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드로 대성당(3)이교 신전, 대성당으로 변하다

by leo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의 계단으로 올라가 성 베드로 광장을 내려다본다. 콜로네이드 바깥으로 시원하게 뻗은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 거리가 보이고, 멀리 거리 끝부분에는 테베레강과 강변의 푸른 나무들이 미세먼지 사이로 희미하게 등장한다.


성 베드로 광장과 콘칠리아치오네 사이에는 사다리꼴 광장이 있다. 이름은 교황 비오 12세 광장이다. 콘칠리아치오네는 1929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와 교황청 사이에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된 걸 기념해 만든 거리이고, 교황 비오 12세 광장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한 교황 비오 11세의 후임자였던 교황 비오 12세를 기념해 이름을 붙인 곳이다. 조약은 비오 11세가 체결했지만 콘칠리아치오네 거리가 완공됐을 때 교황은 비오 12세였기 때문에 이탈리아 정부가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교황 비오 12세 광장은 속세와 ‘신국(神國)’의 중간지점이다. 이 광장을 사이에 두고 콜로네이드 안은 교황청 국가인 바티칸시국이고, 바깥은 이탈리아 수도 로마다. 콜로네이드를 지나 성 베드로 광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이탈리아에서 벗어나 바티칸시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로 ‘입국’하는 것이다. 좀 더 성스럽고 거룩하게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로마라는 ‘인간 세상’에서 바티칸시국이라는 ‘신의 나라’로 한 걸음 들여놓게 되는 셈이다. 콜로네이드를 지나 광장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가장 먼저 ‘신에게 가는 길’을 가르쳐주는 나침반 바늘 같은 오벨리스크의 안내를 받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거룩한 미소를 만나게 된다.


사실 로마에 여행하러 다니기 전까지 바티칸이라는 이름을 많이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 어떤 역사를 가진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교황이 사는 곳이며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라는 단순한 상식 정도였다. 학교에 다닐 때 역사 선생님도, 많은 여행 가이드북도 이 나라의 역사는 물론 이름의 의미를 설명해주지 못했다. 로마를 여러 차례 여행하면서 각종 자료를 공부한 덕분에 겨우 역사와 이름의 유래를 알게 됐다.



바티칸의 정식 명칭은 바티칸시국이다. 영어로는 ‘바티칸 시티 스테이트(Vatican City State)’, 이탈리아어로는 ‘시타 델 바티카노(Città del Vaticano)’다. 면적은 49만㎡, 인구는 1000명에도 못 미치는 작은 도시국가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생겼으니 2029년이면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바티칸이라는 이름이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은 라테라노 조약이었다. 바티칸시국의 정부를 ‘홀리 시(Holy See)’라고 하는데 이는 ‘성좌(聖座)’라는 라틴어 ‘Sancta Sedes’를 단순히 영어로 옮긴 것이다.


바티칸시국은 중세부터 존재했던 교황청국가가 멸망하고 60여 년 뒤 새로 태어난 국가였다. 전 세계의 모든 신도로부터 자랑스럽고 떳떳하게 축복을 받으면서 탄생한 ‘축하 케이크’라기보다는 교황청국가가 치욕과 수모를 맛보면서 속세권력에 밀리고 밀리다, 쪼그라들고 쪼그라든 끝에 가까스로 따낸 ‘빵 부스러기’에 불과했다. 교황과 교황청이 그 과정에서 보여준 부끄러운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그야말로 ‘흑역사’로 역사책에 깊이 새겨져 남았다. 교황과 교황청은 하마터면 아예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으며, 영국이나 독일로 옮겨갈 위기도 맞았다. 중세의 교황청은 엄청난 권력과 위엄을 자랑했고 평범한 신도는 물론 왕과 황제에게도 공포와 두려움의 존재였지만 근현대의 교황청은 권위는커녕 세속권력 앞에서 덜덜 떨다 무시당했던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설적인 증거가 바로 바티칸시국이다.


교황청 국가는 19세기까지만 해도 거대한 나라였다. 북쪽으로는 포강에서 남쪽으로는 테베레강에까지 이르는 넓은 영토를 가진 나라였다. 전체 면적은 416억㎡로 오늘날 이탈리아 국토의 9분의 1 정도를 차지했다. 여기에 포함된 주요 도시는 로마는 물론 팔레르모, 코르시카, 볼로냐, 파르마와 아드리아해의 주요 항구였다. 인구는 300만 명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거대했던 교황청 국가는 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로 쪼그라든 것일까?


그 시작은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와 현대국가 건설의 바람이 거세게 불던 19세기 중엽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통일 운동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모든 소국은 통일에 찬성했지만 교황청 국가만 유독 극렬하게 반대했다. 이 때문에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탄생을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발표하려던 통일 영웅 카부르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이탈리아왕국은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와 남부를 통합했지만 교황청 국가 때문에 허리가 잘린 꼴이 됐다.


이탈리아왕국은 로마도 통일국가에 포함시켜 수도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교황청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대규모 병력을 로마에 주둔시킨 당대 최강국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 때문에 로마로 진격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왕국은 무기 수준에서 앞서고 규모도 상당한 프랑스군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어 로마로 쳐들어갈 엄두도 못 냈다. 이탈리아통일의 3대 영웅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가리발디가 주저하는 정부를 비난하며 자원병을 이끌고 두 차례나 로마 진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처음에는 시기상조라며 말린 이탈리아왕국 정규군의 방해 때문에, 두 번째는 프랑스군과 유럽 곳곳에서 교황청국가를 지키겠다며 모인 자원병을 중심으로 꾸려진 연합군에 패해 실패했다.


이탈리아왕국에 기회가 찾아온 것은 프로이센과 전쟁을 벌이던 프랑스가 1870년 9월 1일 세단 전투에서 대패하고, 나폴레옹 3세는 포로로 붙잡혀 참수형을 당한 이후였다.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왕국은 주저하지 않고 19일 뒤인 9월 20일 로마로 쳐들어가 도시를 병합했다. 로마를 지키던 프랑스 병사들은 프로이센과의 전쟁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 버렸고, 교황청국가 병사들과 지원병은 이탈리아왕국 정규군에 상대가 되지 않아 사실상 저항할 수 없었다. 기세를 올린 이탈리아왕국은 이듬해 2월 3일에는 로마를 이탈리아왕국 수도로 선포했다.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왕국은 로마로 쳐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교황청국가는 오늘날까지 존속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바티칸시티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는 지도에 이름이 새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교황은 중세만 하더라도 ‘파문’이라는 무기로 속세의 권력을 제한했다. 10세기 프랑스의 ‘경건왕’ 로베르가 결혼 문제로 교황청과 맞섰을 때 교황은 그를 파문한 뒤 프랑스의 모든 성당에 각종 종교 의식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이 때문에 국왕은 주변으로부터 외면당해 고립돼 버렸다. 궁전에서 그를 모시던 시종들까지 모두 달아나버려 식사도 못 할 처지였다. 하지만 19세기 이탈리아는 중세 프랑스가 아니었다. 교황이 중세에 국왕의 세속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용했던 파문이라는 ‘신의 무기’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탈리아 왕국 군대가 교황청을 무시하고 로마를 병합했지만 군대에 저항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교황이 성직자 및 일부 신도를 동원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항의시위를 벌였지만 이탈리아왕국은 군대를 동원해 순식간에 진압해 버렸다.


이탈리아왕국이 통일운동을 벌일 때 교황이던 비오 9세(재임 1846~1878년)는 기독교의 힘을 모아 죽을 각오로 저항하거나,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이탈리아왕국에 협력해 교황청의 위상을 지키는 대신 엉뚱하게도 부끄러운 행동만 거듭했다. 그는 하느님을 모시는 최고 성직자이면서 무엇보다 죽는 걸 두려워했다. “이탈리아왕국이 나를 죽일지 모른다”며 늘 공포에 떨었다. 그 탓에 여러 차례 로마를 탈출해 외국으로 달아나려고 시도했다. 1848년 교황청 재무장관 펠레그리노 로시가 암살당하자 교황은 평신도로 변장해 로마를 탈출하려고 했고, 1862년 가리발디가 로마 진격을 시도했을 때 교황청국가 연합군이 방어에 나섰는데도 두려움에 떨며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 교황과 교황청국가를 지키려고 싸우다 유럽에서 모인 자원병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그는 여기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비오 9세는 심지어 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떠날 생각까지 했다. 그는 로마를 방문한 영국 외교관 오도 러셀에게 “이탈리아왕국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면 영국에서 정치적 망명을 받아줄 수 있느냐”고 물어봤다. 러셀은 영국 정부에 보낸 정보에서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교황의 두려움은 과장됐고 근거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교황에게는 “기꺼이 망명을 허용하겠다”고 답변했다. 만약 그가 영국으로 망명했다면 지금쯤 교황청은 붕괴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껏해야 영국 런던에서 ‘교황청 망명 정부’라는 이름으로 명목만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비오 9세는 이탈리아왕국 군대가 로마를 점령한 뒤에는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에게 망명을 요청했다. 비스마르크는 지인에게 “교황의 문의를 듣고 쾰른이나 풀다에 기꺼이 받아주겠다고 대답했다. 교황이 프로이센에 오면 여러 가지로 큰 이득이다”라고 말했다. 만약 교황이 독일에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바티칸시국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침략국을 비난하지 않고 중립을 선언해 전 세계를 경악시킨 것처럼, 독일의 교황청은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비난하는 대신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랬다면 두 전쟁의 향방은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는 교황에게 중립만 요구했지만,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그 이상을 요구했을 게 분명하다. 자칫 교황이 전쟁의 선전대 역할을 맡도록 내몰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교황의 로마 탈출과 외국 망명은 실현되지 않았다. 교황의 지인인 돈 보스코가 교황에게 “교황청의 초병인 이스라엘의 천사에게 자리를 철통같이 지키고, 신의 성채를 튼튼히 보호하라고 하십시오”라고 조언하자 교황은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전해진다.


교황청국가를 무너뜨린 이탈리아왕국은 교황과 교황청을 보호한다는 내용의 ‘보장법’을 선포했다. ‘교황은 이탈리아 국적을 유지하고 다른 시민과 비교할 때 각종 특혜를 유지하며, 매년 연금으로 322만 5000리라(약 200억 원)를 받는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교황은 이탈리아왕국이 제시한 모든 특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왕국은 또 교황에게 초미니국가 설립을 제안했지만 교황은 이마저 거부했다. 이탈리아왕국이 제안한 국가 이름은 레온시국이라는 뜻인 ‘시타 레오니아(città leonina)였다. 만약 교황이 이를 받아들였다면 오늘날에는 바티칸시국이라는 나라 대신 레온시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레온이라는 이름은 교황청이 중세에 건설된 레온성벽 안에 있다는 것에 착안해 붙여졌다.


비오 9세는 이탈리아왕국을 침략자라고 강하게 비난하면서 “나는 침략자의 포로”라고 울부짖으며 일체 협상을 거부했다. 로마의 모든 성직자에게는 이탈리아왕국에 절대 협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바티칸 궁전과 레온 성벽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고 일부러 ‘자진 감금’ 상태에 들어갔다. 첫 번째 이유는 밖으로 나갔다가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이런 소극적 행동이라도 해서 이탈리아왕국에 저항하겠다는 것이었다. 비오 9세의 후임 교황인 레오 13세(재임 1878~1903년), 비오 10세(재임 1903~1914년), 베네딕토 15세(재임 1914~1922년), 비오 11세(재임 1922~1939년)도 선임 교황의 뜻에 따라 교황청에 칩거했다. 역사가들은 이 기간의 여러 교황을 ‘바티칸의 죄수들’이라고불렀다. 세계 각국의 가톨릭 신도들이 항의했지만 허공에 외치는 공허한 함성에 불과했다. 교황과 교황청의 지위를 어떻게 결정하느냐 하는 과제는 ‘로마의 문제’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로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은 1926년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 사이에서 진행되기 시작됐다. 이탈리아 왕국을 대표한 베니토 무솔리니 총리, 교황청을 대표한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이 협상을 주도했다. 양측은 협상 3년 만에 결말을 보았다. 조약에 서명한 사람은 무솔리니와 가스파리였다. 라테라노 조약의 핵심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교황청은 모든 정치적, 세속적 권력을 이탈리아 왕국에 넘겨준다. 대신 교황청 국가인 바티칸시국을 새로 만들고, 모든 권력을 넘겨둔 대가로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다 무솔리니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했지만 교황청은 두고두고 역사로부터 비난을 받는 조항이 들어갔다. ‘교황은 국내외 문제에 영원히 중립을 지키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 합의에 따라 요청하지 않을 경우 양측은 절대 중재에 나서지 않는다.’ 무솔리니는 이 조항 덕분에 교황이 반파시스트 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떠오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고, 무슨 짓을 저지르더라도 교황청이 방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교황청은 라테라노 조약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교황청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효력을 얻었다는 게 자체 평가였다. 하지만 외부의 시선은 가혹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뒀다는 것이었다. 교황청이 조약을 통해 무솔리니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시켜 줌으로써 결국 이탈리아를 전체주의의 악몽으로 몰아넣는 데 협조한 결과를 낳았다는 게 비판의 요지였다. 교황이 무솔리니 정부를 인정함으로써 가톨릭 신도가 90%를 넘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가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돼 결국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는 것이었다. 교황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두 눈을 딱 감고 중립을 선언했고, 무솔리니에게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교황청과 무솔리니는 새 교회 국가에 하필이면 바티칸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일까? 가톨릭시국이나 그리스도시국, 아니면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으니 베드로시국처럼 누가 들어도 금세 알 수 있는 종교적 상징성을 가진 이름이 많은데 왜 하필 바티칸었을까?


그 사연을 알려면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오늘날 바티칸 지역은 2000년 전 고대 로마 시대에는 바티카누스라고 불렸다. 아게르 바티카누스라는 평원과 콜레 바티카누스라는 언덕으로 구성된 지역이었다. 지금은 로마 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시내에서 멀리 벗어난 외곽으로 여겨졌다. 원래는 로마의 숙적이던 에트루리아의 영토였으나 로마가 세력을 확장해 빼앗았다. 바티카누스는 로마 왕정과 공화정 시대 초기에는 외적이 로마로 쳐들어오는 걸 감시하는 역할을 했던 야니쿨룸 언덕 인근이었다. 로마로 몰려온 적군이 강을 건너 로마를 공격하기에 앞서 진지를 설치한 장소이기도 했다. 고대 로마인은 이곳을 갈 때면 “바티카누스에 간다”고 말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중세에도, 그리고 세월이 더 흘러 현대에도 로마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을 바티카노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교황청국가가 문을 닫고 새로 생긴 교회 국가에 바티칸시국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었다.


사실 바티카누스는 에트루리아인이 모셨던 ‘출산의 신’의 이름이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바티카누스는 갓 태어난 아이가 처음 말을 하는 순간, 즉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을 만들어주는 신이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더라도 이른 시간에 울음을 터뜨리지 못하면 목숨을 건지기 어렵다. 이때 가호를 베풀어 아기에게 울음을 선물하는 신이 바티카누스였다. 라틴어로 ‘운다’는 단어는 바티카누스와 비슷한 ‘바기투스’였다. 고대에는 바티카누스 평원에 바티카누스를 모신 신전이 있었다. 출산을 앞둔 많은 여성이 그곳을 찾아가 신에게 ‘아기가 태어나 무사히 울음을 터뜨릴 수 있게 해 달라’고 빌었다. 이곳에 바티카누스 신전이 있었기 때문에 바티카누스 언덕, 평원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주장도 있다. 바티카누스라는 이름은 ‘예언’을 뜻하는 라틴어 ‘바티키노르‘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 이전부터 이곳에는 신의 말씀이나 예언을 전해주는 신탁 성소가 여럿 있었고, 에트루리아의 점쟁이들이 연례 모임을 이곳에서 열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서 한번 차분히 생각해보자. 먼저 바티칸이라는 지명은 이교도의 신에게서 나왔다. 땅 한가운데엔 이교도의 상징인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이에 더해 ‘교황’을 뜻하는 단어 ‘폰티프‘가 원래 고대 로마의 ‘다리 관리인’이었고 나중에는 ‘이교도’ 제사장을 일컫던 ‘폰티피케스’에서 나왔다는 사실까지 감안하고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둘러보자. 이곳이 기독교의 성지인지 이교도의 성지인지 헷갈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왜 하필이면 이교도 신전이 있던 바티카누스에 기독교 최고의 성지인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은 것일까? 그 길고도 긴 역사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에 이어 고대 로마 제정의 3번째 황제였던 칼리굴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칼리굴라는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의 외증손자였다. 아버지는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맹활약해 로마인의 사랑을 받았던 게르마니쿠스,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인 아그리피나였다.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칼리굴라는 어릴 때부터 외증조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아버지가 시리아에서 병에 걸려 30대 초반에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칼리굴라의 인생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2대 황제 티베리우스와 사이가 나빴던 어머니는 벤토테네 섬에 유배됐다가 병들어 죽고 말았다. 큰형 네로 카이사르는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폰차 섬에 갇힌 뒤 눈을 감았다. 둘째 형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황궁 지하실에 투옥됐다가 목숨을 잃었다. 부모형제를 모두 잃은 칼리굴라는 외할아버지 드루수스의 형, 즉 외종조부인 티베리우스와 함께 카프리 섬의 별장에서 살게 됐다. 한마디로 ‘원수와의 동거’였던 셈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가 칼리굴라를 고통스럽게 죽이려고 데려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서기 37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무슨 이유에서인지 뜻밖에 칼리굴라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다. 졸지에 지존이 된 칼리굴라는 세상 경험이 부족했고 제국을 통치할 능력도 없었다. 다만 로마인들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잘 알았다. 그는 로마인들이 좋아하는 오락을 마음껏 제공해 인기 있는 황제가 되기로 했다.


칼리굴라는 전차경주를 매우 좋아했다. 대전차경기장 키르쿠스 막시무스에서 펼쳐지는 전차경주의 엄청난 속도전은 티베리우스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살았던 그에게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짜릿한 쾌감을 주었다. 칼리굴라에게는 특별히 좋아하는 전차경주 팀이 있었다. 경기가 끝나면 마구간에서 열리는 그 팀의 파티에 참석해 기수들과 술잔을 나눌 정도였다. 칼리굴라는 전차를 직접 몰아보고 싶었지만 경주에 출전할 기량은 갖지 못했다. 고민하던 그는 혼자서 마음껏 전차를 몰 수 있는 개인용 경기장을 짓기로 했다. 장소는 테베레강 건너편 서쪽 바티카누스 평원으로 정했다. 땅 주인은 티베리우스 때문에 목숨을 잃은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였기 때문에 땅을 사느라 돈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칼리굴라가 건설한 전차경기장의 길이는 161m였다. 일부에서는 무려 500m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그가 로마 시내 대신 외곽에 경기장을 지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먼저 로마 시내에는 전차경기장을 새로 지을 땅이 없었다. 또 인기에 신경을 쓰느라 시민 눈치를 많이 봤던 그로서는 시내 한복판에 황제 혼자서만 이용하는 사설 경기장을 만들 배짱이 모자랐을 것이다. 칼리굴라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오벨리스크를 가져와 전차경기장에 세웠다. 아우구스투스가 키르쿠스 막시무스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전례를 모방한 것이었다. 지금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에 서 있는 ‘성 베드로 순교의 목격자’가 바로 칼리굴라가 가져온 오벨리스크다.


칼리굴라는 무게만 413t에 이르는 오벨리스크를 절단하지 않고 통째로 운반하려고 초대형 선박을 만들었다. 전나무로 만든 선박의 무게는 무려 800t에 이르렀다. 중앙 돛대도 엄청 굵어서 선원 네 명이 팔을 벌려야 겨우 둘러쌀 수 있을 정도였다. 배 길이는 오늘날 항공모함과 비슷한 105m, 너비는 20m였다. 배는 6층이었다. 선원은 700~800명 정도였다.


칼리굴라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뒤를 이은 제5대 네로 황제도 칼리굴라가 지은 전차경기장을 매우 좋아했다. 사람들은 이 경기장을 네로전차경기장이나 칼리굴라-네로전차경기장이라고 불렀다. 네로는 경기장을 고쳐 시민들에게 오락장으로 개방했다. 그는 이곳에서 귀족 육상대회라는 이색 행사를 열었다. 대회 참가자는 지도 계층인 원로원 의원들과 제2계급인 기사계급이었다. 일반 시민들은 관중으로 경기를 구경하게 했다. 나이가 들어 운동을 하지 않아 살이 찐 의원들이 달리기를 하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지만 시민들이 깔깔 웃으면서 재미있게 보기에는 충분했다.


네로가 전차경기장을 이용하는 장면에서부터 기독교 순교의 역사, 성 베드로 순교의 이야기가 나온다. 국정에 관심이 없었던 데다 잔소리를 한다는 이유로 어머니마저 암살한 네로는 64년에 발생한 대화재로 민심이 흉흉해지는 바람에 궁지에 몰렸다. ‘황제가 음악을 작곡하는 데 필요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 또는 ‘도무스 아우레아(황금 궁전)를 지을 부지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시민 사이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네로는 정치적 위기의 탈출구를 기독교에서 찾았다.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멸망을 꿈꾸면서 일부러 불을 질렀다고 몰아세운 뒤 수백 명을 바티카누스로 끌고 가 처형했다.


기독교인들은 폰스 네로니아누스, 즉 네로 다리를 건너 바티카누스로 끌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부서져 없어진 네로 다리는 오늘날의 베네치아 광장으로 연결되는 폰테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다리 근처에 있었다. 이 다리는 칼리굴라나 네로가 마르스 평원과 바티카누스를 연결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었다. 성 베드로도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이 다리를 통해 전차경기장으로 끌려갔을지 모른다. 네로 다리를 건너면 곧바로 비아 코르넬리아로 연결됐다. 네로가 전차경기장과 인근 황실의 정원으로 가장 빨리 갈 수 있도록 만든 길이었다. 당시에는 전차경기장 북쪽 벽에 붙어 지나간 도로였다. 오늘날의 지도에 대입해 보면 콘칠리아치오네 거리를 거쳐 성 베드로 광장 가운데를 지나다 오벨리스크 근처에서 북쪽으로 꺾어 성 베드로 대성당 북쪽과 바티칸 궁전 사이로 빠져나간 셈이었다. 오늘 로마에 여행을 가서 베네치아 광장~폰테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다리~콘칠리아치오네 거리를 따라 걷는다면 1세기 기독교 순교의 길을 거의 비슷하게 따라 걷는 셈이 된다. 한마디로 ‘성스러운 순교의 길’을 복원하는 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상하게 여겨지는 게 하나 있다. 네로는 왜 공간이 넓은 데다 시내 인근인 키르쿠스 막시무스(대전차경기장) 같은 대형 시설에서 기독교인을 처형하지 않았을까? 그는 왜 당시로서는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바티카누스에서 기독교인을 처형했을까? 네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역시 대화재였다. 키르쿠스 막시무스와 오늘날 나보나 광장에 있던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은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처형장으로 사용하기 어려웠다. 로마라고 하면 떠오르는 검투사경기장인 콜로세움은 네로 시대에는 아직 건설되지 않았다. 결국 네로는 기독교인을 대거 처형할 장소로 로마 외곽의 전차경기장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성 베드로가 언제 순교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성 베드로와 비슷한 시기에 로마에 있었다는 성 바오로는 기독교 처형의 물결이 몰아쳤던 68년 전후에 순교했다고 하니 성 베드로도 비슷한 시기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로마 시민이었던 성 바오로는 참수형을 당했지만 성 베드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다. 로마에서 십자가형은 원래 노예를 처벌하기 위해 이용됐다. 스파르타쿠스가 BC 71년에 일으킨 노예 반란에 가담했다 패배한 로마의 노예 수천 명도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천천히 피를 흘리다 고통스럽게 죽었다. 나중에는 해적이나 반역자는 물론 하급계층 시민을 처형하는 데에도 이용됐다.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발가벗긴 채 천천히 고문까지 당하며 죽어 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곳에 내걸렸다.


기독교인들은 나중에 ‘로마에 있던 성 베드로는 네로 시대에 전차경기장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고, 전차경기장 옆의 공동묘지 지하에 묻혔다’고 믿었다. 성 베드로는 당시 로마에 가서 성 바오로와 별개로 기독교를 포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인들은 순교한 성 베드로를 전차경기장 인근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나중에 성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는 자리에 대성당을 지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끝에 에트루리아의 ‘출산의 신’을 모신 신전이 있던 평원이었고 나중에 칼리굴라가 전차경기장을 지었던 장소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건설됐던 것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역사를 이렇게 쭉 훑어보다 보면 참 흥미롭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라는 것은, 그리고 인간사라는 것은 정말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에트루리아인들이 바티카누스의 신전을 지을 때만 해도, 칼리굴라가 전차경기장을 건설할 때만 해도, 네로가 불타는 로마를 보며 노래를 부를 때만 해도 먼 훗날에 이곳이 기독교의 성지가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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