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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Jul 19. 2024

빈도보나와 암호프 광장


“바이에른 영토는 원래 주인인 ‘거만한 하인리히’의 아들에게 돌려주게. 자네가 영토를 양보하면 작위를 공작으로 승격시켜 주도록 하지.”


바벤베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2세 야소미르고트는 제2차 십자군 원정에 다녀온 이후인 1145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레데릭 바르바로사에게서 흥미로운 제안을 받았다. 세상을 떠난 바이에른 공작 ‘거만한 하인리히’의 아들에게서 빼앗은 바이에른 영토를 양보하라는 것이었다. 


제안을 수락하면 가문의 지위를 오스트리아 태수에서 공작으로 승격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공작으로 승격된다면 다스리는 영토는 ‘왕국’ 바로 아래의 ‘공국’이 되기 때문에 독립국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레겐스부르크에 근거지를 둔 하인리히 2세의 집안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다섯 가문 중 하나, 즉 선제후 가문이었다. 황제의 제안은 영토라는 측면에서는 조금 손해가 되겠지만 장기적으로 가문의 지위와 위상이라는 측면에서는 큰 도움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곧바로 황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바이에른의 레겐스부르크를 수도로 삼았던 하인리히 2세는 새 공국의 수도를 정하기에 앞서 크렘스, 멜크, 클로스터노이부르크 등 오스트리아 곳곳의 여러 도시를 면밀히 살폈다. 그가 첩보원들에게서 받은 각종 정보를 심사숙고한 끝에 고른 새 수도는 고대 로마의 군사도시였던  빈도보나였다.


고대 로마가 이곳에 군사도시를 세운 것은 게르만족과의 국경선인 도나우강에 붙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강변에 방어기지를 건설하면 강 건너 게르만족을 감시하는 게 쉬웠던 것이다. 로마군은 새로 세운 군사기지에 ‘하얀 바닥’이라는 뜻인 ‘빈도보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인구는 군인, 민간인 등을 포함해 1만 5천~2만 명에 이르렀다. 


빈도보나는 가로 500m, 세로 600m, 총면적 6만여 평에 이르는 넓은 기지였다. 로마는 기지 주변에 탑을 가진 높은 성벽을 세우고 성벽 주위에는 해자를 파는 방식으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해자는 오늘날 빈의 쇼핑거리이자 관광 중심지인 그라벤 거리였다. 그라벤이라는 이름은 ‘도랑’이라는 뜻인데 이곳이 과거에는 해자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빈도보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치를 때 가장 신뢰했던 최정예 부대인 10군단의 근거지였다. 10군단은 갈리아 전쟁은 물론 영국 침략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란에서도 카이사르 편에 서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부 역사 기록에 따르면 고대 로마 제정 시대에 ‘5현제’의 마지막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족과 전쟁을 하다 병에 걸려 눈을 감은 곳이 빈도보나라고 한다. 그는 180년 3월 17일 측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이런 과거를 기념하는 뜻에서 암 호프 광장 인근에는 황제의 이름을 붙인 마르크-아우렐슈트라세 거리가 있다.


로마군은 빈도보나를 만든 뒤 병력을 이동하거나 물건을 나르던 군사도로를 만들었다. 빈 구시가지의 중심도로인 케른트너 거리와 콜마르크트 거리가 바로 그곳이었다. 케른트너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 시대 상부 판노니나, 오늘날 오스트리아 서쪽 브룩 안 더 레이타에 있던 카르눈툼이라는 로마군 군사기지로 연결되는 도로였기 때문에 붙여졌다. 


하인리히 2세가 빈도보나를 새 공국의 수도로 고른 것은 이 같은 역사와 지정학적 위치를 두루 고려한 결과였다. 


“고대 로마가 군사기지를 만들 정도였으니 도시로 쳐들어오는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는 쉬울 거야. 강을 끼고 있고 로마가 만든 도로도 있으니 각종 물류를 이동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고. 고대 로마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니 그걸 보강해 새 성벽으로 이용할 수 있겠지.”


하인리히 2세가 1154년 수도를 레겐스부르크에서 빈도보나로 옮기면서 궁전을 건설한 곳은 고대 로마 군사기지 안이었던 북서쪽 광장이었다. 당시 이곳은 주거지였는데, 북서쪽은 로마군이 세운 성벽이었고 나머지 부분은 각종 건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서쪽 성벽 바깥은 해자였다. 오늘날 ‘더 깊은 도랑’이라는 뜻인 티퍼그라벤이 바로 그곳이었다. 


광장으로 들어가고 나가는 문은 하나였다. 오늘날의 이리스가세로 연결되는 곳이었다. 이곳만 잘 감시하면 치안을 유지하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당시에는 이곳보다 치안을 완벽하게 확보할 수 있는 장소를 찾기는 어려웠다. 하인리히 2세는 수도를 옮긴 직후 처음에는 이곳을 바벤베르거플라츠, 즉 바벤베르크 광장이라고 불렀다. 


하인리히 2세가 정착한 덕분에 빈도보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라는 빛나는 역사를 시작하게 됐다. 북서쪽의 광장은 빈도보나의 중심지 역할을 맡았다. 광장은 나중에 암호프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암호프는 ‘궁정에서’이라는 뜻이다. 지금 이곳은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 지역이다. 빈이 오스트리아 수도로서의 역할을 시작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새 지배자인 하인리히 2세가 암호프 광장에 궁전을 건설하자 많은 귀족이 그를 따라 광장 주변에 모였다. 광장은 사회 지도층의 고급 주택지로 발전했고 13세기 말까지 빈도보나의 중심지 역할을 이어갔다. 바벤베르크 가문의 대가 끊긴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가 오스트리아 공작령의 주인이 돼 1275년 호프부르크 왕궁으로 처소를 옮길 때까지 이곳은 빈도보나의 심장이었다. 


궁정의 역할을 빼앗긴 이후 암호프 광장은 서서히 중요성을 잃어갔다. 왕실이 호프부르크 왕궁으로 이전한 이후 광장의 궁전 건물에는 조폐국이 들어섰다. 너른 공터는 시장으로 바뀌었다. 그 영향 때문에 지금도 이곳에서는 크리스마스 마켓이나 사순절 마켓 등 수백 년 전통을 가진 시장이 열리곤 한다. 


암호프 광장은 15~6세기에는 처형장으로 이용됐다. 1463년 4월 15일 빈 시장이었던 볼프강 홀처와 지지자들이 알브레흐트 6세의 명령으로 이곳에서 처형당했다. 1595년 6월 16일에는 빈을 포위한 오스만투르크군에게 성문을 열어주려 했다는 혐의로 붙잡힌 페르디난트 그라프 폰 하르데그가 처형당했다. 2년 뒤에는 농민 반란에 앞장선 지도자 수십 명이 처형당했다.


암호프 광장은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어서 그 역사에 어울리는 오래된 저택은 한두 채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물은 ‘성 요한의 하얀 형제들’ 수도회가 만든 암호프 교회다. 교회의 정면을 보면 마치 17~18세기에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4세기에 지은 건물이다. 1386~43년 사이에 ‘성 요한의 하얀 형제들’이라는 수도회가 조폐국을 없애고 교회를 건설했다. 오늘날 암호프 1번지인 ‘아홉 천사 합창단 교회’가 바로 그곳이다. 교회 역사는 700년을 넘은 셈이다. 


하인리히 2세가 살던 궁전 자리에 들어섰다고 해서 교회는 암호프 광장 1번지라는 주소를 갖게 됐다. 빈의 많은 교회처럼 암 호프 교회도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보수, 증축을 실시했다.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에 교회를 관리하며 증개축과 개보수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예수회의 노력 덕분이었다. 


일반 관광객은 잘 몰라도 이 교회는 깊은 역사를 가진 중요한 곳이어서 역대 3명의 교황이 방문할 정도였다. 교황 비오 4세는 1782년 암호프 교회에서 사순절 축복을 내렸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요제프 2세로 하여금 프로테스탄트를 좀 더 엄격하게 다루라고 설득하려는 게 방문 목적이었다. 1983년과 2007년 빈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트 16세도 교회 제단에 섰다. 베네딕토 16세는 교회 발코니에서 광장에 모인 신도들에게 연설을 했다.


암호프 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저택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 빈에서 첫 연주회를 거행했던 콜랄토 궁전이다. 이 건물은 아직도 암 호프 광장에 남아 있다. 암 호프 교회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다. 아쉽게도 관광객에게 개방되지는 않는다. 다만 모차르트 기념협회가 1956년 6월에 설치한 동판이 붙어 있어 이곳이 모차르트의 흔적이 남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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