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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20. 2024

사자왕 리처드 몸값으로 쌓은 빈 성벽

바벤베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2세가 115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수도를 옮길 때만 해도 빈은 군사적으로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방어 시설이라고는 고대 로마 시대에 빈도보나 주변에 건설한 해자와 나무 성벽이 고작이었다. 방어력이 약해 적이 대대적으로 공격해 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우려가 컸다.


하인리히 2세부터 시작해 오스트리아 공국의 역대 공작은 늘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성을 쌓으면 걱정을 해소할 수 있었지만 적지 않게 들어갈 비용이 문제였다. 아직 세력이 약했던 오스트리아 공국 처지에서는 빈에 성벽을 쌓을 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해결의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바로 하인리히 2세의 아들 레오폴트 5세 시대에 벌어진 제3차 십자군 원정의 총사령관이었던 영국의 국왕 사자왕 리처드가 바로 단서였다.


1192년 12월 24일 성탄절 이브였다. 오스트리아 공국의 궁전인 빈의 암 호프에는 아주 즐겁고 신나는 분위기가 흘렀다. 레오폴트 5세 공작은 이곳저곳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저녁 미사에 늦지 않으려고 준비를 서두르는 중이었다. 그만 그런 게 아니었다. 헝가리에서 시집을 온 왕비 일로나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레오폴트 5세는 앞서 2년간 십자군 원정에 동참하느라 아내와 가족, 그리고 백성이 있는 빈에서 성탄절을 보내지 못했다. 그로서는 3년 만에 집에서 성탄절을 즐기는 셈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싱글벙글하며 일로나를 기다릴 때였다. 바쁜 발걸음 소리가 궁전 안으로 들어오는 게 들렸다. 시급하고 중요한 일을 가지고 오는 게 분명했다.


“전하,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레오폴트 5세의 등 뒤에서 숨을 헐떡이는 사내는 그가 가장 아끼는 장수 프리드리히였다.


“어떤 자들이기에 오늘처럼 즐거운 날 그렇게 급하게 달려왔는가?”

“영국 국왕 리처드로 보이는 사람이 빈 근처에서 목격됐습니다.”


레오폴트 5세는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물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사자왕 리처드가 빈에 나타났단 말인가?”

“조금 전에 사슴을 잡으러 갔던 사냥꾼이 에르트베르그의 숲에서 낯선 사내 다섯을 봤다고 합니다.”


레오폴트 5세는 리처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리처드에게 원한을 품었다. 십자군 원정에 동행했던 사촌인 몬테페라트의 콘라드가 리처드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에게 암살당한 일 때문이었다.


“사내들은 숲속에 숨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안 깎았던 것인지 머리와 수염은 덥수룩해 야만인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옷에는 템플러 기사단을 상징하는 빨간색 십자가가 그려져 있었답니다.”

“리처드는 내가 복수를 꿈꾸는 걸 잘 알고 있어. 그런데 왜 빈 근처를 지나가는 것이지? 사냥꾼이 잘못 본 게 아닌가?”


프리드리히는 고개를 저었다.


“리처드 국왕은 십자군 원정을 마친 다음 배를 타고 귀국하다 폭풍에 휘말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육로로 말을 타고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자는 매형 하인리히 공작이 다스리는 바이에른 공국으로 가려는 모양입니다. 그러려면 빈 근처를 지나가는 게 가장 가깝지 않겠습니까?”


레오폴트 5세는 프리드리히의 말이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그자가 리처드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확인해 보면 되겠군. 먼저 병사들을 보내 그자를 붙잡아 오게. 절대 죽여서는 안 돼. 그자는 꼭 내 손으로 죽여야 하니까.”


프리드리히는 지체하지 않고 궁전에서 뛰어 나갔다. 그는 궁수와 기사, 그리고 보병까지 100여 명을 데리고 에르트베르그로 말을 몰았다. 그곳은 암 호프에서 동남쪽으로 5km 떨어진 지역이었다.


프리드리히는 리처드 일행이 움직일 방향을 생각해 보았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빈 한가운데를 지나가야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갈 곳은 서쪽뿐이었다. 그는 에르트베르그 숲 입구 근처에 병사들을 매복시켰다.


병사들이 숨은 지 1시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숲 안쪽에서 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말이 아주 많은 것 같지는 않았다. 고작 네댓 마리 정도에 불과했다. 잠시 후 낯선 사내 다섯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꾼의 말처럼 템플러 기사단 복장을 하고 있었다. 옷은 때에 절어 더러워 보였고 10m 밖에서도 코를 찡그려야 할 정도로 지독한 악취를 풍겼다.


“포위하라!”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궁수들이 앞으로 나서 낯선 사내들에게 활을 겨눴다. 기사들과 다른 병사들은 칼과 창을 뽑아들고 그들을 에워쌌다.


“누구냐? 왜 우리 길을 막는 거지?”


두 번째 말에 탄 사내가 고함을 질렀다. 얼굴은 피로에 찌들었고 병에 걸린 듯 몹시 창백해 보였다.


레오폴트 5세를 모시고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던 프리드리히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리처드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리처드 전하, 칼을 버리십시오. 전하를 해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절대 피를 봐서는 안 된다는 레오폴트 대공 전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생포하라는 게 전하의 뜻입니다.”


리처드는 달아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고 무기를 버렸다. 그는 밧줄에 꽁꽁 묶여 빈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레오폴트 5세는 프리드리히가 붙잡아 온 리처드를 보자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눈에서 불똥이 튀어나올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이자를 당장 처형장으로 끌고 가도록 해라. 목은 내가 직접 치겠다.”


병사들은 리처드를 궁전 밖의 너른 광장으로 데려갔다. 레오폴트 5세는 그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그의 팔을 잡아당기는 사람이 있었다. 리처드를 붙잡아 온 프리드리히였다.


“전하, 리처드 국왕을 처형해 봐야 얻는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가슴은 후련해지겠지만 남는 게 없지 않습니까? 사촌을 잃은 슬픔은 그만 달래시고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레오폴트 5세는 두 팔을 부들부들 떨었다.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억지로 참으려는 모양이었다. 기분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 리처드의 목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프리드히리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이 옳은 것 같았다.


“그냥 풀어줄 수는 없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영국에 몸값을 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몸값을?”

“영국의 국왕인 데다 십자군 전쟁의 총사령관이었으니 몸값을 비싸게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얼마나?”

“최소한 10만 마르크는 돼야….”

“10만 마르크라고?”


당시에 10만 마르크라면 오스트리아 공국의 궁정이 사용하는 1년 예산의 서너 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레오폴트 5세는 프리드리히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주변의 침략에 시달리는 영국은 리처드의 조속한 귀국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대신할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몸값을 높게 부르더라도 영국이 거부할 이유는 없을 것 같았다.


“리처드를 뒤른슈타인성에 가둬 두도록 하게. 신성로마제국 하인리히 황제에게 몸값을 제대로 받게 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네.”


레오폴트 5세는 1193년 3월 리처드를 하인리히 황제에게 보냈다. 황제는 영국으로부터 몸값 15만 은화 마르크를 받고 리처드를 1194년 2월 풀어 주었다. 은 무게로 따지면 35t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레오폴트 5세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재임 기간 내내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원정에 나설 때마다 그의 고민은 빈의 취약한 방어력이었다. 그가 자리를 비웠을 때 적이 쳐들어오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는 영국에서 몸값을 받자마자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했다.


“적의 침략에서 빈을 영원히 지켜줄 성벽을 쌓을 것이오. 빈을 둘러싼 해자를 메우고 그 자리에 돌을 쌓아 성벽을 만들 것이오. 어느 누구도 함부로 빈에 쳐들어올 생각을 못하게 만들 것이오.”


레오폴트 5세가 공사에 사용한 석재는 빈도보나 주변에 굴러다니던 돌이었다. 오래 전에 무너진 고대 로마군 기지의 성벽에서 떨어진 돌이었다. 돌이 얼마나 많았던지 성벽은 물론 성 슈테판 대성당 증축, 보강 공사에 사용해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였다.


레오폴트 5세의 호언장담처럼 성벽은 빈을 지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성벽이 없었다면 16세기는 물론 19세기 오스만투르크 수십만 대군의 두 차례 포위 공격 때 빈은 순식간에 풍비박산 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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