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는 매일같이 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서는 게 일상적이다. 줄은 대성당 앞의 계단을 지나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만든 열주 콜로네이드까지 둥글게 이어진다.
광장에 나무라고는 한 그루 없는 탓에 여름에는 뜨거운 햇살을, 열주 콜로네이드가 뻥 뚫린 탓에 겨울에는 찬바람을 견디면서 관람객이 1시간 이상을 기다린 끝에 겨우 대성당 계단을 올라갈 때 환하게 미소를 지어주는 것은 뜻밖에도 긴 칼을 든 성 바오로 조각상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인은 성 베드로이지만 엉뚱하게도 성 바오로가 주인 행세를 하는 셈이다.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줄은 대성당의 오른쪽으로 서게 돼 있는데 성 베드로 조각상은 왼쪽에 있기 때문이다. 대성당 측이 왜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줄을 세우는지 이유가 궁금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인 파사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넓은 홀 같은 공간이 나타난다. 유럽의 대부분 큰 성당에 다 존재하는 나르텍스라는 부분이다. 파사드 바깥은 인간세상이고 성당 안쪽은 신의 세상이다. 그 중간에 위치한 나르텍스는 성당에 참배하러 간 신도가 바깥에서 묻히고 온 온갖 죄악의 때를 씻어내고 마음을 정화하며, 이교도나 불신자는 참회하고 개종하는 공간이다. 성당의 나르텍스는 우리나라 사찰의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해탈문 사이의 넓은 공간과 비슷하다. 절에 들어가기 전 일주문과 해탈문 사이에 공간을 둔 것은 부처를 모신 대웅전에 가기 전 마음을 비우라는 뜻에서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 나르텍스에는 제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출입문이 무려 다섯 개나 있다. 이 출입문을 지나가야 진짜 대성당 안이 된다. 출입문 다섯 개를 한번 살펴보자. 입구를 마주 보고 섰을 때 맨 왼쪽은 ‘죽음의 문’이다. 대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열리면 장례행렬이 이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다음은 ‘선악의 문’이다. 교황 바오로 6세(재임 1963~1978년)의 80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1970~1977년에 만든 문이다. 문의 오른쪽 부조는 선을, 왼쪽 부조는 악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세 번째이면서 가운데 문은 ‘필라레테 문’이다. 다섯 개의 문 가운데 가장 오래됐는데, 문을 만든 안토니오 아베룰리노의 별명이 필라레테여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네 번째는 1965년에 만든 ‘성례의 문’이다. 성당으로 들어갈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문이어서 늘 열려 있다. 문의 오른쪽 부조에는 천사가 세례, 견진성사, 보속(고해 신부가 정해주는 속죄 행위)을 거행하는 모습이 새겨졌다. 왼쪽 부조에는 성체성사, 결혼, 신품성사, 병자성사를 거행하는 장면이 담겼다.
맨 오른쪽은 ‘성스러운 문’ 즉 성문(聖門)인데, ‘대사면의 문’이라고도 부른다. 이 문은 25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 즉 성년(聖年)에만 열린다. 성년은 희년(禧年)이라고도 한다. 성년은 처음에는 100년에 한 번씩 돌아왔지만 나중에 그 기간이 50년으로 줄었고, 지금은 25년으로 다시 줄었다. 성문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만 있는 게 아니라 로마의 4대 바실리카 마이오르(메이저 대성당)인 라테라노 대성당,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도 있다. 각 성당은 평소에는 모르타르나 시멘트를 발라 성문을 안쪽으로 잠가 놓다가 교황이 지정하는 성년에만 순례자에게 개방한다. 순례자가 이 문을 통과하면 죄를 사면받을 수 있다. 교황은 성년 첫날인 1월 1일 은으로 만든 망치로 성문을 똑똑 두들긴다. 그러면 문이 열려 누구나 지나갈 수 있다. 성경에 ‘나는 문이니 누구든 나를 통해 들어오면 안전하리라’라는 구절이 있다. 문을 통해 들어가는 것은 예수의 자비를 통해 안전을 구한다는 뜻이다. 교황은 성년 마지막 날 성문을 직접 닫는다. 성문은 1975년과 2000년에 열렸고, 다음에 문이 열리는 해는 2025년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나르텍스의 왼쪽과 오른쪽 끝에는 기마상이 하나씩 있다. 엄밀히 말하면 대성당 안쪽은 아니고 바깥쪽이다. 다섯 문을 바라보고 섰을 때 왼쪽의 기마상은 9세기 이슬람의 침공에서 기독교를 구한 샤를마뉴 대제다.
나르텍스의 오른쪽 끝은 유리가 달린 문으로 닫혔다. 문 뒤에는 바티칸 교황청으로 들어가는 긴 회랑인 스칼라 레기아가 있다. 대부분 사람은 문으로 가서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지 않는다. 문이 닫혔으니 갈 수 없고, 당연히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너머에는 다름 아니라 312년에 기독교를 공인해 세계적 종교로 만드는 데 기여한 콘스탄티누스 기마상이 있다. 원래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설치하려고 만들었지만 완공될 무렵에 위치를 바꾼 것이다. 위치가 나쁘다 보니 일부러 이 조각상을 보려고 문 너머를 살피는 사람은 거의 없다.
17세기 최고의 조각가였던 베르니니가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재임 1644~1655년)의 의뢰를 받아 만든 기마상의 제목은 ‘콘스탄티누스의 환상’이다. 말을 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하늘을 보며 깜짝 놀라는 모습이다. 기마상은 대개 주인공의 위용을 과시하는 형태로 만드는 게 일반적인데, 콘스탄티누스는 경외 또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표정이다. 황제의 기마상을 이렇게 특이하게 만든 것은 기독교를 살린 계기가 된 전설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막센티우스와 천하통일을 놓고 건곤일척의 맞대결을 벌였다. 그의 병력은 겨우 4만여 명이어서 20만 명을 넘는 막센티우스에 열세였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전투를 벌이기 며칠 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행진할 때 꿈에 예수가 나타나 ‘방패에 하늘의 상징을 새기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전투를 앞두고는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엔 타우토 니카(Εν Τουτω Νικα)’, 번역하면 ‘이 표식으로 승리하라’는 글자와 함께 ‘키로(☧)’를 만들었다. 그가 꿈과 하늘의 지시대로 모든 병사의 방패에 표식을 새기게 했더니 전투에서 압승했다는 것이다. 그가 새긴 표식 ‘☧’는 ‘구세주’를 뜻하는 그리스어 ‘그리스도(ΧΡΙΣΤΟΣ)’의 앞 두 철자를 붙인 것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병력 열세를 딛고 막센티우스 군대를 대파한 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이와는 달리 하늘에서 빛이 내려왔다는 것은 콘스탄티누스와 같은 시대에 살면서 『콘스탄티누스의 생애』를 쓴 카이사레아의 에우세비우스 같은 기독교 학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기독교를 살려준 황제에게 바치는 용비어천가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로마를 통일해 황제가 됐다는 걸 강조함으로써 기독교를 지지하는 그의 권력이 강화되고 최대한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키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에우세비우스의 책은 ‘콘스탄티누스의 환상’ 외에 ‘콘스탄티누스는 불멸’이라는 걸 전제하면서 그를 찬양하고 거의 신격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이룬 사람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고대 로마는 멸망할 때까지 계속 이교도 국가로 남았을 것이고 기독교는 세계적 종교가 되기는커녕 수많은 종교처럼 인류사에서 아예 사라졌거나 극소수만 신봉하는 종교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또 성 베드로 대성당은 아예 생겨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기독교가 고대 로마의 여러 황제 중에서 콘스탄티누스에게 가장 먼저 ‘대제(the great)’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그가 기독교에 바친 헌신과 기여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교황청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콘스탄티누스의 환상’을 제작해 설치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황제의 경험이 기독교의 공인 및 세계화, 성 베드로 대성당 건립에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 역사에 큰 변화를 이룬 황제인 건 분명한데, 그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학자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린다. 남은 기록이 없어 정확한 이유를 파악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내려 보낸 키로가 그를 감동시켰다는 ‘콘스탄티누스의 환상’은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고, 그가 기독교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인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로 보는 역사학자가 대다수다.
일부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어릴 때 중동 지역을 여행하다 깨우침을 얻어 기독교도가 됐다고 주장한다. 나중에는 어머니 헬레나까지 개종시켰는데, 이를 대외적으로 숨겨오다 황제가 된 이후에야 대대적으로 공표했다는 것이다. 그가 개종할 당시는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최악의 기독교 탄압 정책을 펼치던 시기여서 진심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콘스탄티누스는 이교도였지만 아버지에게서 버림받고 기독교로 개종한 어머니를 측은히 여겨 황제가 된 이후 친기독교 정책을 펼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에게 어머니는 평생 큰 트라우마였다.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시리아의 로마군 기지 인근 마을에서 만나 결혼한 조강지처 헬레나를 버리고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큰딸 테오도라와 재혼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집에서 쫓겨나면서 아들의 두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던 어머니의 모습을 오랫동안 생생히 기억했다.
완전히 다른 정치적 주장도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패권을 두고 막센티우스 등과 내전을 벌일 때 지지 기반이 약했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부터 탄압받던 기독교를 지지 세력으로 이용하기 위해 친기독교 행보를 보였다는 것이다. 또 콘스탄티누스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종교를 다 용인했으며, 기독교는 그중 하나였을 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살린 게 의도한 것이었든 의도한 게 아니었든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사라졌을 것이고, 성 베드로 대성당도 건립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날 바티칸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구세주’였다면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구원자’였던 셈이었다.
키로의 기적을 체험했다는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에 입성한 지 2주 만에 막센티우스의 지지 세력이었던 근위대를 해산하고 근위대의 기지였던 곳에 라테라노 대성당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선포했다. 그가 정말 꿈과 하늘에 나타난 계시에 감명을 받은 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매우 신속한 조치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콘스탄티누스는 라테라노 대성당 건설에 이어 13년 뒤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었다. 324년에는 성 바오로의 유해를 모신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을, 1년 뒤에는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조각을 모신 산타크로체 게루살렘을 건설했다. 연도를 보면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에 건설한 대성당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로마에만 성당을 건설한 게 아니라 중동과 유럽 곳곳에 적지 않은 교회, 성당을 건설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과 비슷한 시기에 예루살렘에는 성묘교회를 건설했다. 예루살렘 북서쪽 골고다 언덕 위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한 뒤 안장된 묘지에 세운 교회였다. 또 베들레헴에는 예수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동굴 위에 ‘예수탄생기념성당’을 건설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건설한 성당, 교회 4곳의 중요성을 따져보자면 사실 성묘교회나 예수탄생기념상당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가 로마에 라테라노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할 때에는 애초에 로마를 기독교의 중심 성지로 삼으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다만 역사가 진행되는 도중에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의 의도를 넘어 로마를 기독교 국가로 바꾸는 과정의 첫 걸음이자 변화의 상징이 됐으며, 나중에는 모든 성당의 완벽한 본보기가 된 것이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기독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한 번만 건설된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4세기에 처음 지어졌는데, 16~17세기의 여러 교황이 옛 대성당을 허물어 없애고 완전히 새로운 대성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성당은 400~500년 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처음 건립한 사람은 콘스탄티누스였다. 지금 바티칸에 있는 대성당은 4세기에 처음 지은 게 아니라 16~17세기에 새로 건설한 것이지만, 대성당의 역사를 처음 연 사람은 콘스탄티누스이니 지금 대성당의 초석을 그가 놓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라테라노 대성당과 함께 다른 대성당 건설 부지를 고르다 바티카누스의 전차경기장 옆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 성지 순례를 가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3대 교황이었던 아나클레토(재임 79~90/92년)가 만든 작은 예배당 말고는 예배를 드릴 장소가 없어 애를 먹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곳에 성당을 지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들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짓기로 결심했다.
성인의 무덤 위에 성소를 건설한 것은 고대 로마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이 처음은 아니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신전을 지을 때 신이나 유명인사의 무덤, 혹은 그와 관련된 신화나 전설이 전하는 곳에 건설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스페인 원정을 다녀온 헤라클레스가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과 포룸 보아리움을 지나가면서 제사를 지냈다는 곳에 건설된 아라 막시마, 고대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가 승천한 곳에 만든 판테온 등 사례는 수두룩하다.
여기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점은 콘스탄티누스가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라테라노 대성당을 먼저 지은 이유다. 각종 자료와 전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제안에 따라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라테라노 대성당을 지은 부지는 기독교에게 큰 의미가 없는 곳이었다. 당연히 기독교는 라테라노 대성당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먼저 짓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왜 콘스탄티노스는 그러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자료를 토대로 나름대로 분석해보면 공사의 어려움이 이유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성 베드로 무덤 바로 위에 지어야 했다. 그의 무덤이 대성당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아야 대성당을 건설하는 의미를 살릴 수 있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네로 전차경기장 안이 아니라 북쪽 담장 바깥에서 수십m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런데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전차경기장이 아니라 북쪽 벽 위의 성 베드로 무덤 위에 지으려면 각종 문제가 적지 않았다. 먼저 경사도였다. 전차경기장은 평평한 땅이었지만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던 공동묘지는 경사도가 작지 않은 언덕이었다. 이런 곳에 건물을 지으려면 언덕 일대에서 평탄화 작업을 벌여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적지 않게 걸렸을 것이다.
또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부지로 선택한 비아 코르넬리아 일대는 공동묘지였다. 이곳은 귀족의 납골당인 마우솔레움과 서민의 개인 무덤으로 가득했다. 이런 곳에서 공사를 하려면 묘지를 싹 쓸어내야 했다. 하지만 고대 로마에서는 누구든 어떤 이유에서든 남의 무덤을 함부로 파헤치거나 파괴하거나 유해를 옮길 수 없는 게 법이자 종교적 관습이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법과 종교적 관습을 어겨 남의 무덤을 파괴할 수는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법과 종교적 관습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는 황제가 대제사장인 폰티펙스 막시무스 자리를 겸임한다는 사실을 활용해 무덤 문제를 해결했다. 폰티펙스 막시무스의 자격으로 ‘국가의 큰일을 위해 무덤을 이장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석한 것이었다. 그는 비아 코르넬리아의 무덤 중 일부는 갈아엎고 일부는 그냥 흙만 덮어 평지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로마인의 반발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고, 황제는 수단방법을 다 동원해 그 불만을 억지로 막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황제가 억지로 눌렀다고 하더라도 로마인을 설득하고 달래는 과정을 생략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여전히 이교도가 다수인 로마에서 반란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무덤 문제로 로마인을 달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들 수밖에 없었다.
두 가지를 다 해결하고 난 뒤에도 문제가 하나 더 남았다. 바로 기독교인 무덤이었다. 성 베드로의 무덤 주변에는 성인 근처에 묻히고 싶어 했던 기독교인의 무덤이 많았다. 성 베드로의 제자였고 2대 교황이었던 리노(재임 64~79년)와 이후 교황 11명의 무덤도 여기에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성 베드로의 무덤만 빼고 나머지 기독교인과 교황의 무덤도 모조리 부수거나 흙으로 덮어버렸다. 당연히 기독교인의 항의도 빗발쳤다. 그들은 성당은 짓고 싶어 했으면서도 무덤을 없애기는 싫어했다. 황제는 당시 교황 실베스테르(재임 314~335년)에게 “기독교인을 설득하라”고 지시했다. 그가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의 무덤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하기는커녕 아예 삽조차 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난처한 일도 있었다. 교황 아나클레토가 만든 작은 예배당(신전)이었다. 2세기 로마 시인이며 기독교인인 가이우스는 아나클레토의 예배당과 성 바오로의 기념물을 보고 ‘바티카누스나 오스티엔스 가도에 가면 교회를 세운 두 사람의 트로피(기념물)가 있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때부터 아나클레토의 예배당은 ‘가이우스의 트로피’라고 불리게 됐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제대로 만들려면 이 예배당을 뜯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예배당은 기독교인의 마음에 가장 중요한 성소로 자리 잡은 상태였다.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만들어진 최초의 성소’라는 상징적 의미가 컸기 때문에 대다수 기독교인은 철거에 반대했다. 할 수 없이 예배당을 그대로 둔 채 대성당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예배당을 헐어내고 대제단을 설치해 대성당의 중심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게 됐다.
콘스탄티누스는 예배당을 뜯어내지 않고 대성당을 짓기로 했다. 그는 가이우스의 트로피를 철거하지 않고 대신 반원형 석재 구조물을 만들어 그 위를 덮어버렸다. 어느 누구도 들어가거나 나올 수 없게 한 것이었다. 구조물은 대리석과 반암을 교차로 쌓아 만든 보라색 건축물이었다. 이 구조물을 ‘미모리아 페트리’, 즉 ‘성 베드로의 추모실’이라고 불렀다. 황제는 미모리아 페트리 벽 안쪽을 파내 깊은 벽감을 만들어 가이우스의 트로피 아래에 있던 성 베드로의 시신을 옮겨 안치했다.
『교황들의 책』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성 베드로의 시신을 옮길 때 관 위에 덧붙인 장식이 묘사됐다. ‘석관은 구리로 덮였다. 각 면의 길이는 152㎝다. 석관 위에는 무게 68㎏인 황금 십자가가 놓였다. 십자가에는 ‘콘스탄티누스 아우구스투스와 헬레나 아우구스타, 황제의 영광으로 빛나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가 적혔다.’
콘스탄티누스가 아나클레토의 예배당을 그대로 놔두고 위를 덮어버리는 바람에 생각하지도 못한 부작용이 생겼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안치된 지하 무덤으로 가는 게 매우 어려워진 것이었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하로 가는 길을 아는 사람은 모두 세상을 떠나 버렸다. 결국 아무도 그곳에 갈 수 없게 됐다.
결국 모든 점을 고려해보면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는 라테라노 대성당보다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아니었다면 공사 지연이 문제가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 자체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알게 된 뒤 바티카누스에 직접 가 봤을지도 모른다. 현장을 직접 눈으로 봐야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확실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택한 경로는 네로가 기독교인을 전차경기장으로 끌고 간 네로 다리를 건너 산탄젤로 성을 지나 비아 코르넬리아에 오르는 것이었다. 넓은 도로에서는 말을 타고 갔을 것이고 좁은 골목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앞에는 지금은 콜로네이드로 에워싸인 성 베드로 광장 대신 당시에는 전차경기장과 흙투성이인 언덕이 나타났다. 그는 말을 타고 전차경기장과 언덕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언덕 주변은 들었던 대로 온통 무덤뿐이었다. 그때 함께 간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손가락으로 언덕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바로 저기가 성 베드로 성하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무덤 가까이 다가가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겨우 서너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신전 지붕이 보였다. 그는 말에서 내려 무덤 앞에서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지붕을 만져보면서 옆에 선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힘든 일이 되겠군. 그래도 약속했으니 안 할 수는 없지. 당장 내일부터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도록 하지!”
성 베드로의 시신을 보호하는 사전 조치를 마친 콘스탄티누스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주변의 마우솔레움과 무덤을 모두 갈아엎어 평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성당 공사를 시작했다. 착공 시점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319~326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됐다. 사실상 완공된 것은 333년 무렵이었는데 완벽한 마무리까지는 40여 년이 걸린 것으로 알려졌다.
콘스탄티누스는 기공식 때 직접 공사 현장에 가서 벽돌을 나르며 땀을 흘리기도 했다. 그는 흙을 파내 열두 차례에 걸쳐 날랐는데, 열두 차례는 예수의 12사도의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뿐 아니라 고대 로마에서 황제, 귀족은 공공사업을 할 때 돈만 내는 게 아니라 하루 정도 직접 일손을 보탬으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완성하곤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라테라노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 기술적으로 가장 고민한 것은 건축 양식이었다. 당시 서유럽에는 교회라는 게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개인의 집에서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올렸다. 많은 사람이 함께 모이려면 넓은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집 내부를 터서 공간을 확보했다. 이처럼 기독교인이 활용한 교회라는 게 집뿐이었기 때문에 로마 건축가는 교회, 성당이라는 걸 지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대 로마의 신전은 기능과 형태라는 측면에서 교회와 많이 달랐다. 신전의 경우 내부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넓은 공간을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제의행사는 신전 앞 공터에서 열렸고, 신전에 들어가는 사람은 제사장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교회의 사정은 달랐다. 많은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기도하고 예배를 드려야 했다.
콘스탄티누스가 건축가, 기독교 고위 성직자들과 고민 끝에 찾아낸 대안은 바실리카였다. 바실리카는 고대 로마가 BC 3세기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로 로마노에 짓기 시작한 새로운 건물 양식이었다. 지중해 최고의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자신감을 반영하는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바실리카는 다목적 건물이었다. 조금 더 현대적으로 말하면 주상복합건물이었다. 실용성을 따지는 고대 로마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건물 양식이었다. 바실리카에는 상가는 물론 각종 오락시설이나 드물기는 했지만 개인 주택도 있었다. 신전뿐 아니라 법정도 있었다.
바실리카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긴 직사각형이었다. 길이는 대개 100m 안팎이었다. 폭은 길이의 2분의 1이나 3분의 1 정도인 30~50m 정도였다. 바실리카는 원래 양옆을 열주 회랑으로 둘러싼 형태였다. 지붕은 씌웠지만 벽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공기가 잘 통했다. 세월이 흘러 나중에는 바실리카에도 벽을 세우게 됐다. 열주 회랑은 벽 안쪽으로 들어갔고, 정면 입구에 있는 기둥만 밖에서 보일 정도였다.
바실리카에는 애프스(후진·後陣)이라는 부분이 있었다. 맨 안쪽에 만들어진 반원 또는 반원에 가까운 다각형 모양의 내부 공간이었다. 바실리카에서 재판이나 대형 행사가 열릴 때 재판장이나 행사 주최자가 애프스에 설치된 의자에 앉거나 제단에서 모임을 진행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최고 건축가를 모두 라테라노 대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투입했다. 그들은 바실리카를 포함해 많은 대형 건물을 지어본 경험이 풍부했다. 바실리카 형식을 띤 대성당을 짓는 것은 그들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로마 건축가들이 신경 써야 했던 것은 기독교 성직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설계와 건축에 반영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추정컨대 성직자들이 원했던 것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솔로몬의 성전’ 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엄청난 성 베드로 대성당 건립비를 로마의 속주인 아시아 지역을 회복한 뒤 거둬들인 세금과 사비로 충당했다. 기독교인들이 사재를 털어 대성당 공사비로 보탰다고 하지만 그 돈만으로는 대성당을 짓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내놓은 돈이 아니었다면 대성당을 짓는 것은 어려웠거나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건설한 성 베드로 대성당은 길이 106m, 폭 60m, 중앙 높이 30m의 긴 십자가 모양 바실리카였다. 대성당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게 건설됐다. 성 베드로의 시신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누웠기 때문에 여기에 맞추느라 그렇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콘스탄티누스는 공사에 앞서 네로 전차경기장도 대부분 철거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에는 신도석이 있었고 신도석 양쪽에 통로가 두 줄로 설치됐다. 두 통로는 22개의 기둥으로 나뉘어졌다. 기둥은 모두 고대 로마의 다른 신전에서 뜯어온 것이었다. 대성당 서쪽 끝부분은 바실리카의 특징인 반원형 애프스였다. 십자가가 상하좌우로 교차하는 가운데 부분에는 아나클레토의 예배당이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의 성 베드로 고해성사실이 바로 그곳이었다.대성당 안에는 기름 등잔700개가 설치됐는데 그중 120개는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설치돼 1년 365일 하루 종일 불을 밝혔다.
콘스탄티누스는 16~17세기에 새로 지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홀대를 받았지만, 4세기에 직접 만든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그가 등장하는 모자이크 벽화가 있었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였던 데다 대성당 건설의 일등공신이었고 공사를 수시로 챙긴 점을 감안하면 그의 모습이 대성당에 담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6세기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으로 들어가는 공간에 대성당 면적의 절반 규모로 아트리움, 즉 안마당이 만들어졌다. 아트리움의 이름은 ‘천국의 정원’이었다. 아트리움 동쪽 벽에 천국을 상징하는 야자수, 삼나무, 올리브 같은 여러 나무가 심어졌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유럽 곳곳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에 참배하러 간 가난한 순례자는 ‘천국의 정원’에서 잠을 잤다. 그래서 이곳에는 음식이나 각종 기념품을 파는 상인도 몰렸다. 정원 가운데에는 분수가 있었고, 분수 가운데에는 솔방울 모양 조각이 있었다. 이 조각은 지금은 바티칸 궁전의 벨베데레 정원으로 옮겨졌다. 바티칸 박물관에 들어가면 정원 한가운데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솔방울이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예수가 성 베드로에게 천국으로 가는 열쇠를 맡긴 명확한 증거, 즉 ‘예수가 하신 말씀’이 이뤄진 증거로 받아들였다. 성경 ‘마태복음 16장 18절 ‘너는 베드로로구나. 내가 이 바위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니라. 지옥의 문도 여기에 맞서지 못할 것이니라’라는 예수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독교인들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하면 모든 죄가 사하여진다고 믿었다. 이곳을 예루살렘에 이어 기독교에서 두 번째로 신성한 곳으로 생각한 유럽 곳곳의 기독교 순례자가 대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원래는 3000~40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규모로 지어졌지만 실제로는 한꺼번에 최대 1만 4천여 명이 모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당이 완공된 뒤 내부에 교황의 무덤도 연이어 만들어졌다. 초대 교황이었던 성 베드로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여러 교황의 열망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대성당에 묻힌 교황은 5세기 레오 1세(재임 440~461년)였다. 이후 여러 교황은 수 세기 동안 안마당, 예배당까지 뜯어내 무덤을 마련했다. 무덤은 나중에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만들 때 대부분 없어졌다.
왜 역대 교황은 성 베드로의 무덤 근처에 묻히려고 그렇게 애를 쓴 것일까? 그렇게 하면 하느님의 나라에 올라갈 때 좋은 자리를 예약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그곳에서 성 베드로를 만나고 예수를 만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을까? 교황이 그의 무덤에 신경을 쓰는 만큼 정작 교회와 신도의 문제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