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대성당은 1년 내내 매일 붐빈다. 계절에 따라 아침 7시부터 오후 6~7시까지 문을 여는데 하루 평균 방문객은 4만~5만 명, 연평균 방문객은 1000만 명을 넘는다고 한다. 사람마다 대성당을 방문하는 이유는 다르다. 르네상스 최고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려고 찾아가는 사람도 많고,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기독교의 성지를 둘러보는 감격을 누리려고 들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성 베드로 대성당 방문객이 많은 것은 현대만의 현상은 아니다. 대성당은 건립 직후부터 많은 기독교인의 순례 성지였다. 로마에서는 라테라노 대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된 대성당이었고, 특히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만든 성지였기 때문이었다. 해마다 적지 않은 순례자가 유럽 곳곳에서 로마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중세에는 다른 마을, 다른 나라로 먼 여행을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로가 나빠 교통이 불편하고 도적떼가 곳곳에서 출몰한 데다 위생 상황이 나빠 각종 질병에 노출됐기 때문에 먼 나라 신도가 대성당을 방문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할 처지였다. 게다가 대성당까지 때로는 한 달, 경우에 따라서는 수개월이나 걸리는 여정 동안 들어가는 숙박비와 식비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방문객이 지금처럼 연간 수백만 명에 이르지는 못했고 고작 수천~수만 명 선에 그쳤다.
사정이 이러하다는 걸 잘 아는 교황청은 신도의 신심을 자극해 성 베드로 대성당 순례자 수를 늘리려고 특이한 제도를 고안했다.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임 1294~1303년)가 1300년에 도입한 ‘성년(聖年)’ 이라는 제도였다. 그는 ‘최고 신앙 보고’라는 칙령을 발표해 100년마다 돌아오는 성스러운 해를 뜻하는 성년을 만들었다. 우리말로 ‘희년(禧年)’이라고도 하는 이 제도는 원래 ‘노예와 죄수가 자유를 얻고, 모든 빚은 탕감되고, 하느님의 자비가 온 세상에 퍼진다’는 유대교의 전통이었다. 보니파시오 8세가 천명한 성년은 유대교 전통과 조금 달랐다. 그는 성년 제도 도입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기독교 신도는 성년에 완벽하게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로마를 방문해서 세계에 기독교를 퍼뜨린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무덤인 성 베드로 대성당과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을 순례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죄를 사면받을 수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슬람 신도에게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 순례가 일생의 의무인 것과 똑같다는 점이다. 추측하건대 교황청이 유대교의 성년과 이슬람의 메카 순례를 적당히 섞어 새로운 성년 제도를 고안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조치 이후 성 베드로 대성당 방문객이 얼마나 늘었는지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상당히 증가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교황의 이 조치 때문에 유럽에 사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순례는 인생의 의무가 됐다. 그곳에 가면 죄를 사면받을 수 있다고 하니 가는 도중에 도적떼에 붙잡혀 죽을 각오를 하더라도 가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16~17세기에 대성당이 새로 지어진 뒤에는 방문객 수가 더 늘었다. 교황청은 나중에는 100년 주기를 50년 주기로 바꾸었다. 100년을 주기로 하면 아예 성년을 맞을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신도가 생기기 때문에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교황의 말을 믿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한 대표적인 인물은 스웨덴 출신의 여성 성 브리기타였다. 그녀는 결혼해 아이 여덟을 낳고 살았지만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 순례를 다녀오던 중 남편을 잃고 말았다. 슬픔에 빠진 그녀는 종교에 몸을 맡기기로 결심하고 1350년 두 번째 성년을 맞아 로마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성 브리기타는 놀랍게도 로마에 머물 때 밤마다 꿈에서 예수를 만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그 덕분에 세상을 떠난 뒤인 1391년 시성의 영광을 얻었다.
성 브리기타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을 순례하려고 로마를 방문한 순례자가 성 베드로 광장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난 것은 ‘순교의 목격자’ 오벨리스크였다. 그는 오벨리스크 앞에 무릎을 꿇거나 오벨리스크를 붙잡고 통곡하며 성 베드로의 순교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한참이나 기도를 하던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 위쪽 페디먼트의 조각상 13개였다. 한가운데에는 십자가를 든 예수 그리스도가 섰다. 양옆에 세워진 것은 12사도 중 성 베드로를 제외한 11명과 세례자 요한 조각상이었다. 순례자는 조각상 13개를 보면서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기쁨과 감격, 종교적 희열을 감출 수 없었다.
‘이곳이 성 베드로 대성당이로구나! 나는 드디어 기독교의 성지에 온 것이야! 이제 모든 죄를 다 사면받을 수 있게 됐어!’
순례자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간 것은 성 베드로 때문이었다. 그런데 페디먼트의 조각상 13개 중에는 성 베드로가 없다. 순례자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주인’ 격인 성 베드로는 어디에서 순례자를 맞았을까? 시선을 아래로 돌려보자.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 계단 양쪽에 조각상 두 개가 보인다. 왼쪽 조각상은 심각한 표정을 하면서 왼손에 황금색 열쇠를 든 모습이다. 이 조각상이 바로 성 베드로다. 그는 이 성당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조각상이 아래에 별도로 세워진 것이다. 성 베드로 반대편인 계단 오른쪽에 칼을 든 조각상은 성 바오로다. 성 베드로는 그의 무덤을 보러 오는 순례자에게 인사하고, 성 바오로는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포교하다 순교한 ‘친구’를 위해 순례자를 안내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분위기다.
순례자는 성 베드로 조각상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조각상의 다리를 붙잡고 열정적으로 기도를 올렸다.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을 때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 순례자는 한참 후 일어나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바라봤다.
‘저 안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는 말이지? 어서 들어가 그분을 영접해야겠어.’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으로 들어가면 성 베드로의 무덤을 향해 곧장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대성당 안에서는 무덤을 직접 볼 수 없다. 무덤은 대성당 지하에 있는데 대성당 안에서 지하로 가는 길은 막혔기 때문이다. 중세에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었지만 지금은 그나마 대성당 밖에서 진행하는 가이드 투어에 참여하면 무덤을 확인할 수 있다. 대성당 지하 5~12m 깊이의 공동묘지를 둘러보는 ‘바티칸 네크로폴리스 투어’가 바로 그것이다. 누구나 입장권을 사서 투어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매일 판매하는 입장권 수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네크로폴리스 투어에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다. 네크로폴리스 투어 시작 장소는 ‘발굴 사무소’라는 우피치오 스카비다. 사무소는 오벨리스크가 원래 서 있던 성 베드로 광장 바깥의 ‘순례자의 광장’에 있다. ‘순교자의 광장’은 성 베드로를 포함해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던 곳이다.
가이드 투어를 따라 지하 공동묘지에 가는 대신 중세의 순례자를 따라 성 베드로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자. 대성당 한가운데에는 ‘성 베드로의 발다키노’가 있다. 발다키노는 한자어로는 천개(天蓋), 순 우리말로는 ‘닫집’이라고 한다. 미사를 올리는 제단이나 교황의 옥좌, 또는 교황이 나들이를 갈 때 타고 다니는 마차의 의자 부분이 비나 눈을 맞지 않고 먼지에 시달리기 않도록 위를 가려주는 지붕이다. 발다키노 지하에 공동묘지가 있고 그곳에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시설물이 있다.
공동묘지 위에 발다키노를 세운 것은 의도적이었다. 고개를 들어 발다키노 위를 쳐다보면 미켈란젤로가 만든 돔이 나온다. 천국의 영광이 빛의 형태로 대성당 안을 환히 비출 수 있게 만든 구조물이다. 돔과 발다키노를 일직선으로 연결한 뒤 지하로 선을 더 늘리면 그곳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지하 공동묘지가 나온다. 즉 돔~발다키노~성 베드로의 무덤은 직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돔은 ‘신의 나라’, 발다키노는 ‘인간의 나라’를 상징하고 성 베드로의 무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를 의미한다.
발다키노는 예술적으로는 매우 뛰어난 작품이지만 사실 그 뒤에 숨은 의도는 매우 불순하고 성스럽지 못했다. 발다키노를 만든 사람은 17세기 최고의 조각가 겸 건축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였다. 그에게 제작을 의뢰한 사람은 바르베리니 가문 출신의 교황 우르바노 8세(재임 1623~1644년)였다. 그가 발다키노를 만들게 한 것은 ‘가문의 영광’ 때문이었다. 교황은 발다키노를 만들면서 바르베리니 가문을 상징하는 각종 문양과 장식을 새겼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바르베리니~우르바노~발다키노~성 베드로’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바르베리니 가문의 위상을 고양시키려는 이유에서였다.
‘가문의 영광’에 지나치게 집착한 우르바노 8세는 교황의 자리를 악용해 숱한 스캔들을 낳은 인물이었다. 동생과 조카 두 명을 추기경으로 만들어 주는가 하면, 다른 친척이 큰돈을 벌거나 특정 자리를 차지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추기경인 조카를 도와주기 위해 파르마, 베니스 등과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성 베드로의 무덤조차도 가문의 영광에 이용한 사람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못 할 이유가 없었다. 교황이라는 최고위 성직자가 성 베드로 대성당조차도 사욕에 이용할 정도였으니 당시 교회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다시 성 베드로의 무덤 이야기로 돌아가자. 사실 정확한 위치를 보면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곳은 발다키노 바로 아래는 아니다. 발다키노 앞에 있는 ‘성 베드로의 고해성사실’ 지하가 진짜 무덤 자리다. 고해성사실은 타원형 육상경기장 트랙을 절반으로 자른 모양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생기기 전 고해성사실 자리에는 처음에는 ‘바위’라는 뜻인 베드로의 이름을 상징하는 큰 바위가 있었다. 기독교인들이 지하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는 걸 표시하기 위해 바위를 가져다둔 것이었다. 1세기 말 3대 교황 아나클레토(재임 79~ 90/92년)는 돌을 치우고 서너 명이 겨우 들어가는 작은 기념물을 만들었다. 그리스 신전 모양이었던 아나클레토 기념물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할 때 성 베드로의 무덤과 함께 지하에 파묻혔는데, 그 기념물 위에 만든 게 고해성사실이었다.
성 베드로의 고해성사실은 조각가 겸 건축가 카를 마데르노가 교황 바오로 5세(재임 1605~1621년)의 의뢰를 받아 1615~17년에 제작한 구조물이었다. 대성당을 찾아온 순례자가 성 베드로의 무덤 바로 위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해 주자는 게 고해성사실 건설을 의뢰한 교황의 생각이었다. 고해성사실에는 뿔 모양의 황금색 오일램프가 설치돼 지금도 1년 356일 내내 불을 밝힌다. 성인의 무덤 위에서 기도하는 순례자가 어둠 속에서 기도를 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해성사실 안쪽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조각상이 있다. 성 베드로 조각상 위의 천장에는 아나클레토가 작은 기념물을 만드는 그림이, 팔리움 위의 천장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재임 314~335년)가 대성당 축성식을 거행하는 그림이 있다. 성 바오로 조각상 위의 천장에는 교황 바오로 5세가 새로 단장한 ‘성 베드로의 고해성사실’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두 조각상 사이에는 팔리움을 보관하는 ‘팔리움의 벽감’이 만들어졌다. 팔리움은 우리말로 ‘영대’라고 번역되는데, 대주교가 제복 위 어깨에 걸치는 흰 양털 띠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교황이 대주교를 서임할 때 팔리움을 어깨에 걸어주었다. 교황청은 평소에는 팔리움을 다른 곳에 보관하다 대주교에게 걸어줄 때가 되면 팔리움의 벽감으로 옮겼다. 일부 신도나 관광객은 성 베드로의 고해성사실이 성 베드로의 무덤이며 팔리움의 벽감에 성 베드로의 유해가 안치됐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성년을 맞아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찾아간 중세의 순례자는 안타깝지만 지하의 성 베드로 무덤에는 갈 수 없었다. 대성당을 짓느라 길이 막혀 내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굳이 지하로 내려갈 생각도 없었다. 지하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그만이었다. 그곳에 무덤이 있다는 걸 100% 믿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만 고해성사실에서 무릎을 꿇고 수없이 기도를 드리고 또 드리면서 눈물을 한없이 쏟을 뿐이었다. 하루 종일 기도를 드린 다음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죄를 용서받고 영혼이 정화된 기쁨을 느끼며 밝은 표정으로 대성당에서 나갔다. 이 지점에서 무신론자의 헛소리일 수도 있고 순례자에게는 미안한 말일 수도 있지만 대성당 밖으로 걸어 나가는 순례자에게 조심스럽게 한마디 물어봐야겠다.
“정말 고해성사실 지하에 성 베드로가 묻혔을까요?”
기독교는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고 믿지만 사실 성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게 정말인지, 언제 어디를 통해서 왜 로마에 갔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후대에 ‘그렇게 전해지더라’라면서 적은 기록이 있지만 당대의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의 죽음을 다룬 최초의 기록은 네로의 박해로부터 수십 년 뒤 제4대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1세(재임 90/92~101년)가 늘 다투기만 하던 그리스 코린트의 교회를 화해시키기 위해 보낸 편지였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적혔다.
‘베드로는 부당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한두 가지가 아니라 많은 고역을 겪어야 했다. 결국 나중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그에게 주어진 영광의 장소를 향해 떠났다.’
성 베드로가 순교하고 100년 이상이 지난 2~3세기 아프리카 카르타고 출신의 기독교 작가인 퀸투스 셉티미우스 플로렌스 테르툴리아누스가 쓴 『전갈 우화』란 책에는 성 베드로의 순교를 다룬 내용이 나온다.
‘성 베드로의 순교는 네로가 기독교도를 처형할 때 일어났다. 기독교인 처형은 네로 전차경기장 근처 황제의 정원에서 벌어졌다.’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테르툴리아누스와 비슷한 시대인 2~3세기 기독교 학자 오리겐 아다만티우스가 남긴 기록에 그런 내용이 처음 등장한다.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다.’
비슷한 시기에 쓰인 『베드로 행록』에도 ‘베드로는 사형집행인에게 머리를 거꾸로 해서 십자가에 매달아달라고 부탁했다’라고 적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같은 4세기에 살았던 그리스의 기독교 역사가 에우세비우스 팜필은 오리겐의 기록을 베껴 똑같은 글을 남겼다. 이때부터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한 것으로 ‘정리’됐다.
이들의 글과는 달리 ‘성 베드로가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는 내용은 순교 당시의 기록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교황 클레멘스는 물론 테르툴리아누스, 아다만티우스가 쓴 글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적지 않다. 특히 종교 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종교학자들은 성 베드로가 로마에 갔다는 사실조차 극력 부인했다.
4대 교황 클레멘스의 기록을 잘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여기에는 사망 연도, 일시, 장소, 이유가 없다. 성 베드로가 언제 죽었는지, 로마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성 베드로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테르툴리아누스는 기독교 박해가 발생한 때로부터 150년 이후에 책을 썼다. 그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었고 남에게서 들었거나 다른 책에서 본 걸 베껴 쓴 데 불과했다. 아다만티우스의 글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어느 책에서 봤는지, 어떻게 해서 알게 됐는지 밝히지 않았다. 테르툴리아누스와 아다만티우스의 글에는 객관적 신빙성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게 당시 프로테스탄트 학자들의 주장이었다.
일부 현대 학자는 성 베드로가 정말 로마에 갔는지, 로마에서 순교했는지, 로마에 묻혔는지를 입증할 당대의 문서나 고고학적 자료를 찾아내 실증하려고 노력했다. 독일 문헌학자 오토 즈비어레인이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2009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성 베드로를 다뤘을 법한 문헌을 조사했다. 성 베드로가 로마에 갔고 그곳에서 순교했다는 문서 기록은 물론 고고학적 자료를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성 베드로가 기독교 주장대로 로마에 가서 여러 신도를 만나 활동했다면 왜 당대의 기록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까? 그는 평민뿐 아니라 귀족과도 교류했다는데, 신도가 된 여러 귀족 중에서 어느 누구도 그의 포교, 순교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든 일이다.
기독교는 ‘성 베드로가 예수와 똑같은 죽음을 당할 자격이 없다며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일부러 고통을 자초했다’고 말해 ‘거꾸로 십자가형’이 매우 독특한 것처럼 묘사하지만 사실 ‘거꾸로 십자가형’은 고대 로마에 드물지 않았다. 1세기 로마 정치인 세네카가 쓴 글 중에 ‘십자가를 봤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였다. 일부는 머리를 땅 쪽으로 거꾸로 매달려 못 박혔다. 일부는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못 박혔고 다른 일부는 ‘은밀한 부위’에 못 박혔다’는 내용이 있다. 성 베드로 순교 이전에 이미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성 베드로가 순교한 뒤 기독교인들이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든 죽으면 무덤을 갖게 해 주는 게 고대 로마의 풍습이었다. 로마인은 ‘적당한 장례를 치러주고 무덤도 만들어 주어야 망자가 저승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무덤을 얻지 못한 망자는 저승 입장을 거부당해 연옥을 떠돌아다니며 영원히 고통스럽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마인은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저승에 못 가서 유령으로 떠돌아다니는 낭패를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로 황제처럼 '최악의 악인’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무덤을 갖게 해 주었다. 이런 로마의 관습 덕분에 처형당한 기독교인도 다 무덤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기독교인은 사망자가 세상을 버린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시신을 묻는 게 관습이었다. 그래서 성 베드로는 전차경기장 옆을 지나던 비아 코르넬리아 주변에 묻혔다.
이와는 달리 ‘탄압받는 기독교’라는 시각에서 다른 주장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고대 로마인은 누구라도 무덤을 갖게 하는 전통을 가졌지만 처형한 사람의 경우에는 달랐다는 것이다. 특히 로마에 불을 지른 혐의로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동물에 잡아먹힌 기독교인의 경우에는 더 심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고대 로마에서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한 사람은 시신이 완전히 썩을 때까지 십자가에 그대로 매달렸다. 노예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에 동조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로마군에 패하고 붙잡힌 노예 6000여 명은 십자가에 못 박혀 아피아 가도 양쪽에 세워졌는데 그들의 시신도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그대로 버려졌다고 한다.
‘탄압받는 기독교’를 내세우는 사람은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네로가 끔찍한 의도를 가지고 대량 학살한 기독교인을 그가 즐겨 찾는 전차경기장 바로 옆의 도로변에 묻도록 허용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한다. 일부 기독교 역사학자는 ‘처형당한 기독교인 시신은 테베레강에 내던져지거나 불태워졌다. 그들은 묻힐 권리도 얻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 베드로의 시신도 전차경기장에 내버려졌다. 다른 기독교인이 밤에 몰래, 또는 뇌물을 써서 시신을 빼내 도로변에 묻었을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대충 들으면 이런 주장에도 나름대로 논리성은 있지만 허점도 적지 않다. 먼저 처형 규모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백 명의 시신을 강에 던져 버린다는 것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이 아니다. 그랬다가는 당장 로마인의 주요 식수였던 강물이 오염되고 전염병이 번질 우려가 컸다. 고대 로마인은 부족한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 로마 인근에서 수원을 개발해 수로를 만들기도 했지만 기본적이면서 가장 중요한 수원은 역시 테베레강이었다. 게다가 기독교 처형의 원인이 됐던 로마 대화재 때 수로도 큰 피해를 입어 많은 로마인은 물 부족에 시달렸다. 그들은 결국 강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러한데 기독교인 시신 수백 구를 테베레강에 버렸다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못한 설명이다.
다른 이유도 살펴봐야 한다. 기독교 학살이 벌어진 네로 전차경기장 안에 십자가에 매달렸거나 동물에게 물어뜯긴 시신 수십~수백 구를 그대로 놔둔다면 다음날 처형을 진행할 수도 없었고, 다른 경기를 벌일 수도 없었다. 대전차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마르스 평원에 있던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이 불타는 바람에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로마인이 대형 화재로 얻은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전차경기나 검투사경기를 임시로라도 진행할 수 있는 곳은 네로 전차경기장뿐이었다.
모든 점을 감안해 논리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로마인들은 전차경기장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동물에 물어 뜯겨 죽은 기독교인의 시신을 수레에 실어 전차경기장 바깥으로 가져가 멀리 떨어진 곳이나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은 곳에 대량으로 폐기하거나 묻었을 가능성이 높다. 살아남은 기독교인이나 죽은 기독교인의 친인척은 이곳에서 사망자 시신을 몰래 가져가 순교 장소인 전차경기장 인근이나 다른 곳에 묻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처형과 폐기를 관리했던 로마 관리나 병사는 귀찮아서 또는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고도 묵인했을 것이고 로마 당국도 시신에게까지는 가혹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인 유족은 시신을 시내에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에 순교지 인근에 서둘러 묻었다. 시내 바깥에 시신을 묻을 곳은 지천이었다. 비아 아피아, 비아 플라미니아 같은 도로변에는 공동묘지가 즐비했다. 바티카누스 옆을 지났던 비아 코르넬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이 도로 주변에도 공동묘지가 있었다. 기독교인의 공동묘지가 아니라 원래 평범한 로마인이 묻히던 곳이었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비아 코르넬리아 도로변 지하에 만들어졌다. 당시 평범한 로마인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화장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은 이와는 달리 화장하지 않고 시신을 매장했다. 성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인들은 계단을 통해 걸어 내려가야 하는 지하 공동묘지에 그의 무덤을 만들었다. 시신을 넣은 석관은 무덤 가운데에 두었다. 성 베드로가 묻힌 무덤의 지상 부분에는 그를 상징하는 크고 붉은 바위 하나를 놓아 그의 무덤이라는 걸 표시했다. 아나클레토는 나중에 바위를 치우고 서너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기념물을 지었다. 초대 교황 성 베드로부터 시작해 역대 교황의 일대기를 담은 『교황들의 책』에 그런 내용이 담겨 있다.
소식을 듣고 곳곳에서 순례자들이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모여들었다. 기독교 박해가 이어지는 시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순례자들은 성인의 무덤에서 예배를 드리다 로마 병사들에게 붙잡혀 가기도 했다. 기독교로부터 ‘배교자’라는 별명을 얻었던 율리아누스 황제가 363년에 쓴 저서 『갈릴리 사람들에 대한 세 가지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성 베드로의 무덤은 예배의 장소가 됐다. 물론 비밀리였지만.’
상당수 역사학자는 기독교인들은 성 베드로가 어디에 묻혔는지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고 주장한다. 그게 들통 나면 로마 당국이 성 베드로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훼손할 게 뻔하다고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아나클레토는 성 베드로 무덤 위에 건설한 작은 기념물을 그리스 신전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야 이교도인 로마인의 눈에 띄지 않기 때문에 성 베드로의 무덤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굳이 눈에 띄는 기념물을 만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는 당시 로마인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인 그리고 고대 이집트인까지도 가족, 친척이나 지인을 묻으면 각종 비석이나 기념물을 짓는 게 일반적이었다. 로마와 그리스에서는 이 같은 기념물을 케노타피아라고 불렀다. 기독교인이나 아나클레토만 그런 걸 만든 게 아니라는 뜻이다. 게다가 그때는 무덤 기념물 양식이 다양하지 않았던 데다 그리스 신전 양식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비슷한 기념물을 만들었다. 당연히 성 베드로를 묻은 기독교인도 무덤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범하고 만들기 쉬워서 그리스 신전 양식의 기념물을 지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여기에 덧붙여 성 베드로는 로마 지도층이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볼 정도로 비중이 높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로마 입장에서는 성 베드로는 흔하디 흔한 기독교인 중 한 명이었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풍부해 젊은 기독교인이 따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로마 당국은 그가 예수의 수제자인지 아닌지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로마 당국이 겨우 그 정도 가치를 가진 인물이 어디에 묻혔는지를 알아내려고 애를 쓰고, 한 걸음 더 나가아 굳이 무덤까지 파헤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성 베드로의 유해는 200년가량 지하 무덤에 안전하게 모셔졌다. 망자가 묻힌 곳은 절대 훼손하지 않는 게 고대 로마의 풍습이었던 덕분이다. 로마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누구든 남의 무덤을 손상하는 것은 종교적으로 신을 모독하는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범죄 행위였다. 이런 일을 저지른 사람은 처벌을 받았다. 남의 무덤에서 몰래 유해를 옮기는 것은 더 심각한 범죄였다. 이 경우에는 범죄자를 사형시키거나 로마에서 영구 추방시키기도 했다. 성 베드로의 무덤 주변에는 다른 기독교인이 연이어 묻혔다. 아무리 기독교인들이 비밀에 부쳤다고 해도 적지 않은 기독교인의 무덤이 모인 장소를 당시 로마 당국이 몰랐을 리가 없다. 그 증거는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칙서였다.
고대 로마가 평화로웠던 오현제 시대가 지나고 온 세상이 어지러웠던 3세기 중엽 군인황제 시대에 야만족을 물리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무덤을 보호하는 풍습의 특권에서 기독교인을 제외한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질서를 어지럽히고 제국에 협조하지 않는 기독교인은 로마에 묻힐 자격이 없으며, 불손한 기독교인의 무덤까지 보호할 이유는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런 조치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시 로마 당국도 로마 외곽에 기독교인 무덤이 많았다는 걸 이미 알았다는 뜻이 된다.
성 베드로의 유해가 훼손될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기독교인들은 비밀리에 성 베드로의 유해를 빼내 성 세바스티아노의 카타콤베 깊숙한 곳에 숨겼다. 성인의 유해를 옮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부분 기독교도는 유해가 원래 묘지에 그대로 있다고 믿었다. 세월이 흘러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고 기독교 탄압이 시들해졌을 때에야 성 베드로의 유해는 원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