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1년 오스트리아 빈에 의욕이 넘치던 요제프 카를 셀리어라는 젊은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당시 케른트너 거리에 있던 케른트너토르극장의 주인이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5번’과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이 초연된 유명한 극장이었다.
셀리어는 평소 호프부르크왕궁 앞의 미하엘러광장을 자주 지나다녔다. 그때마다 궁전 외곽에 붙은 옛 무도회장을 보곤 했다. 과거에는 화려한 시설 때문에 큰 인기를 끌던 곳이었지만 그가 살던 시대에는 전혀 사용되지 않던 공간이었다. 사업적 수완이 뛰어났던 그는 옛 무도회장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셀리어는 오스트리아제국의 최고 권력자이던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를 알현해 옛 무도회장을 연극, 오페라, 음악을 공연하는 극장으로 바꾸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곳을 극장으로 바꾼다면 앞으로 왕실 가족은 음악을 즐기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습니다. 왕실과 극장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면 걸어서 1~2분 만에 극장에 오실 수 있습니다. 왕실만 음악을 즐기지 않고 국민과 함께 기쁨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셀리어의 제안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해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물론 왕실 가족은 음악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수시로 호프부르크왕궁이나 쇤브룬궁전에 음악인을 불러들여 연주를 듣곤 했다. 하지만 일반 국민과 어울려 음악을 즐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국민과 함께 어울린다면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셀리어는 7년 만인 1748년 새 극장 수리를 마쳤다. 극장 좌석 중에서 두 개는 왕실에서 사용하는 로열박스로 지정했고, 나머지 좌석은 누구든 정해진 요금을 내면 차지할 수 있게 했다. 개관 공연은 1748년 5월 14일에 열렸다. 이날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일이었다. 공연작은 ‘다시 알려진 세미라미데’였다.
그런데 첫 공연이 성황리에 끝나자마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극장 폐쇄를 명령했다. 너무 화려해서 국민에게 사치심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셀리어는 초조하고 답답했지만 원래 보수적인 것으로 널리 알려진 마리아 테레지아가 자꾸 고집을 피우며 마음을 돌리지 않는 바람에 극장 재개장은 무기한 연기됐다.
상황이 바뀐 것은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776년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인 황제 요제프 2세가 적극 나선 덕분이었다. 그는 음악, 특히 오페라에 관심이 많았다. 오스트리아 음악인들에게 오페라 제작에 적극 뛰어들라고 수시로 권장할 정도였다. 이탈리아어가 아니라 독일어 오페라를 많이 만들라고 재촉했다.
황제는 독일어 오페라를 장려하기 위해 나치오날 징슈필이라는 오페라 제작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독일어로 된 오페라를 만드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훨씬 낫다는 소리를 듣는 작품을 만들자는 게 목표였다. 그가 부르크극장 재개장을 허락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요제프 2세는 부르크극장을 정치에 이용했다. 국민이 연극과 음악에 신경을 쓰느라 다른 국가적 사무에는 신경을 끄도록 만들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극장 개설을 허용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요제프 2세는 극장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때로는 무대 뒤에서, 때로는 청중으로 극장 활동에 참여했다. 그가 극장에 자주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극장 운영은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었다. 이곳에 들어가는 입장권을 산다는 것은 황제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극장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부르크극장의 원래 이름은 ‘성 안의 제국 극장’이었다. 요제프 2세는 1776년 극장 이름을 ‘부르크국민극장’으로 바꿨다. 그는 극장 총감독 자리도 맡았다.
황실의 영향력은 예술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음악에도 검열이 일상적이어서 완성된 곡을 새로 고쳐 써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곳에서 비극이 아니라 해피엔딩으로 바뀌어 무대에 올랐다.
부르크극장이 유명한 것은 무엇보다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오페라 3개 작품과 여러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부르크극장은 빈에서 모차르트의 황금 시기를 상징하는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20개 작품을 작곡했다. 그중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 ‘돈 조반니’ ‘마술 피리’를 ‘모차르트의 4대 오페라’라고 부른다. 넷 중에서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가 부르크 극장에서 초연됐다. 4대 오페라에 포함되지 않지만 유명한 오페라인 ‘후궁 탈출’까지 합치면 모두 3개 작품이 여기서 초연됐다.
가장 먼저 공연된 작품은 ‘후궁 탈출’이었다. 이 오페라는 1782년 7월 16일 부르크극장에서 초연됐는데 모차르트가 직접 지휘했다. ‘피가로의 결혼’은 1786년 5월 1일 초연됐다. ‘여자는 똑같아’라는 뜻인 ‘코지 판 투테’는 1790년 1월 26일 초연됐다.
모차르트는 1785년 3월 10일 부르크극장에서 ‘피아노 협주곡 제21번’을 연주했다. 피아노 협주곡은 당시 귀족이 가장 즐겨듣던 음악이었다. 그는 또 1783년 3월 23일 대연주회를 비롯해 1784년 4월 1일과 1785년 3월 10일, 1786년 4월 7일에도 단독 연주회를 개최했다. 1783년 3월 30일 테레사 타이버, 1784년 3월 23일 안톤 스타들러, 1785년 2월 13일 엘리자베트 디스틀러 등 동료 음악가의 연주회에 초청돼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1783년 강림절과 1785년 사순절, 강림절에 열린 자선 연주회에도 참가했다.
호프부르크왕궁의 부르크 극장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호프부르크왕궁을 보수, 확장하는 과정에서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왕실은 대신 링슈트라세에 새 극장을 건설했다. 왕실은 국민의 눈에 들키지 않고 안전을 걱정할 염려도 없이 음악을 즐기기 위해 호프부르크왕궁에서 새 부르크극장으로 연결되는 지하터널을 만들었다. 이 사실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일반인은 터널에 갈 수도, 찾을 수도 없다.
완전히 부서진 옛 부르크극장은 흔적만 남았다. 호프부르크왕궁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10m 정도 가면 작은 기념 명판이 하나 보인다. 이곳이 모차르트 시대에 부르크 극장 자리였음을 알리는 명판이다. ‘요제프 2세가 독일 국민 극장이라고 이름을 지은 부르크 극장이 1776~1888년 이곳에 존재했다.’
옛 부르크극장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1888년 10월 13일이었다. 이틀 후 새 부르크극장이 문을 열었다. 새 부르크극장은 이후 빈의 랜드마크가 될 정도로 건물과 내부시설이 훌륭했다. 극장을 설계한 사람은 당대 최고 건축가였던 고트프리드 셈퍼와 카를 폰 하세나우어였다. ‘카이저포럼’ 계획에 따라 호프부르크왕궁의 신관인 노이에부르크와 인근의 미술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을 지은 사람들이었다.
새 부르크극장 정면은 여러 연극과 문학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새긴 조각과 아폴로 신을 묘사한 조각으로 장식됐다. 실내장식에는 유명 화가가 다수 참가했다. 천장화 등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판화가인 그의 형 에른스트 클림트, 화가 겸 조각가 프란츠 마치가 만들었다. 그들의 작품이 얼마나 훌륭했던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들에게 황금십자가훈장을 수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는 나치 독일에 병합됐다. 악영향은 부르크극장에도 미쳤다. 이곳에서는 히틀러의 취향을 고려한 공연이 진행됐다. 1943년에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연극 ‘베니스의 상인’이 공연됐다. 히틀러는 이 작품에 묘사된 유대인의 부정적 이미지를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적국인 영국의 작가였지만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매우 좋아했다.
테렌스 만은 뮤지컬 ‘캐츠’와 ‘레미제라블’, ‘미녀와 야수’, ‘로키 호러 쇼’ 등에 출연한 미국의 연극배우 겸 영화배우다. 올해 일흔세 살인 그는 연극계에 널리 알려진 명언을 남겼다. 부르크극장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당신을 유명하게 만든다. TV는 당신을 부자로 만든다. 하지만 극장은 당신을 훌륭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