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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May 16. 2024

옥스퍼드 도망자와  케임브리지대학교


800여 년 전인 1209년의 일이었다. 영국 옥스퍼드에 폭스라는 젊은 대학생이 살았다. 바람기가 심했던 그는 한 상인의 어린 딸을 유혹해 잠을 같이 잤다. 한 번이 아니라 원할 때마다 여러 번에 걸쳐 그의 하숙방으로 불러 들였다.


“폭스 씨, 저랑 언제 결혼하실 건가요?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요.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아시면 저를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하루는 상인의 딸이 침실에서 곁에 누운 폭스에게 임신했다면서 결혼하자고 했다. 폭스는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가다가는 결혼을 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궁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일 저녁에는 이 방에서 말고 야외에서 만나도록 하지. 어딘지 잘 알지? 킹스 컬리지 정문 맞은편 숲 속에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조용한 벤치 말이야. 거기서 결혼에 대한 답을 주도록 할게.”

“네, 가끔 밖에서 만나 이색적인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결혼은 언제 어떻게 할 건지 잘 생각해보고 오세요.”


옥스퍼드대학교에 다녔던 폭스는 사실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상인의 딸을 호젓한 곳으로 오라고 한 것은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하려는 뜻이었다. 


다음날 저녁 상인의 딸은 예정한 시간보다 서둘러 약속장소에 갔다. 그날만 그런 게 아니라 이전에도 약속을 하면 늘 일찍 가곤 했다. 혹시 조금이라도 늦었다가 폭스가 화를 내서 헤어지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숲 입구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상인의 딸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폭스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한 명이 아니었다. 폭스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곧바로 나무 위로 올라갔다. 폭스가 친구 세 명을 데리고 벤치로 왔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삽을 들고 있었다. 


“아직, 그 멍청한 년은 오지 않은 모양이군!”

“그러니까, 폭스, 네 생각은 그 여자를 없애버리는 게 상책이다, 이 말이지?”

“그렇지. 감히 그 천한 것이 임신을 빌미로 나랑 결혼을 하려고 해. 임신을 안 한 것인지도 몰라. 원래 질이 낮은 것들은 임신하지 않았으면서도 남자를 협박하려고 거짓말을 하잖아. 너희들이 나를 도와서 그 상인의 딸을 여기 파묻어 버리면 돼. 그러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거야.”


나무 위에 숨은 상인의 딸은 숨을 죽여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너무 무서워 덜덜 떨리기도 했다. 혹시 조그마한 소리라도 내면 들킬까 싶어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아니!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안 오는 거야?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는데….”

“혹시 눈치를 챈 것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아마 아버지 때문에 집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양이야.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 다음에 만나면 다시 여기서 밀회를 갖자고 약속할 테니 그때 묻어버리면 돼.”


폭스는 투덜거리며 친구들을 데리고 킹스 컬리지 쪽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상인의 딸은 떨리는 몸을 겨우 추스르며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녀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폭스를 그렇게 사랑하고 믿었건만 어찌 이럴 수 있을까, 라며 속으로 한없이 그를 원망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폭스는 아버지에게 맞아죽고 자신은 집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 상인의 딸은 집 앞에 놓인 낡은 의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장사를 하러 가지 않는 날이라서 집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도 외출을 할 수가 없었다. 그때 폭스가 눈치를 보며 그녀의 집으로 왔다.


“이것 봐. 나야.”


폭스는 상인의 딸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그는 전날 저녁에 친구와 했던 대화를 그녀가 들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상인의 딸은 폭스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안녕하냐고요? 내가 지금 안녕한 것 같아요?”


폭스는 깜짝 놀랐다. 상인의 딸이 그신에게 이렇게 차가운 반응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젯밤 달빛 아래 숲속에 갔지요. 당신이 오기에 반가웠지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 나무 위로 올라갔지요. 거기서 숨을 죽여 기다렸답니다. 나는 한 사람이 오기를 기대했는데 세 사람이더군요. 나뭇가지는 흔들렸고 내 가슴은 심한 상처를 입었답니다. 당신들이 나눈 대화 때문이지요. 당신들이 들고 온 삽으로 판 구멍을 나는 봤답니다. 그 구멍은 무엇 때문에 팠나요? 누구를 묻으려고 판 것인가요?”


폭스는 그녀가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 깜짝 놀랐다. 매우 화가 났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온 마을에 소문이 나서 큰 망신을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당장 하숙집으로 돌아가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와서는 상인의 딸을 찔러버렸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서….


“으아악!!”


상인의 딸은 비명을 지르며 피를 엄청나게 많이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딸의 비명을 듣고 상인 부부가 밖으로 달려 나왔다. 집 앞에 딸이 피투성이인 채 쓰러져 있고, 낯선 학생이 식칼을 들고는 씩씩거리고 있었다. 상인은 문 근처에 세워둔 커다란 몽둥이를 들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따지는 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저 살인자를 두들겨 패 죽여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깜짝 놀란 폭스는 식칼을 버리지도 못한 채 달아났다. 상인은 달아나는 그를 추격했지만 젊은이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상인의 부인은 통곡하면서 딸을 안았다. 


“오! 내 딸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너를 찌르고 달아난 놈은 어떤 녀석이냐? 내게 말해준다면 아버지에게 이야기해서 복수를 하도록 하마!”


상인의 딸은 죽어가면서 마지막 힘을 내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사랑하는 어머니, 저를 찌른 사람은 옥스퍼드대학생인 폭스예요. 저를 오랫동안 농락하더니 결혼하자고 하자 저를 죽이려 하는 거랍니다. 제가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못하고억울한 귀신이 되어 떠돌지 않도록 제발 원한을 풀어주세요.”


상인의 딸은 이 말을 어머니에게 남기고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의 주검을 부둥켜안고 옥스퍼드가 넘쳐날 만큼 눈물을 쏟았다. 잠시 후 살인자를 뒤쫓아 갔던 상인이 돌아왔다. 그는 부인에게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세히 듣고는 바로 옥스퍼드 시내 한가운데로 달려갔다. 


“마을 사람들, 모두 나와 보시오! 내 딸이 죽었소. 착하고 어여쁜 내 딸이 죽었다오. 옥스퍼드대학생 폭스란 놈이 내 딸을 농락하다 결혼하자고 한다면서 식칼로 찔러 죽여 버렸다오. 제발 내 딸의 복수를 해 주시오. 그동안 대학생이랍시고 우리를 무시해온 옥스퍼드의 젊은 것들을 모두 싹 쓸어버리도록 나를 도와주시오.”


상인의 이야기를 들은 동네 주민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모두 집에 돌아가 손에 몽둥이와 곡괭이와 삽을 들고 나왔다. 


사실 옥스퍼드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학생들에게 반감이 심했다. 옥스퍼드대학교 학생들은 지식인이라면서 무식한 마을 주민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들은 영어 대신 라틴어를 사용하면서 마을 주민들을 놀리기도 했다. 게다가 학생들은 치외법권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잘못을 저질러도 일반적인 관습과 국가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지 않았다. 대학교 행정당국에 의해서만 처벌을 받을 수 있었다.


상인에게서 상세한 이야기를 들은 옥스퍼드 시장은 주민들과 함께 범인인 폭스가 세를 얻어 살던 집으로 갔다. 하지만 그는 어디로 달아났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와 함께 상인의 딸을 죽이려 했던 친구 세 명이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시장은 세 명을 옥스퍼드 한가운데로 끌고 가 즉석재판에 회부했다. 그들에게서 폭스가 왜 상인의 딸을 죽이려 했는지 듣게 된 시장은 친구 세 명도 살인자나 다를 바 없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주민들은 선고가 내려지자마자 바로 교수대를 설치했다. 그들은 죽기 싫다며 발버둥치는 세 학생을 교수대에 억지로 끌어올려 끈으로 목을 매 죽이고 말았다.


옥스퍼드 주민들은 학생 세 명만 죽인 데에서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은 그들은 일제히 옥스퍼드대학교로 몰려갔다. 주민들이 흉기를 들고 몰려온다는 소식은 대학생들에게도 알려졌다. 그들도 몽둥이를 들고 학교 앞으로 나갔다. 이렇게 해서 옥스퍼드대학교 인근 브루어 거리에서 패싸움이 벌어졌다.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고, 브루어 거리는 붉은 피로 물들었다. 


옥스퍼드 주민들은 이날 패싸움 이후에도 시내에서 혼자 돌아다니는 학생은 물론 대학교 교수를 보면 골목으로 끌고 가 두들겨 팼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 보니 학생, 교수들은 도무지 무서워 학교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됐다. 


학생, 교수들은 고민 끝에 다른 도시로 달아나기로 결정했다. 그곳에 새로운 대학교를 만들어 공부를 시작하기로 한 것이었다. 


학생, 교수들이 피신한 곳은 당시 상업도시로 번성하던 케임브리지였다. 기록에 따르면 옥스퍼드에서 달아난 학생, 교수는 모두 3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대다수 역사학자는 너무 과장된 수치라고 본다. 어쨌든 학생, 교수 한두 명이 달아난 것은 아니고 옥스퍼드대학교 존립에 큰 악영향을 미칠 정도로 많은 수였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학생, 교수들은 처음에는 잠을 잘 방도 구하지 못해 교회 관사 등에서 지내야 했고, 수업할 건물이 없어 케임브리지 주민 집에서 방 한 칸을 빌려 강의를 진행하곤 했다. 학생, 교수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땅을 하나둘 사들여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도시 전체가 마치 대학교처럼 변해버릴 정도가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학교는 영국 최고 대학교로 손꼽히는 케임브리지대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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