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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17. 2024

체스키 크룸로프의 에곤 실레

“저 청년이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그렇대요. 마리아의 아들이고, 알로이시아 할머니의 외손자라네요.”

“엄마를 닮아서 그런지 또랑또랑하게 잘 생겼어.”


1910년 화창한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체코 남부의 아름다운 도시 체스키 크룸로프의 블타바 강변의 슈이로카 거리에 있는 낡은 집에서 두 젊은이가 이삿짐을 날랐다. 골목길 주민들은 낯선 두 청년을 보면서 서로 수군거렸다.


두 청년 중 한 명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스무 살의 화가 에곤 실레였다. 그는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170km 남쪽에 있는 오스트리아 툴린에서 철도역장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가틴 마리 실레는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태어나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다. 


실레는 말로만 듣언 처음 어머니의 고향에 태어나서  처음 간 것이었다. 그와 함께 체스키 크룸로프에 간 청년은 친구인 에르윈 오센이었다.


실레는 열네 살 때 아버지를 잃은 뒤 아버지처럼 철도 직원이었던 외삼촌 레오폴트 치하첵의 집에서 자랐다. 외삼촌은 조카를 철도 직원으로 키우려고 했지만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반면 미술에 소질이 많은 것을 알고 미술을 배우게 했다.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난 실레는 미술 공부를 시작하고 1년도 되지 않아 미술교사에게서 소질을 인정받았다. 교사는 치하첵에게 실레를 빈에 보내라고 권유했다. 실레는 교사의 도움을 받아 1906년 빈의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실레는 당시 유명 화가였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눈길을 끌었다. 클림트는 그의 그림에 큰 매력을 느껴 작품을 사 주거나 자신의 작품과 맞바꾸기도 했다. 실레에게 모델을 알선해 주거나 재력이 풍부한 귀족을 후원자로 소개해 주기도 했다. 


실레는 공포와 불안에 떠는 인간의 육체를 묘사하고, 성적인 욕망을 주제로 다뤄 빈에서 커다란 논란을 일으켰다. 그 덕분에 탁월한 표현주의 화가인 클림트와 함께 20세기 초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을 받았다.


실레는 빈을 좋아하지 않았다. 문화계 분위기가 너무 억압적인 데다 어린 나이에 큰 인기를 얻은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레가 오센과 함께 외가가 있는 체스키 크룸로프에 가서 방을 빌려 화실을 차린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나중에 처남이 되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 체스키 크룸로프로 간 것은 ‘빈에서의 탈출’이라고 묘사했다.


‘나는 조만간 빈을 떠날 거야. 이곳은 얼마나 역겨운지! 모든 사람은 나를 질시하고 사악해. 옛 동료들은 나를 시기하는 눈으로 바라봐. 빈에는 어디에나 그림자뿐이야. 도시는 암흑천지이고 나는 늘 혼자지. 나는 새로운 걸 보고, 새로운 걸 모험해 보고 싶어. 짙은 물을 마시고 깨어진 나무를 보고 거친 바람을 맞아보고 싶어. 무너진 정원 담장을 경이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 싶어. 어린 자작나무와 바람에 떨리는 잎의 소리를 듣고 싶어. 태양의 빛을 바라보고 푸른 색으로 젖은 계곡을 즐기고 싶어. 꽃과 이야기를 하고, 핑크색 사람들과 아주 낡아 고색창연한 교회를 바라보고, 작은 돔은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싶어. 풀이 잔뜩 자란 언덕에서 멈추지 않고 달리고, 흙에 입을 맞추고, 이끼의 냄새를 맡고 싶어.’


실레는 체스키 크룸로프를 매우 좋아했다. 빈에 비할 수 없는 시골이어서 자연은 물론 사람들도 순수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는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행위예술에 몰두하다 수개월 뒤 빈으로 돌아갔다. 


실레는 이듬해 다시 체스키 크룸로프에 갔다. 이번에는 모델이자 연인인 발부르가 노이질로바를 데리고 갔다. 그는 이때는 그곳에서 1년 정도 머물렀다. 


그러나 처음 갔을 때와는 달리 실레의 두 번째 체스키 크룸로프 정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곳에는 어머니의 친척이 많이 살았지만 1년여 만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쫓겨나고 만 것이었다. 


실레는 발부르가와 방탕한 생활을 했던 데다 마을의 10대 소녀들을 데려가 누드모델로 활용했다. 마을 주민들은 실레를 그대로 뒀다가는 마을을 망칠지도 모른다며 그의 집에 몰려가 내쫓아 버렸다. 인구가 많고 문화 수준이 높은 빈에서도 실레의 작품에 대한 반발이 심했는데 시골이나 마찬가지인 체스키 크룸로프 주민들의 눈에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포르노나 마찬가지였다.


빈에 돌아간 실레는 포르노를 그렸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돼 구치소 생활을 했다. 그는 다시는 체스키 크룸로프에 돌아가지 못했다. 1918년 전 유럽을 강타한 스페인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실레가 체스키 크룸로프에 머물 때만 해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몰랐던 체스키 크룸로프 주민들은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에야 그가 위대한 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체스키 크룸로프에 오래 살았다면 그곳을 소재로 하는 많은 그림을 그렸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는 걸 후회하게 됐다.


실레를 쫓아낸 것을 늘 후회하던 체스키 크룸로프는 80여 년이 흐른 1993년 그를 기념하는 시설을 하나 만들었다. 바로 ‘에곤실레미술관’이었다. 2023년은 미술관 개관 30주년이 되는 해여서 체스키 크룸로프에서는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900여 평 규모의 에곤 실레 미술관에는 실레의 인생과 작품 활동을 다룬 각종 자료가 전시됐다. 그가 체스키 크룸로프에서 그린 드로잉, 그가 사용했던 가구, 개인적 편지, 명함, 사진 그리고 실레 외가의 가계도 등이다. 그가 다른 곳에서 그린 작품도 다수 전시됐다. 미술관에는 실레의 그림 복사본을 파는 기념품가게와 체코 전통 과자 등을 파는 카페도 있다. 일부 공간은 유럽 다른 나라에서 온 젊은 화가들이 장기간 거주하면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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