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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21. 2024

무너진 빈 성벽과 링슈트라세


1857년 12월 초 추운 겨울이었다. 오스트리아 정부의 최고 요인 두 사람이 빈의 호프부르크 왕궁 접견실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기다렸다. 총리대신 카를 페르디난트 폰 부올 공작과 내무부장관 알렉산더 폰 바흐 남작이었다. 그들이 쌀쌀한 날씨에도 왕궁에 달려간 것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모시고 중요한 대화를 나누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직 스물일곱 살로 국정 운영 경험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늘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대신들의 이야기에 귀를 많이 기울여 호평을 받는 지도자였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울 모양입니다. 나라 사정이 어렵고 국제 정세가 혼탁한 만큼 추위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어좌에 착석하면서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젊은 황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황제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빈 성벽에 대해 여러 말이 나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허물자는 사람도 있고, 그냥 놔둬야 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지금까지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쳤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결론을 내야 할 때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분의 견해를 한 번 더 들어보고 싶어 모셨습니다.”


빈 성벽은 12세기 오스트리아 공작이었던 레오폴트 5세가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의 몸값으로 건설한 방어 시설이었다. 빈의 취약한 방어력을 단번에 해결해 유럽 최고 도시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준 시설이었다. 실제로 지은 지 600년이 지나는 동안 오스만투르의 포위 등 여러 차례 위기에서 빈을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황제의 입에서 빈에게는 최후의 방어선인 성벽을 허물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었다.


사실 빈 성벽을 허물어 도시를 팽창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이미 20여 년 전부터 여러 건축가 사이에 퍼져 있었다. 루드비히 푀스터, 카를 로스너, 파울 스르렝거, 안톤 오르트너 같은 건축가가 그런 계획안을 내놓은 사람들이었다. 많은 귀족, 대신은 물론 대다수 빈 시민은 이들의 주장에 동감했다. 


그런데도 성벽 붕괴 계획에 진전이 이뤄지지 못한 것은 군부의 반대 때문이었다. 일부 대신의 지지를 등에 업은 빈 군부는 성벽을 무너뜨리면 빈은 하루아침에 외적의 제물이 될 것이라며 결사반대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이날 회의에 폰 부올 공작과 폰 바흐 남작 두 사람만 부른 것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둘 외에 다른 대신들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폰 부올 공작과 폰 바흐 남작은 서로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표정으로 보아 누가 어떤 내용을 말할지 미리 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먼저 폰 부올 공작이 말을 꺼냈다.


“폐하, 시대가 변했습니다. 200년 전 오스만투르크가 포위했을 때와는 사정이 완전히 다릅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성벽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9년 전 일부 백성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벽은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나라와 황실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성벽이 아니라 강한 군사력과 그 군사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경제력입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폰 부올 공작의 말에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에는 폰 바흐 남작이 입을 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성벽 해체를 주장해 온 사람이었다. 시민 여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던 그는 부르주아와 귀족이 운영하는 여러 신문사에 ‘빈 성벽을 무너뜨려야 빈이 발전한다’는 기사를 싣도록 사주까지 했다.


“빈 성벽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합니다. 빈 인구는 최근 50년 사이에 50만 명으로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저택을 더 짓고 도로를 더 내고 공공건물을 더 건설해야 하는데 성벽 때문에 빈이 안팎으로 갈라지는 바람에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성벽을 허물면 빈의 발전을 수십 년 앞당길 뿐만 아니라 경제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도 폰 부올 공작과 폰 바흐 남작의 말에 충분히 공감했다. 과거에는 빈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성벽은 이제는 빈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이었다. 성벽 바깥에는 이미 수많은 건물이 지어져 많은 사람이 사는데 성벽 때문에 오가는 것조차 불편해 군사적, 경제적으로 큰 손해였다. 


“두 분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그 뜻을 충분히 모아 올해 안으로 최종 결론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단 최종적으로 발표가 나기 전까지는 모든 걸 비밀에 부치는 게 좋겠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회의를 마친 뒤 어머니인 소피 태후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황제였지만 사실상 ‘마마보이’여서 국정을 늘 어머니와 논의하곤 했다.  


“빈의 대다수 귀족은 물론이거니와 내각 대신들도 이구동성으로 빈 성벽을 허물자고 합니다. 이미 무용지물이 된 만큼 성벽에 매달릴 필요는 없을 거라는 게 그들의 생각입니다.”


소피 태후는 1848년 오스트리아 혁명 때 페르디난트 5세가 물러나자 아들 프란츠 요제프를 후임 황제로 등극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생각이 깊은 데다 통이 커서 남성인 귀족, 대신 중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무시하지 못했다.


“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제대로 봐야한다고 하더군요. 나도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군부입니다. 성벽을 무너뜨리면 빈이 당장 점령당한다고 난리를 피웁니다. 그들은 너무 고집이 세서 도무지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소피 태후는 아들인 황제의 손을 꼭 잡았다. 아주 단호한 표정이었다.


“폐하! 군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폐하의 결정입니다. 폐하가 하겠다고 결정하시면 감히 아무도 반대하지 못할 겁니다. 성벽을 무너뜨리는 게 옳다고 생각하시면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발표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황제입니다.”


온건한 성격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무슨 일이든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이 말을 들으면 이것이 옳은 것 같았고, 저 말을 들으면 그것이 옳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황제에게 어머니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머리에 2년 전 일이 떠올랐다. 당시 황제는 헝가리인의 암살 기도를 가까스로 피한 적이 있었다. 동생 막시밀리안 1세가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드리겠다면서 성벽 바깥 제방에 교회를 짓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성벽 바깥 제방에 건물을 짓지 못한다는 군부의 지침이 있었다. 황제의 동생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군부의 지침을 어길 수는 없었다. 문제를 해결한 것은 황제였다. 그는 동생의 부탁을 승인하고 군부에 반대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황제의 명령이 내려지자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군부도 고개를 떨궈야 했다.


‘이미 2년 전에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정을 밀어붙인 적이 있었지. 어머니 말씀이 옳아. 국정에서 모든 결정은 황제가 내리는 거야. 대신이든 군부든 반대할 수는 있지만 황제가 최종적으로 결정하면 따라야 하는 거야. 성벽은 허물어야 해. 그냥 밀어붙일 거야.’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며칠 뒤 폰 바흐 남작을 몰래 불러 성명서 초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남작은 충복인 프란츠 폰 마칭거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초안을 작성해 황제에게 올렸다. 황제는 그 초안을 바탕으로 편지 형식의 성명서를 작성해 다시 폰 바흐 남작에게 보내 모든 국민과 언론에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황제의 칙령은 닷새 뒤 정부 기관지인 비엔나 자이퉁 신문에 게재됐다. 주요 내용은 이러했다.


‘이른 시일에 비엔나 시내를 팽창시켜 외곽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게 나의 뜻이오. 이를 위해 빈 성벽을 허물고 해자를 메우는 것을 허가하는 바이오. 이렇게 해서 얻은 땅은 건축용 부지로 활용하도록 하시오. 건축 펀드를 조성해서 얻은 수익금으로 공공건물은 물론 군사시설을 짓도록 하시오. 첨단 시설을 갖춘 군부대와 숙소를 제대로 건설하는 걸 빼놓지 마시오.’


빈 성벽 및 해자 철거 사업은 1858년 3월 1일 도나우운하의 로텐툼토르에서 시작됐고 16년 뒤인 1874년에 완벽하게 마무리됐다. 완만한 경사지도 없애려 했지만 빈 시청에서 반대해 공원으로 전환시키기로 하는 선에서 정리됐다.


무너진 성벽 자리에는 도로가 개설됐다. 빈 구시가지를 둥글게 한 바퀴 도는 형태의 도로였다. 총 9개 구간으로 이뤄진 도로의 총길이는 5.2km였다. 9개 구간은 스투벤링, 파크링, 슈베르트링, 케른트너링, 오페른링, 버그링, 카를레너링, 유니버시타츠링, 쇼턴링이었다. 새로 만든 도로는 ‘링슈트라세’라고 부르기로 했다. 링은 ‘원형’을, 슈트라세는 거리를 뜻했다. 따라서 링슈트라세는 ‘원형 거리’라는 의미였다.


도로 개장식은 1865년 5월 1일 거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황후 엘리자베트는 물론 오스트리아의 많은 귀족이 참석했다. 개장식을 맞아 링슈트라세 주변에 들어선 공공 및 민간 건물은 나뭇가지와 각종 문양, 국기, 화관으로 장식됐다. 링슈트라세 서쪽 부분에는 가스를 사용하는 가로등이 설치돼 이날 저녁부터 운영됐다. 개장식에서는 군부의 충성을 과시하려는 듯 루드비히 카를 빌헬름 장군의 지휘를 받은 오스트리아 병사들이 퍼레이드를 벌여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정부는 성벽과 해자를 없애 만든 땅을 민간에 매각한 대금으로 기금을 조성해 공공 건축물을 짓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만든 공공 건축물은 오페라하우스, 부르크극장, 아스펀다리, 국회의사당 등이었다. 빈 시청의 요구에 따라 성벽 바깥쪽의 경사지에는 슈타트파크, 부르크가르텐, 볼크스가르텐, 라트하우스파크, 지그문트프로이트파크 같은 공원을 만들었다.


공공건물과 함께 개인 저택도 연이어 들어섰다. 저택은 대부분 귀족이나 은행가, 신흥기업인에 의해 건설됐다. 당시에는 이들을 ‘링슈트라세의 부자’라는 뜻인 링슈트라세바로넨이라고 불렀다. 대부분 궁전은 네오바로크, 네오르네상스, 네오매너리즘 혼합 양식이었다. 빌헬름 궁전, 루드비히 빅토르 궁전처럼 왕족이 만든 궁전도 있었지만 민간인이 만든 궁전도 있었다. 민간인 저택은 엄밀히 말하면 ‘궁전’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그렇게 불리지 않았지만, 1990년 무렵부터 상업적 이유 때문에 ‘궁전’이라고 불리게 됐다. 궁전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임차인을 모으기 쉬운 데다 관광객의 시선을 끌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세기에 링슈트라세 일대에 건설된 궁전은 빈 구시가지에 있던 옛 궁전보다 더 크고 더 높았다. 당시로서는 현대적인 설비인 엘리베이터, 냉난방 수도시설, 전기, 중앙난발시설 같은 것을 갖추기도 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 때 구시가지의 궁전은 연합군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링슈트라세의 여러 궁전은 시내에서 떨어져 있어 상대적으로 덜 입었다. 그 덕분에 오늘날에는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고급 임대 저택으로 사용되거나 기업의 빈 본부로 이용되기도 한다. 일부 건물은 호텔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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