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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22. 2024

갈등의 산물 호프부르크 왕궁


13세기 중엽 오스트리아 공국의 지배자는 ‘싸움꾼’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바벤베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2세 공작이었다. 그는 권력을 잡자마자 주변 나라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었다. 


프리드리히 공작은 심지어 동명이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도 사이가 나빴다. 헝가리, 보헤미아와 전쟁하지 말라는 황제의 지시를 어겼을 뿐 아니라 황제의 아들 하인리히가 일으킨 반란에도 동조했기 때문이었다. 하인리히는 프리드리히 공작 큰누나의 남편, 즉 매형이었다. 


프리드리히 공작은 헝가리의 국왕 벨라 4세, 보헤미아의 국왕 바츨라프 1세와 늘 영토 분쟁을 빚었다. 그가 반란에 가담한 것은 두 나라와의 전쟁에서 매형이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매형을 황제 자리에 올려놓으면 내 편을 들어줄 거야. 그러면 헝가리, 보헤미아를 눌러 영토를 확장하는 게 쉬워지겠지.’


가뜩이나 아들의 반란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던 황제는 프리드리히 공작마저 반란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를 터뜨렸다. 그는 아들 문제를 서둘러 해결하기로 했다.


“모든 제후는 아퀼레이아에 모이도록 하라. 제국 총회인 라이히슈탁을 열어 하인리히 문제를 정리하겠다.”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에 포함된 모든 후국, 공국에 공문을 보냈다. 프리드리히 공작의 오스트리아 공국에도 서신을 보내 회의를 통고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공작은 일부러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회의에 참석하면 지금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꼴이 돼. 그럴 순 없지. 조금만 참으면 매형이 황제로 등극할 거야.’


프리드리히 공작에 대한 황제의 분노는 폭발 직전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반란을 철회한 뒤 무릎을 꿇고 비는 바람에 그는 조금 더 참기로 했다. 황제의 인내심이 바닥난 것은 2년 뒤였다. 그는 마인츠에서 다시 라이히슈탁을 열어 신성로마제국의 여러 문제점과 아들의 지위 문제를 최종적으로 정리할 생각이었다. 


프리드리히 공작은 이때도 참석하지도 않았고 불참 이유를 해명하지도 않았다. 황제의 분노는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프리드리히 공작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모든 제후는 병력을 소집하라. 내가 총사령관을 맡아 빈으로 쳐들어갈 것이다.”


황제는 프리드리히 공작을 혼내겠다며 직접 군대를 이끌고 빈으로 출정했다. 공작은 황제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달아나고 말았다. 남을 괴롭히거나 호기를 부리는 일에는 능했지만 군사력은 강력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껏해야 주변 나라들과 호각지세로 싸울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황제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빈에 무혈 입성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빈에 머물렀는데, 뜻밖에 빈이 살기 좋은 곳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예 빈을 빼앗아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으려고 했다. 


‘옛날 하인리히 2세 공작이 왜 이곳을 수도로 삼았는지 이제야 알겠군. 뮌헨보다 날씨도 좋아 따뜻하고, 강이 흐르고 넓은 평원이 있어 안전에도 도움이 되는 곳이야. 게다가 12세기에 레오폴트 5세가 만든 성벽도 있고…. 제대로 된 궁전만 만들면 훌륭한 도시가 될 게 분명해.’


황제는 주거용 궁전과 감시탑 4개를 가진 궁성(宮城)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성이 완성되면 뮌헨을 떠나 이곳에 눌러앉을 생각이었다. 황제가 성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 공작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그는 황제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아쉽지만 다른 후국, 공국이 보내는 의심의 눈초리 때문에 빈을 프리드리히 공작에게 돌려줘야 했다. 그가 떠나고 난 뒤 성 건설 공사는 중단됐다. 경제력이 부족했던 공작에게는 황제가 시작한 공사를 마무리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가 1246년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 바람에 공사 중단은 장기화됐다. 


성 건설을 재개하고 마무리한 사람은 헝가리를 꺾고 오스트리아를 정복한 프셰미슬 왕조 출신의 보헤미아 국왕 오토카르 2세였다. 그가 궁성을 완성했다는 이야기는 13세기 합스부르크의 초대 국왕이었던 루돌프 1세 시기의 연대기 <콘티뉴아티오 빈도보넨시스>와 <코르니콘 콜마리엔세>에 나온다. 


새로 쌓은 궁성은 오토카르 2세에게 군사적으로 매우 큰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빈에 보낸 보헤미아 대표단이 이곳에서 살게 했는데, 외부에서 쳐들어오는 적에 대한 방어 능력을 키워주었을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주민 반란까지 막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새 궁성은 호프부르크라는 이름을 얻었다. ‘호프’는 왕이 사는 ‘왕궁’을, ‘부르크’는 ‘성’을 뜻하는 단어였다. 따라서 호프부르크는 이름 그대로 궁성이라는 뜻이었다.


호프부르크를 왕궁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들은 스위스 출신의 합스부르크 가문이었다. 그들은 오토카르 2세를 빈에서 몰아내고, 대가 끊긴 바벤베르크 가문을 대신해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게 되자 궁정을 암호프에서 호프부르크로 옮긴 것이었다. 


16세기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제국의 수도를 빈으로 옮기면서 황제 거처를 호프부르크 왕궁으로 정했다. 이후 1918년 오스트리아 왕정이 붕괴할 때까지 호프부르크 왕궁은 신성로마제국 및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거지 역할을 했다. 왕실 가족은 겨울에는 따뜻한 호프부르크 왕궁에서, 여름에는 시원한 쇤브룬 궁전에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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