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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Sep 28. 2023

성 베드로 대성당(1)15조 원짜리 세계 최대 대성당



지방의 소도시에 살던 시골뜨기가 이탈리아 로마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8년 아직 무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8월 말이었다.


갑자기 바티칸, 교황,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내용을 담은 신문, 방송 기사가 따가운 늦여름 햇살처럼 연일 쏟아졌다. 어릴 때부터 신문 읽기를 좋아했고 특히 외신을 즐겨 읽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명칭이었다. 바티칸이 뭔지, 교황이 뭔지, 성 베드로 대성당이 뭔지 도무지 깜깜나라였다. 어린 아들에게는 ‘백과사전’ 격인 아버지에게 물어봤지만 교회나 성당은 물론 절에도 다녀본 적이 없는 아버지는 우물쭈물할 뿐 대답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고물상의 종이류 창고에서 혼자서 며칠간 신문을 열심히 찾아 읽고 TV 뉴스를 충실히 본 덕분에 겨우 상황을 짐작하게 됐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이탈리아 로마에는 바티칸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가 있다. 인구가 1000명도 채 안 되니 조금 허풍을 치자면 손톱만 한 나라다. 그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교황이다. 교황은 그 나라의 왕일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왕이다. 15년간 교황이던 사람이 죽어서 새 교황을 뽑았다. 교황을 새로 뽑는 곳은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새로 뽑힌 교황은 성 베드로 대성당 테라스에 모습을 드러내 신도들에게 인사한다.’


새 교황 선출이 끝나고 세상이 잠잠해졌는가 싶었는데 그로부터 겨우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신문, 방송이 다시 떠들썩해졌다. 여름 무더위가 완전히 가시고 가을 햇살이 온 몸을 따스하게 감싸주던 9월 말이었다. 추석이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터여서 집의 다락에 강정, 과일이나 각종 명절 음식이 아직 남아 있어 수시로 들락거릴 때였다. 신문, 방송은 ‘한 달 전에 새로 뽑은 교황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새 교황을 뽑는다’고 떠들어댔다. 어린 마음에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뒤에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한 상황을 알게 됐다. 15년간 자리를 지켰던 교황 바오로 6세가 1978년 8월 서거하자 콘클라베가 열려 이탈리아 베니스의 알비노 루치아노 총대주교가 새 교황으로 뽑혔다. 새 교황은 요한 바오로 1세라는 이름으로 서임한 지 불과 33일 만에 침대에서 책을 읽다 숨진 채 발견됐다. 이 때문에 암살당했다는 소문마저 나돌았다. 교황을 새로 뽑으려고 다시 콘클라베가 열렸고, 이번에는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쿠프의 카롤 보이티야 대주교가 새 교황으로 선출됐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성직자로서는 1522년 네덜란드 출신의 하드리아노 6세 이후 456년 만에 교황으로 선출됐다.


요한 바오로 1세가 선출됐을 때의 모습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새 이름을 얻은 보이티야 대주교가 짙은 자주색의 바티칸 국기가 내걸린 성 베드로 대성당 창가에 나타나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던 TV 방송 화면과 신문 사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겨우 열두 살에 불과했지만 태어나서 그렇게 인상적인 장면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신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조국인 폴란드가 공산주의 국가라는 사실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에서부터 반공 교육을 철저하게 실시하던 시절이었다. 선생님에게서 공산당은 종교를 금지시킨다고 배웠는데 공산국가인 폴란드에는 어떻게 해서 종교가 있는지 납득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공산주의는 무조건 나쁘다’고 배웠기 때문에 교황이 어떤 자리인지 모르는 어린 촌뜨기에게는 ‘공산주의 국가의 사람이 교황이 됐다’는 게 그다지 좋게 보이지 않았다.


성 베드로 대성당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된 것은 수년 뒤 고등학교 세계사 수업에서였다. 선생님은 “16세기에 종교개혁을 촉발시킨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특히 교황의 면죄부 발행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면죄부는 ‘세상에 살면서 지은 모든 죄를 없애서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는 입장권’이라는 게 선생님의 설명이었다. 살아 있을 때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한 사람이라도 돈으로 면죄부를 사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사회적으로 큰 선행을 한 사람에게만 제한적으로 주던 면죄부를 아무에게나 무제한 발행한 것은 엄청난 규모의 대성당 건설비를 충당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곳은 바로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것이었다. 대성당 공사비로 재산을 기부하면 그 금액에 따라 성격이 다른 면죄부를 교회가 보증해서 발급해 줬다고 했다. 선생님은 면죄부를 팔러 다닌 고위급 사제가 미사 도중 신도들에게 했다는 유명한 말도 들려주었다.


“동전이 성당 헌금함에 떨어져 땡그랑거리는 순간 불지옥에서 시달리던 영혼은 풀려납니다.”


선생님에게서 면죄부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그까짓 대성당 하나를 짓는 데 돈이 얼마나 들었기에 면죄부라는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다녔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수업을 들은 모든 급우가 다 그랬다. 선생님은 대성당 건설비가 얼마였는지는 알지 못해 설명해 주지 못했다.


나중에 여러 자료를 찾아 알아본 바로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데에는 금화 4680만 듀캇이 들어갔다. 이 돈의 현대적 가치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환산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듀캇 하나의 금 함유량이 약 3.5g이라는 사실만 놓고 계산해 보면 14조~15조 원 정도라고 한다. 여기에 당시 화폐의 구매력을 감안하면 실제 현대적 가치는 배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까짓 대성당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참고로 21세기 들어 세상에서 가장 건설비가 비싸게 든 건물은 ‘메카의 대(大)모스크’로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모스크인 마스지드 알 하람이다. 250만 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이곳은 2017~2021년 증축됐는데 공사비로 120억 달러, 현재 환율로 따지면 16조 원가량 들었다고 한다.


4680만 듀캇이 얼마나 엄청난 금액인지 당시 사람들의 임금과 비교해보자. 16세기 초 유럽의 직업별 연봉을 보면 비숙련 노동자 15~20듀캇, 교사나 하위급 사제 25~30듀캇, 숙련 노동자 50듀캇 정도였다. 귀족이나 최고위급 사제라면 1000~2000 듀캇을 벌었다. 이걸 보면 4680만 듀캇이라는 돈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알 수 있다. 비숙련 노동자 230만~300만 명, 귀족과 고위 사제 2만 3000~4만 6000명의 1년 수입이었다.


당시 유럽의 경제력을 감안했을 때 교황이 전 유럽에서 면죄부로 돈을 빼앗다시피 긁어모으지 않았다면 도저히 충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돈을 긁어모으는 과정이 얼마나 가혹했으면 평민은 물론 귀족까지 종교개혁에 가담할 정도가 됐을까?


이야기가 여기에까지 이르자 다시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면죄부 때문에 돈을 빼앗기느라 당시 사람들은 얼마나 살기 힘들었을까’라는 게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당을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기에 면죄부까지 발행하면서 엄청난 돈을 짜내야 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덧붙여 ‘이렇게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 대성당을 왜 지었을까’라는 궁금증도 생겼다. 선생님은 이런 궁금증도 해소해주지 못했다.


선생님이 모르면 시골 소도시의 고등학생이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비행기는커녕 부산에 가는 기차도 타 본 적이 없는 처지에 이탈리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있는 방법조차 없었다. 사진은 물론 대성당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 주는 자료 하나도 구할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 사람이 해외여행이라는 걸 꿈도 못 꾸던 시대였고, 참고할 책이나 자료라는 게 늘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종교에 관심이 있어 성당이나 교회에 다녔더라면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종교에 관심이 없었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 무신론자였다. 가끔 ‘죽은 뒤에는 어디로 갈까, 어떻게 될까’라며 사후 문제를 고민해 본 적은 있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기 위해 초등학생일 때 중학생 누나를 따라 교회에 딱 한 번 간 적이 있는 걸 빼면 성당이나 교회 근처에는 얼씬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성 베드로 대성당은 고사하고 성 베드로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제대로 된 성 베드로 대성당 사진을 처음 본 것은 1991년이었다. 신문사에 입사한 첫해 국제부에서 일할 때였다. 국제부에는 매일 수백 장의 외신 사진이 쏟아졌다. 그중에서 괜찮은 장면을 골라 부장에게 가져다주는 게 나의 기본적인 업무였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오후에 천천히 사진을 살펴보았다. 하늘에서 찍은 초대형 해시계 같은 사진이 눈앞에 나타났다. 처음에는 정말 해시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건축물이었다. 대성당과 광장, 열주, 그리고 오벨리스크를 한 장에 담은 사진이었다.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대성당 내부에 사람이 가득 모인 사진도 이어졌다. 사진을 연거푸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사진에 붙은 설명을 자세히 읽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성 베드로 광장’ 같은 표현이 나타났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이 면죄부를 발행해서 만든 바로 그 성당이구나!’


당시에 성 베드로 대성당 관련 사진이 왜 외신을 통해 들어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중요한 행사가 열렸겠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정말 감동적인 사진이었다는 점만 머리에 남았다. 사진을 보고 또 보다 보니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하지만 이제 입사한 지 겨우 서너 달밖에 되지 않은 처지에 당장 로마에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기회를,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탈리아 로마에 그리고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갈 기회는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06년 첫 유럽여행을 할 때 찾아왔다. 가족을 데리고 일본, 홍콩, 중국 여행을 다니다 해외여행에 아예 취미를 붙이는 바람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가자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처음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로 시작한 유럽여행은 2022년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고대하던 이탈리아 로마에는 다섯 번이나 다녀왔다. 주로 가족 여행이었지만 일 때문에 출장을 간 적도 있었다. 로마에 갈 때마다 돌아다니는 경로는 거의 비슷했다. 콜로세움~팔라티노 언덕~포로 로마노~카피톨리노 언덕~진실의 입~트레비 분수~스페인 광장~판테온~나보나 광장이 기본이었다.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다니면 일정을 하루나 이틀 만에 소화할 수 있었다. 로마 시내는 워낙 좁아 유적과 유적 사이 거리가 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기본적인 일정을 소화하면 반드시 하루를 따로 비워 성 베드로 대성당과 바티칸 박물관에 갔다. 워낙 넓고 볼 게 많아 하루 이상을 들이지 않고는 제대로 관람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초등학교 때 처음 이름을 듣고, 고등학교 때 처음 역사를 알고, 회사에 들어가 처음 사진을 보면서 상상해 왔던 모습 이상이었다. 갈 때마다 깊은 감동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성당 건물은 물론 내부의 화려한 장식 그리고 곳곳에 세워진 조각상과 그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종교적 믿음을 갖지 않은 무신론자이지만 이곳에는 ‘성스럽다’는 표현을 써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16세기 프랑스 여행 작가 미셀 드 몽냐뉴는 여행일기에 ‘성 베드로 대성당은 발에게는 너무 나쁜 곳이지만 머리에게는 정말 훌륭한 곳’이라고 감탄했다. 그의 말이 백 번 옳다고 생각했다.


여러 차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방문하고 각종 자료를 공부한 덕분에 나름대로 많은 걸 알게 됐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종교적으로 위대한 성소일 뿐만 아니라 건축학적으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르네상스가 기독교를 등에 업고 인류사에 남긴 지울 수 없는 엄청난 업적이었다.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마데르노 같은 거장들이 설계하고 조각하고 건설한 건축물이었다.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불굴의 기념물일 뿐만 아니라 신을 찬양하는 건축학적 찬송가였다. 게다가 그곳에 담긴 역사, 신화, 전설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대성당을 돌 때마다 곳곳에서 향기처럼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물론 중세의 면죄부 이야기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는 데 들어간 막대한 돈을 대느라 허리가 휘어졌던 당시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이 느껴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추악한 역사가 대성당과 바티칸 뒤에 숨은 사실도 알게 됐다. 하지만 대성당의 완벽한 아름다움과 성스러운 고결함은 교황청이 과거에 대성당 건축을 이유로 대성당 안팎에서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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