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여행객들이 바티칸 박물관이나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갈 때 선택하는 대표적인 ‘길’은 지하철이나 버스다. 지하철을 이용할 경우 A라인 오타비아노역에서 내려 10분만 걸으면 바티칸 박물관과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 도착할 수 있으니 매우 편리하다. 버스는 출발하는 지점에 따라 다양한 노선이 성 베드로 대성당 인근을 지나가기 때문에 선택의 폭이 넓다.
우리 가족이 2010년 2월 두 번째 로마 여행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갈 때 택한 길은 첫 방문이나 여느 관광객과는 달리 지하철이나 버스가 아니었다. 고대 로마에 건설된 많은 다리 중에서 보기 드물게 여전히 튼튼하게 살아남은 폰스 아일리우스였다. 산탄젤로 성 앞에 자리를 잡아 지금은 이름이 폰테 산탄젤로로 바뀐 다리였다..
우리는 7세기 교황 보니파시오 4세(재임 608~615년)가 교회로 용도를 변경하는 축성식 도중 많은 악마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난 기적이 일어났다는 고대 로마의 ‘범신전’ 판테온과 하느님의 은총 덕분에 길게 자라난 머리가 온몸을 뒤덮어 순결을 지킨 성 아그네스의 순교 현장인 나보나 광장을 둘러본 뒤 테베레강 쪽으로 나갔다. 때마침 그날 겨울비가 촉촉하게 내렸다. 돌로 덮인 강변의 인도는 빗물과 가로등 불빛에 젖었고, 좁은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저택의 유리창에는 따스한 집안의 온기가 수증기로 서렸다.
폰테 산탄젤로 다리 상부 난간에는 17세기 교황 클레멘스 9세(재임 1667~69년)가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 지시해 만든 천사 조각상 10개가 설치돼 매우 깊은 인상을 줬다. 천사 조각상은 다리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다리 건너편 산탄젤로 성 꼭대기에도 조각상이 하나 있었다. 교황 대 그레고리오 1세(재임 590~604년)가 천사장 미카엘을 만난 기적이라는 전설을 담아 만든 ‘칼을 든 미카엘’ 조각상이었다. 미카엘의 칼은 하느님을 거역하는 인간을 벌한다는 의미를 상징한다고 했다. 비가 내려 세상은 매우 흐린 데다 미카엘을 포함해 모든 조각상은 빗물에 푹 젖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는 다리 위 천사의 표정은 엄숙하고 어두웠고, 우산을 쓰고 지나는 행인을 내려다보는 성 위 미카엘의 눈빛은 가슴을 관통할 것처럼 예리하고 아팠다.
우리가 폰테 산탄젤로를 통해 건넌 테베레강은 로마 한가운데를 S자 모양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이탈리아 중부 아펜니노 산맥 푸마이올로 산의 너도밤나무 숲에 있는 두 샘에서 발원해 로마를 거쳐 서부 피우미치오와 오스티아 사이를 통해 티레니아해로 빠져 나가는 총길이 406km의 긴 강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은 테베레강을 고대 로마와 동일시했다. 로마가 태어나고 망할 때까지 1200년 역사를 지켜본 강이었기 때문이다. 1세기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드』에 따르면 멸망한 트로이에서 탈출한 ‘로마의 조상’ 아이네아스 일행이 이탈리아에 도착한 곳은 테베레강의 종점인 오스티아였고,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가 늑대에게 구조돼 젖을 먹은 곳은 팔라티노 언덕 아래 테레베강 주변이었다. 로마가 여러 차례 야만족의 침탈에 시달리다 5세기에 끝내 멸망하는 장면을 지켜본 최후의 목격자도 테베레강이었다.
테베레강은 지금은 물론이거니와 3000년 전 고대에도 로마 일대를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놓았다. 동쪽은 로마인이 모여 살던 일곱 언덕과 마르스 평원이었고 서쪽은 나지막한 야니쿨룸 언덕과 황무지나 마찬가지인 바티카누스 언덕과 평원, 즉 오늘날의 바티칸이었다.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에서 고대 로마를 창건한 BC 8세기 무렵만 해도 테베레강 너머 바티카누스 일대는 에트루리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로마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로마가 연이어 전쟁을 벌여 영토를 넓히고 BC 2세기 제4대 국왕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테베레강에 첫 다리인 폰스 수블리키우스를 건설한 이후에야 로마인은 비로소 강을 마음 놓고 건널 수 있게 됐다.
나무다리였던 폰스 수블리키우스의 뒤를 이어 테베레강에는 석재다리가 연이어 건설돼 로마인이 강을 건너갈 선택지가 많아졌다. 그중 주요 다리를 살펴보면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우스가 공화정 시대인 BC 2세기 폰스 수블리키우스 바로 위쪽에 만든 폰테 에밀리오(아이밀리우스 다리), 네로 황제가 제정 시대인 1세기 바티카누스에 있던 전차경기장과 연결하기 위해 오늘날의 폰테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다리 근처에 만든 네로 다리,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2세기 황실 가족 영묘인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즉 오늘날의 산탄젤로 성 앞에 건설한 폰스 아일리우스가 있다.
테베레강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표현이 전한다. ‘테베레강에서 헤엄치다’라는 문장이다. 중세에 종교 갈등이 첨예할 때 만들어진 것인데,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개신교 신도가 로마로 가려면 반드시 강을 건너야 했다. 물론 강에는 다리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헤엄칠 필요는 없었지만 상징적으로 물에 몸을 담갔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었다. 물에 몸을 담근다는 것은 세례를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개신교도는 세례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다시 얻었다는 걸 암시한 문장이었던 셈이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지 않아 개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헤엄치는 대신 폰테 산탄젤로를 단순히 걸어 테베레강을 건넜다.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지나간 구간은 ‘화합의 거리’라는 뜻인 비아 델라 콘칠리아치오네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교황청과 종교, 정치 분리의 원칙을 담은 ‘라테라노 조약’을 맺은 걸 기념하기 위해 만든 도로였다. 교황청은 라테라노 조약 체결 때문에 두고두고 비판을 받았다. 교황청이 살아남으려고 파시스트 독재자를 정당화시켜 줬고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발발의 빌미를 줬다는 게 비판의 이유였다.
건설 이유야 어쨌든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뚫린 거리를 걸어가는 느낌은 꽤 좋았다. 대성당 정면을 한눈에 담으면서 걸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다가갈수록 대성당의 모양과 느낌이 서서히 조금씩 변하는 것을 확인하는 게 재미있었다. 예를 들자면 대성당의 포인트인 돔은 콘칠리아치오네 거리 입구에서는 볼 수 있지만 대성당에 가까이 갈수록 조금씩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실 돔과 정면 부분은 너무 서둘러 만드는 바람에 대성당의 각 부분 중에서 가장 완성도가 떨어지고 미학적으로도 처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돔은 너무 크고 정면 부분은 너무 작다는 게 주요 이유다. 건축 전문가도 아니고 미학자도 아니지만 유럽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성당, 교회를 직접 본 경험에 비춰볼 때 정면 부분은 어딘지 어색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높이 136m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은 세상에서 가장 큰 돔 구조물이라고 한다. 돔 내부에는 1.4m 크기의 글씨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리라’라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16장 18~19절 문구가 새겨졌다.
대성당의 돔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하고 지아코모 델라 포르타와 도메니코 폰타나가 완성했다. 피렌체 사람인 미켈란젤로는 누구나 다 아는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대예술가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조각 피에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벽화 천지창조,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조각 다비드상 등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을 연이어 만들었다.
미켈란젤로는 1546년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공사를 맡아달라는 교황 바오로 3세의 부탁을 받았다. 당시 건축가들은 대성당에 돔을 올리는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며 해답을 내놓지 못했는데, 교황이 선택할 수 있는 건축가는 미켈란젤로뿐이었다. 그는 고향 피렌체에 있는 두오모, 즉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생각했다. 피렌체의 지인으로부터 브루넬레스키가 100년 전 로마의 판테온 돔에 몰래 올라가 벽돌이 서로 완벽하고 견고하게 맞물려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두오모 돔에 적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직접 판테온에 가보기로 했다.
미켈란젤로는 사물을 볼 때는 항상 예술가의 눈으로 비판적인 견해를 견지하던 사람이었다. 어떤 일에 쉽게 감동받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판테온에 들어가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쉽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판테온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가 만든 것이야”라고 말했다.
지금은 돔 양식이 교회, 성당을 대표하는 구조물이지만 고대에는 사실 이교도의 건축 양식이었다. 먼저 이름부터 보자. 돔은 ‘집’을 뜻하는 그리스어와 라틴어 ‘도무스’에서 나온 말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데 ‘성스러운 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돔 모양 구조물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5만 년 전 석기 시대 무덤에서 먼저 나타난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돔처럼 둥근 반구를 천국의 형태라고 생각했다. 무덤을 돔 모양으로 만들면 ‘죽은 사람이 영원히 평화롭게 안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도의 스투파는 물론 우리나라의 둥근 무덤도 이런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성당의 돔도 천국의 집을 의미하고 석기 시대 무덤도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니 결국은 같은 곳을 향하는 셈이다. 5만 년 전 사람과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만든 16~17세기 기독교인이 돔을 보면서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게 신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경우에 딱 어울리는 표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가 아닐까?
고대 페르시아는 물론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사람들도 석기 시대 사람들과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사각형을 ‘지상’이라고 생각했고, 돔의 반구 모양은 ‘완벽’ ‘영원’ ‘천국’을 상징한다고 봤다. 8각형은 사각형과 원의 중간지대라고 여겼다. 페르시아 왕은 ‘우주’ ‘태양’ ‘천국’을 뜻하는 황금색 돔 모양 천막에서 신하, 외국 사절을 접견했는데 왕이 하늘과 연결된다는 점을 상징한 것이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도 이를 모방했는데 나중에 로마는 알렉산더를 따라 하면서 돔 모양을 도입했다.
1세기 고대 로마 네로 황제는 ‘황금 궁전’을 건설할 때 침실을 돔 모양으로 만들었다. 돔 모양 방에서 살면 황제의 신분이 신으로 승격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네로 전후 로마에 돔 형태 지붕을 가진 건축물이 여럿 들어섰지만 완벽한 형태로 적용된 것은 판테온이었다. 그 판테온을 보고 베낀 것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었다.
돔이 정면 너머로 서서히 사라지는 걸 보면서 성 베드로 대성당 앞의 너른 마당인 광장에 들어가자 광장을 동그랗게 에워싼 열주인 콜로네이드가 눈에 들어왔다. 대리석 기둥 248개가 네 줄로 늘어선 형태인 콜로네이드는 광장의 입구인 콘칠리아치오네 쪽으로 열렸고 반대편인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연결돼 끝났다.
베르니니가 17세기에 설계한 콜로네이드는 ‘성모 마리아의 따뜻한 품’을 상징한다고 했다. 광장을 에워싼 열주는 성모 마리아의 길게 벌린 두 팔이고 광장은 따스한 가슴인 셈이다. 따뜻한지 아닌지는 계절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사방으로 창이 난 방에 들어간 것처럼 포근하고 안온한 기운을 주고, 시각적으로 집중된 느낌을 준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지 않을까 한다.
엉뚱한 소리 같지만 신문사에서 성 베드로 광장 사진을 처음 봤을 때처럼 광장은 세상에서 가장 큰 해시계처럼 보였다. 실제 성 베드로 광장을 방문한 사람은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전망대에 올라가거나 드론을 이용해 공중에서 사진을 찍으면 광장은 정말 거대한 해시계처럼 보인다. 잘 살펴보면 성모 마리아의 따스한 품처럼 대리석 열주 회랑으로 둘러싸인 성 베드로 광장은 시계의 문자판처럼 둥글게 생겼다. 게다가 광장에는 진짜 시계판처럼 시간을 알려주듯 선이 그어져 있다. 진짜 시계에는 열두 시간을 가리키는 선 12개가 그어져 있다면 광장에는 8개만 그어진 게 다른 점이다. 그렇다면 해시계 바늘은? 광장 한가운데에 서 있는 4천500년 전 고대 이집트 오벨리스크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30만이 넘는 신을 모신 이교도의 제국이었던 고대 로마의 방향을 바꾼 기독교의 핵심 성소다. 유피테르 신으로 상징되는 고대 로마의 시계는 멈추고 성 베드로로 상징되는 기독교의 시계가 돌아가기 시작한 곳이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물론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성 베드로 광장을 시계처럼 만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보니 시계 모양을 이루게 됐을 것이다.
시계바늘처럼 뾰족한 오벨리스크 앞에 서서 광장을 한 바퀴 둘러본다. 이곳저곳에서 관광객이 나오거나 들어간다. 이번에는 오벨리스크를 올려다본다. 높이가 42m여서 제법 높은 편이다. 여행이 목적이든 순례가 목적이든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향하는 대부분 관람객은 오벨리스크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린다. 단순히 기념사진을 찍는 배경으로만 이용할 뿐이다. 이 건축물에 어떤 역사적, 종교적 의미가 담겼는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오벨리스크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깨닫게 된다.
일단 이름부터 알고 보자. 성 베드로 광장 한가운데 우뚝 선 오벨리스크의 이름은 ‘바티카노’다. 일부에서는 ‘칼리굴라의 오벨리스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다. 고대 로마의 3번째 황제였던 칼리굴라가 도시 외곽인 바티카누스 평원, 즉 오늘날 바티칸에 건설한 개인용 전차경기장을 장식하려고 서기 40년에 오벨리스크를 실어 온 것이었다. 그는 오벨리스크를 전차경기장 한복판에 세웠다.
사실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의 종교에서 최고의 신으로 받들었던 태양신 라를 상징하는 종교적 건축물이었다. 나중에는 태양에서 내려쬐는 빛을 상징했다. 이집트인은 ‘테케누’라고 불렀고, ‘못’이라는 뜻인 오벨리스크는 나중에 그리스인이 붙인 이름이었다. 당시 어지간한 이집트의 신전 앞에는 오벨리스크가 늘 두 개씩 서 있었다. 고대 로마는 다신교 국가였다. 외국의 종교라도 국가 질서를 해치지 않으면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칼리굴라가 태양신을 상징하는 오벨리스크를 전차경기장에 세웠더라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일신교인 기독교는 사정이 달랐다. 다른 종교를 절대적으로 배타시했고 그들의 종교적 상징물을 우상이라고 생각해 배척하고 파괴했다. 고대 로마에 많았던 신과 황제의 조각상이 거의 대부분 부서진 것은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그랬던 기독교는 왜 성 베드로 대성당 앞의 광장 한가운데에 이교도의 상징 중에서도 최고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를 가져다 놓은 것일까?
놀랍게도 중세 기독교는 오벨리스크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다. ‘오벨리스크는 바티카누스의 전차경기장에서 벌어진 성 베드로의 순교 장면을 지켜본 유일한 목격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스크를 파괴하기는커녕 성스러운 건축물로 숭배했던 것이었다. 오벨리스크가 오늘날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바라보는 광장의 정면에 서 있게 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지금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지만 오벨리스크는 중세에는 많은 기독교인의 숭배를 받았다. 그런 사실을 담은 기록도 있다. 15세기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의 여행가 페로 타푸르는 1436~1443년 7년 동안 오대양 육대주를 두루 여행한 다음에 쓴 『여행과 모험』이라는 책에 직접 본 오벨리스크를 상세히 묘사한 글을 남겼다. 참고로 그가 글을 썼을 때 성 베드로 대성당은 현재의 대성당이 아니라 이른바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었다. 오벨리스크도 성 베드로 광장 가운데가 아니라 바깥쪽에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인근에는 석재로 만든 높은 탑이 하나 있다. 구리로 만든 세 다리로 버티고 선 게 삼각 다이아몬드 모양이다. 많은 사람은 탑을 아주 성스럽게 여긴다. 탑을 지날 때에는 마치 땅바닥에 붙어 기어가듯이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중세 기독교는 왜 오벨리스크를 성 베드로의 순교를 목격한 성스러운 건축물로 여겼을까? 돌이켜 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성 베드로가 순교한 곳은 칼리굴라가 건설했고 네로가 좋아했던 전차경기장이었다. 그가 순교할 때 경기장에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었다. 당시 성 베드로가 죽는 모습을 지켜봤던 경기장의 모든 사람은 다 죽었고, 모든 시설은 파괴돼 없어졌다. 기독교는 성 베드로의 순교를 상징할 만한 기념물을 찾고 싶었다. 이런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여전히 우뚝 선 오벨리스크였다. 그래서 그들은 오벨리스크를 최후의 목격자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의 믿음은 이런 것이었다.
‘전차경기장 한가운데에 선 오벨리스크는 밧줄에 묶여 처형장으로 끌려온 성 베드로의 모습은 물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고통스럽게 죽어 간 그의 얼굴도 지켜보았다. 피가 거꾸로 쏟아지는 고통에 시달리던 성 베드로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오벨리스크였는지 모른다. 오벨리스크의 뾰족한 끝이 가리키던 곳이 천국이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가 숨진 곳 인근에 몰래 묻히는 모습은 물론 매일 밤 기독교인이 그곳에서 기도를 드리는 장면도 목격했을 것이다.’
원래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 광장 한복판에 서 있지 않았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의 남서쪽 지점에 있었는데, 16~17세기에 대성당을 새로 짓던 도중에 옮긴 것이었다. 성 베드로의 순교를 지켜본 성스러운 건축물을 대성당 바깥에 내버려두듯이 방치할 수 없다는 게 오벨리스크를 옮긴 교황청의 생각이었다.
콜로네이드를 지나 오벨리스크 앞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광장 바깥에 ‘우피치오 스카비’라는 곳이 나온다. 번역하면 ‘발굴 사무소’다. 이 사무소 바로 앞에 작은 광장이 있는데 광장 이름은 ‘초기 순교자 광장’이다. 이곳이 바로 네로 시대에 성 베드로는 물론 많은 기독교인이 순교한 곳이다. 성 베드로의 순교를 지켜본 오벨리스크가 원래 선 장소는 바로 여기였다. 다르게 표현하면 네로 시대에 전차경기장의 정중앙 지점이 바로 여기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힘든 게 있다. 4세기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처음 지을 때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16~17세기에 새로 건설할 때는 인근에 잔해로 전차경기장이 남아 있었다. 오벨리스크 외에 많이 부서지기는 했어도 다른 구조물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성 베드로의 순교를 지켜본 최후의 목격자가 더 있었다는 뜻이 된다. 2세기에 저술된 『베드로 행록』을 보면 ‘성 베드로는 두 메타 사이에서 순교했다’고 돼 있다. 메타는 전차경기장에서 마차가 달리는 트랙의 양쪽 끝에 세운 원뿔형 기둥이었다. 마차가 선회할 지점을 알려주는 게 메타의 역할이었다. 두 메타도 성 베드로 순교의 목격자였는데,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그것은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전차경기장이 완전하게 사라져 버린 것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새로 지은 후였다. 그때 모든 잔해까지 완전히 없애 버린 것이었다. 교황청은 그때까지 살아남았던 성 베드로의 목격자들을 왜 없애버린 것일까? 그러면서 오벨리스크는 왜 남겨두고 목격자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기독교를 세계 종교로 퍼뜨린 일등공신인 성 베드로가 순교한 장소를 부수지 않고 일부분이라도 보존했다면 더 훌륭한 순례 성지가 됐을 텐데 왜 굳이 없애 버린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오벨리스크 꼭대기에는 원래 금으로 도금한 공이 하나 달려 있었다. 공에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유해가 들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칼리굴라가 전차경기장에 오벨리스크를 세운 것은 카이사르의 무덤으로 쓰기 위해서였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오벨리스크는 중세 시대에는 ‘카이사르의 바늘’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3개월에 걸쳐 오벨리스크를 성 베드로 광장 한가운데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했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는 공사 도중 공을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자 다른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공에 예수의 유해가 들어 있었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