 선거인 콘클라베를 앞두고 노골적으로 뇌물을 뿌려 화제를 불러 모았고, 이탈리아를 차지하려던 유럽 여러 나라와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오스만투르크로 십자군 원정을 가려고 했다. 그 때문에 그의 별명조차 ‘전사 교황’이었다.


율리오 2세는 무엇보다 교황청을 지킬 군대를 만들었다. 오늘날 바티칸 하면 떠오르는 스위스 용병으로 구성된 근위대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군대를 만든 것은 첫째는 자존심, 둘째는 자주국방 때문이었다. 당시 교황청에는 병력이 없다 보니 이탈리아의 소국 공작조차 교황을 무시하는 경우가 잦았다. 심지어 창칼로 교황을 위협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율리오 2세가 군대를 만들면서 스위스 용병을 고른 것은 불굴의 용기를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스위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가난한 나라였다. 그래서 스위스 남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른 나라의 전쟁터에서 용병으로 활약했다. 기율이 엄격하고 고용주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 인기가 많았다. 율리오 2세는 1503년 스위스 정부에 근위병 200명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첫 근위병 150명이 로마에 도착한 것은 3년 뒤인 1506년 1월 22일이었다. 이날은 지금까지도 교황청 근위대 창설 기념일로 지켜진다. 율리오 2세는 근위대 규모를 6000명으로 키웠고, 그들에게 ‘교회 자유의 수호신’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율리오 2세는 예술도 매우 좋아해서 라오콘 군상 조각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바티칸 궁전을 바티칸 박물관으로 바꾸었다. 미켈란젤로에게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천지창조’를 그리게 했고, 라파엘로에게 ‘라파엘로의 방’을 꾸미게 했다. 그는 음악도 무척 좋아해 바티칸에 합창단을 만들기도 했다.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외교관이었던 마키아벨리는 그를 ‘가장 이상적인 군주’라고 호평했다.


율리오 2세는 원래 성격이 독단적이고 단호하고 호전적이었다. 할 일이 눈에 보였을 때 서둘러 해치우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성격이 급하고 추진력이 강했다. 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짓겠다고 했을 때 대다수 성직자와 신도가 과격하게, 한목소리로 반대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대다수 반대론자가 내세우는 신성모독을 도리어 재건축 이유로 내세웠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은 신성모독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 대성하의 무덤을 모신 대성당을 엉망으로 놔두는 게 더 신성모독입니다.”


율리오 2세는 니콜라오 5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을 추진하다 시간을 끄는 바람에 실패한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새 대성당을 짓기 위한 설계 공모전을 서둘러 열었다. 공모전에는 곳곳에서 여러 가지 설계안이 참가했다. 공모에 참가한 설계도 가운데 상당수는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그중에서 율리오 2세에게 새 대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부추긴 것으로 알려진 이탈리아 출신 르네상스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의 작품이 당선작으로 선정됐다.


율리오 2세는 최종 결정을 내린 뒤 공사에도 속도전을 적용했다. 그는 1506년 4월 18일 새 대성당의 초석을 놓는 기공식을 거행했다. 그는 직접 초석을 들어 기존 대성당 바닥 7m 아래로 내려가 놓았다. 초석에는 대성당을 새로 짓는 이유를 새겼다. 초석 아래에는 새로 만든 금화와 그의 얼굴, 새 대성당의 모습을 새긴 금메달과 동메달을 담은 항아리를 넣었다. 기록에 따르면 대성당 지하로 내려간 교황은 신성모독 행위에 분노한 지상의 추기경, 신도들이 흙을 덮어 그를 산 채로 묻어버릴지 모른다며 두려워했다고 한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지상의 스위스근위대 대장이 교황에게 서둘러 올라오라고 권유하자 그는 초석만 놓고 재빨리 지상으로 돌아갔다.

Michelangelo


율리오 2세는 기독교의 수장인 교황이면서도 과거 이교도의 제국이었던 고대 로마의 영광스러운 시절을 매우 좋아했고 높이 평가했다. 그는 솔직히 교황이기에 앞서 민족주의자로서의 성격을 더 많이 가진 인물이었다. 남들 앞에서는 “율리오라는 교황 칭호를 고른 것은 4세기 교황 율리오 1세를 존경하는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늘 좋아했던 고대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는 대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면서 ‘복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여기에서 ‘복원’은 ‘성 베드로 대성당 복원’이 아니라 ‘고대 로마 황제 시절의 복원’을 의미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고대 로마의 전성기’였던 4세기 콘스탄티누스 시절에 완성됐으니 이곳을 새로 짓는다는 것은 고대 로마의 복원이라는 게 교황의 생각이었다.


율리오 2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급진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자금과 많은 예술가 덕분이었다. 당시 유럽 각국은 ‘신세계 발견’과 식민지 개척으로 외국에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교황청도 그에 걸맞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입을 챙길 수 있었다. 율리오 2세는 교황청의 돈을 활용해 건축가, 조각가, 화가, 음악가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이 덕분에 유럽 곳곳에서 탁월한 예술가들이 앞 다퉈 로마로 몰려들었다.


신념에 가득 차고 추진력이 탁월한 교황, 교황청 금고에 가득 찬 막대한 자금, 로마 골목을 가득 메운 르네상스 최고의 예술가까지 율리오 2세가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자신감 있게 시작할 만반의 준비가 갖춰진 셈이었다. 그는 공사를 마무리한 뒤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오늘날 베르니니의 발다키노가 선 자리에 초대형 마우솔레움을 만들게 해 그곳에 묻힐 ‘사심’도 꿈꿨다.


율리오 2세의 초석 행사에 이어 기존 성 베드로 대성당 파괴와 새 대성당 건립 사업은 교황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건축가 겸 조각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맡았다. 율리오 2세는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유물과 예술품을 아끼는 측면에서는 절대 급진적이고 전투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어 했던 브라만테는 달랐다. 그는 인부 2500명을 동원대 대대적인 대성당 파괴 작업을 진행했다. 여러 교황의 무덤부터 조각, 모자이크, 그림, 제단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에서 살아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가 얼마나 심하게 대성당을 파괴했던지 당시 로마인은 그에게 ‘파괴자’라는 뜻인 ‘일 루이난테’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고 의기양양해진 그는 심지어 성 베드로의 무덤도 옮기려 했다. 이를 알게 된 교황이 크게 꾸짖으며 만류한 덕분에 무덤은 그대로 남게 됐다.


콘스탄티누스가 4세기에 건설한 성 베드로 대성당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심지어 재조차 남지 않았다. 그곳에 있던 모든 시설은 물론이거니와 벽화 같은 각종 장식도 거의 대부분 파괴됐다. ‘교회의 구세주’였던 콘스탄티누스가 대성당 벽에 붙인 모자이크도 다른 모자이크와 함께 부서져 없어졌다. 새 건물을 지을 때 기존 건물의 문화재, 유적을 이전해서 살려야 한다는 현대적 개념이 당시에도 있었다면 지금도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향기를 진하게 맡을 수 있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그때 사람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사라질 위기를 겨우 넘긴 유물은 바티칸 박물관이나 다른 교회에 소장됐다. 대표적인 것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안마당에 있었던 솔방울 조각이다. 지금은 바티칸 박물관의 벨베데레 정원에 있다. 옛 대성당 복도에 세워졌던 기둥 중 일부는 베르니니가 발다키노를 만들 때 사용했다. 다른 일부는 새 대성당의 돔을 받치는 기둥으로 이용됐다. 가장 완벽하게 살아남은 유물은 바티칸박물관의 피나코테카 관에 전시된 ‘스테파네시의 트립틱’이다. 트립틱은 우리나라의 병풍처럼 그림 세 점을 나란히 그린 것을 말한다. 13~14세기 추기경 스테파네시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제단 뒤편을 장식하기 위해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에게 의뢰해 만들었는데 대성당을 새로 지을 때 뜯겼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 회랑에는 역시 지오토 디 본도네가 만든 ‘작은 배’라는 뜻의 나비첼라라는 초대형 모자이크가 있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어 예수에게 갔다’는 성경 『마테복음』 14장 29절의 장면을 담은 것이었다. 원래 길이가 13m였던 이 모자이크도 완전히 파괴됐는데 운 좋게 총 길이를 합쳐 2m 정도인 조각 여러 개만 살아남았다. 두 조각 중 일부는 바티칸 박물관에 보관됐고, 나머지는 라치오 주 보빌 에르니카 마을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 8세기에 ‘공현대축일’을 주제로 만든 모자이크도 나비첼라와 비슷한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살아남은 조각 일부는 ‘진실의 입’으로 유명한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성당으로 옮겨져 성구보관실에 안치됐다. 다른 조각 일부는 피렌체의 산 마르코 대성당 제단을 장식했다.


율리오 2세는 아쉽게도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교황이 된 지 1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기 1년 전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은 크기와 웅장함에서 기독교 세계의 모든 교회를 넘어설 것이다. 대성당 공사비에 자금을 보태는 자비로운 후원자에게는 면죄부를 추가 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대성당에 남긴 마지막 공헌이자 나중에 기독교의 신구교 분열을 초래하게 될 ‘악의 씨앗’이었다.


이후 여러 교황은 그의 계획을 철폐하지 않고 조금씩 공사를 이어갔다. 공사비가 모자라 율리오 2세가 처음 발행한 대성당 공사비 면죄부를 계속 찍어내는 바람에 반발을 사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각종 전쟁과 내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장기간 중단되기도 했지만 공사가 포기되는 일은 절대 없었다. 마침내 대성당은 착공 120년 만인 1626년 완공됐고, 우르바노 8세(재임 1623~1644년)가 11월 18일 축성식을 거행했다. 율리오 2세가 초석을 놓은 지 120년 만, 콘스탄티노스 황제의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축성된 지 1300년 만이었다.


비극적인 사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느라 발행한 면죄부 때문에 신구교로 갈라진 기독교가 성 베드로 대성당 축성식을 치르던 해에는 신구교의 종교 전쟁인 30년 전쟁(1618~1648년)을 8년째 치르던 중이었다는 사실이다. 성 베드로가 묻힌 대성당의 축성식이 모든 기독교인의 축복 속에 치러지지 못한 것이다. 신교와 구교는 전쟁 동안 서로를 원수로 생각하며 이슬람과 전쟁할 때보다 더 치열하고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기독교인 450만~800만 명이 죽었다. 주 전장이었던 독일의 인구는 절반이나 줄었다. 양측은 심지어 교회와 성당을 불태웠을 뿐 아니라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 성상까지도 훼손했다.


율리오 2세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을 없애겠다고 했을 때 모든 추기경과 로마 시민은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그들이 내세운 반대 근거는 신성모독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종교로 받아들여진 직후 생겨 1200년 동안 모든 신도의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새 성당을 만든다는 핑계로 이 성당을 파괴한다면 신의 분노를 불러일으킬지 모릅니다.” 과연 그들의 우려대로 율리오 2세가 옛 대성당을 파괴했기 때문에 신이 분노해 기독교가 갈라지고 같은 교인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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