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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Oct 17. 2024

부다페스트 둘째 날(1) 유럽 10대 파노라마 전경


부다페스트 여행 코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름 그대로 부다와 페스트다. 도나우강을 사이에 두고 왼쪽이 부다, 오른쪽이 페스트다. 두 지역은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한 도시가 아니었지만 도시 통합을 통해 부다페스트라는 이름의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헝가리 여행 첫 날 부다페스트 외곽의 센텐드레와 괴될뢰를 둘러본 데 이어 오늘은 헝가리 시내 두 지역 중 왕궁이 있는 부다를 살펴본다. 이곳에 있는 ‘어부의 성채’에서 내려다보는 파노라마 전경은 정말 아름다워서 최근 한 여행사이트에서 선정한 ‘세계 10대 파노라마 전경 명소’에 뽑히기도 했다. 부다페스트에 가면 이곳부터 둘러보는 게 급선무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전설에 따르면 부다라는 지명은 5세기 훈족 지도자였던 아틸라의 형 블레다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틸라는 왕 자리를 빼앗기 위해 형을 죽이고 도나우강의 언덕에 묻은 뒤 무덤이 있는 곳을 부다라고 불렀다고 한다. 19세기 헝가리 최고의 시인이었던 아라니 야노시가 ‘부다의 죽음’이라는 시에 이런 내용을 담은 이후 헝가리에서는 이 전설을 거의 사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블레다가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언덕이 아니라 도나우강의 섬이었다. 그래서 그가 죽은 뒤 그 섬을 오부다로 불렀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부다라는 지명의 유래를 담은 사료가 없어 ‘블레다에서 기원했다’는 전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페스트에서 부다로 가는 길은 크게 두 갈래다. 세체니 다리를 건너 부다 왕궁으로 올라가는 푸니쿨라를 타는 방법이 가장 편리하다. 두 번째는 지하철 젤 칼만 역에서 내려 1~2분 걸리는 바르포크 거리로 가서 버스 16번을 타면 된다.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갈 때는 푸니쿨라 대신 왕궁 샛길로 걸어가기로 했다. 


버스 16번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언덕길을 오르더니 ‘빈 문’으로 번역되는 ‘베치 카푸’를 지난다. 문을 통과하자마자 오른쪽에 훌륭한 건물이 나타난다. 헝가리의 각종 문서를 보관하는 국립문서보관소다. 상시 개방하는 곳은 아니고, 월요일과 화요일 오전 10시, 오전 11시, 오후 2시에 가이드 투어를 진행한다. 시간적 여유가 많다면 미리 예약을 하고 한 바퀴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16번 버스는 동네 식료품점을 지나 방향을 왼쪽으로 꺾는다. 버스 오른쪽에 아주 낡았지만 깔끔하게 정비된 교회가 보인다. 부다에서 가장 오래된 성소인 막달라마리아교회다. 부다에서 가장 인기 높은 관광명소인 성마차슈대성당보다도 더 긴 역사를 자랑한다. 



원래 이름이 성모승천교회였던 성마차슈대성당이 생긴 뒤 두 성소의 이용자는 갈라졌다. 성모승천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사람은 독일어를 쓰는 기득권이었고, 막달라마리아교회에서 기도한 사람은 헝가리 평민이나 민족주의 정신에 사로잡힌 귀족이었다. 사실 이런 상황은 헝가리 부다페스트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당시 중부유럽에서 최강국인 오스트리아제국이나 바바리아공국의 지배를 받은 헝가리, 체코, 폴란드 모두 마찬가지였다. 체코의 사제 얀 후스가 15세기에 종교 개혁과 민족 각성을 외치며 반독일 반외세 운동에 나선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막달라마리아교회를 지나면 거리 끝부분에 너른 광장이 나타난다. 성삼위일체기둥이 서 있어 성삼위일체광장으로 불리는 곳이다. 지금은 광장이지만 중세에는 고불고불한 골목과 크고 작은 집들이 이어진 동네였다. 17세기 오스만투르크 침략 때 이곳의 집은 모두 부서졌는데 아무도 재건하지 않아 광장으로 바뀌었다.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처럼 이곳의 성삼위일체기둥도 역병이 사라진 것에 대해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드리는 뜻에서 세웠다. 역병이 부다페스트를 덮쳐 많은 사람이 숨지자 부다 성에 살던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에게 “역병을 사라지게 해 주시면 기둥을 만들어 바치겠다”고 다짐했다. 역병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약속대로 기둥을 만들었다. 


3년 뒤 역병이 재발해 더 많은 사람이 숨졌다. 사람들은 “기둥이 너무 작고 조악해 성모 마리아가 화를 내는 것”이라며 역병이 사라지면 더 큰 기둥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3년 뒤 역병은 완전히 없어졌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높은 14.4m짜리 기둥을 새로 만들어 세웠다. 그 이후에는 역병은 다시는 부다페스트를 괴롭히지 않았다.



성삼위일체광장에 서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다. 가장 먼저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은 성마차슈대성당의 웅장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 그 옆에는 헝가리 역사상 최고의 국왕인 성 이슈트반 조각상이 서 있고, 조각상 뒤에는 부다지구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어부의 성채(요새)’가 보인다. 


헝가리어로 할라스바스티야인 어부의 성채 총길이는 140m다. 그중 회랑 부분은 40m다. 어부의 성채는 사실 아주 오래된 건축물은 아니다. 1895~1902년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됐다. 원래 중세에 도미니카 수도회와 성당의 벽이 있던 부분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어부의 성채라는 이름은 중세에 몽골이 재침했을 때 어부 길드가 어부의 성채 부분을 방어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하지만 실제는 조금 다르다. 어부의 성채 아래쪽에 과거 어부들이 모여 사는 촌락이 있었다. ‘물의 마을’이라는 뜻인 비지바로스의 남쪽 부분이었는데, 오늘날 세체니 다리를 중심으로 위아래 지역이었다. 중세에 어부들은 부다성의 성마차슈대성당 근처에서 수시로 열린 생선시장에 각종 생선을 들고 가 팔았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생선시장 인근 지역, 오늘날 어부의 성채 부분에 올라가 성을 지키게 돼 있었다. 그래서 이곳에 어부의 성채라는 이름이 붙었다.



어부의 성채에는 아래쪽 마을과 성채를 연결하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골목이 나오고 골목을 따라 다시 내려가면 마을로 이어진다. 이 길은 과거 어부들이 생선시장으로 오갈 때 이용하던 길이다. 또 성마차슈대성당을 재건한 훈야디 마차슈 국왕의 형 훈야디 라슬로가 억울하게 투옥됐다 탈출할 때 달아난 길이기도 하다.


이름의 내력이나 역사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두기로 하자. 하얀색 담장인 어부의 성채에 가면 무조건 위로 올라가 파노라마 전경을 살펴야 한다. 참고로 낮에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밤에는 무료로 올라갈 수 있다.


성채 아래 부다 일대는 물론 도나우강 건너편 국회의사당과 세체니 다리 등 페스트 지구 전경도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복고풍 감성이 진하게 흐르는 영화의 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아름다움이 넘친다. 



가슴이 단숨에 뚫리는 것처럼, 눈이 맑아지는 것처럼 시원한 기운이 온몸을 스치는 걸 느낄 수 있다. 담장에 기대어 아무 생각 없이 도나우강과 국회의사당을 바라보면서 멍 때리기를 하는 것도 좋다. 


어부의 성채 전망은 밤에 가서 보면 더 훌륭하다. 일부에서 ‘유럽 3대 야경’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괜히 띄우기 위해 하는 과언이 아니다. 아름다운 부다페스트를 평생 잊지 못하게 만드는 풍경이다. 


잘 살펴보면 어부의 성채에는 탑 일곱 개가 있다. 각 탑에는 조각상이 하나씩 세워졌다. 895년 아르파드를 지도자로 삼아 이곳에 정착해 헝가리를 건국한 일곱 부족장 조각상이다.



모든 조각상 중에서 중심은 역시 성마차슈대성당을 바라보는 성이슈트반동상이다. 이 동상은 헝가리에 기독교를 널리 보급한 초대국왕 성 이슈트반의 기마상이다. 이슈트반은 997~1000년까지는 헝가리 대공이었다가 1000년에 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이교도 반군의 저항을 꺾고 헝가리 역사상 최초로 왕관을 쓰고 대관식을 치렀다. 그가 대관식에 사용한 왕관, 칼은 물론 각종 물품은 이후 헝가리 국왕 대관식에 반드시 사용됐다. 이슈트반의 왕관을 쓰지 않고 대관식을 치르면 무효로 간주됐다. 


성이슈트반동상이 세워진 것은 사실 아주 오래되지는 않았다. 성마차슈대성당과 어부의 성채를 재건할 때 동상이 처음 만들어졌다. 대성당 재건을 맡은 건축가 슐렉이 광장에 동상을 세우자고 제안한 게 계기였다. 처음에는 동상 주변에 돔 모양 건축물을 지으려고 했지만 예산 부족 때문에 야외에 노출된 동상을 만드는 데 그쳤다. 


동상을 제작한 조각가는 당대 헝가리 최고의 조각가 스트로블 알라요쉬였다. 그는 1898년 제작을 시작해 5년 뒤 완성했다. 제막식은 1906년 5월 21일 열렸다. 제막식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황제이면서 헝가리 국왕인 프란츠 요제프, 헝가리 정부의 베켈레 샨도르 총리는 물론 헝가리 주요 귀족이 모두 참석했다.



성이슈트반동상은 다양한 무늬로 장식된 기둥 여섯 개로 받쳐졌다. 기단은 재임 기간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묘사한 부조로 장식됐다. 이슈트반의 대관식, 법 도입, 빈 대표단 영접이었다. 뒤쪽과 동쪽에는 교회 건설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이 담겼다. 


재미있는 사실은 스트로블이 부조의 한 장면에 슐렉의 모습을 몰래 담았다는 점이다. 무릎을 꿇고 이슈트반 국왕에게 성당 모형을 전달하는 수염 기른 사람이 바로 슐렉이다. 부조 위에는 정교하게 장식된 돌림띠가 있다. 황금색 메달 모양 장식 안에 하느님의 어린 양을 뜻하는 ‘아그누스 데이’와 천사의 상징, 이중 십자가가 보인다. 


성이슈트반동상은 특이하게도 부다페스트 시내를 바라보지 않고 성 마차슈 대성당을 쳐다본다. 전설에 따르면 성마차슈대성당은 1015년 이슈트반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처음 건설했다. 헝가리에 기독교를 널리 퍼뜨린 성 이슈트반에게 신앙의 핵심은 바로 성당이었다. 그는 이전부터 부다에 있던 막달라마리아교회와 이곳을 중심으로 백성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가 대성당을 바라보는 것은 그가 심은 기독교의 씨앗이 잘 자라는지를 확인하겠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성 이슈트반이 대성당을 지었다는 전설은 기록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어느 자료에도 그런 내용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17세기 오스만투르크 지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만 확인된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성모마리아승천교회였다. 지금은 흔히 성마차슈대성당이나 대관식대성당이라고 불리지만 여전히 정식 명칭은 성모마리아승천교회다.


대성당은 1255~1269년 몽골 침략 때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이때 혼이 난 벨라 4세 국왕은 허물어진 성모마리아승천교회 자리에 새 성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몽골 침략을 피해 피란을 온 체코인 중에서 건축가, 조각가가 있었는데 이들이 새 성소를 짓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나중에는 프랑스 북부에서 온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았다. 


성마차슈대성당은 마차슈 코르비누스(훈야디 마차슈) 국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헝가리 최고의 고딕 건축물로 평가를 받는 북서쪽 종탑을 지었다. 종탑은 오늘날에도 당시 모습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다. 그는 또 왕립 예배당도 건설했다. 그는 두 번 결혼했는데 두 결혼식을 모두 성마차슈대성당에서 거행했다.



성마차슈대성당은 16세기 오스만투르크 침략 때 큰 피해를 입었다. 오스만투르크는 성모마리아승천교회를 모스크로 바꿨다. 슐레이만 술탄은 이곳에서 알라에게 ‘승리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예배를 올렸다. 모스크로 바뀌는 과정에서 교회 내부 집기와 재단은 부서졌다. 벽화는 제거됐고, 왕실 예배당과 북쪽 종탑, 가락 예배당도 파괴됐다. 막달라 마리아 교회 등 부다지구의 다른 교회는 모두 파괴됐다.


성마차슈대성당 자리는 이른바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오스만투르크가 헝가리를 지배하던 1686년 이슬람군을 몰아내려는 기독교 신성동맹 군대가 부다성을 포위했을 때였다. 기독교군의 맹공에 시달려 두려움에 떨던 이슬람군 병사들은 대성당 안에서 기도를 드렸다. 이때 기독교군의 대포가 대성당에 떨어져 대성당 일부가 무너졌는데, 벽 속에 숨겨졌던 성모 마리아 조각상이 발견됐다. 이 조각상을 본 이슬람군 병사들의 사기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머지않아 부다성은 물론 부다페스트와 헝가리는 기독교의 품으로 돌아갔다. 물론 전설일 뿐이고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성모 마리아 그림이 벽에서 발견됐다는 전설은 스페인 마드리드의 알무데이나대성당에도 전한다. 스페인이 이슬람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레콩키스타에 나서 마드리드를 탈환했는데, 옛 이슬람 성벽에서 성모 마리아 그림이 발견됐다는 것이다. 이곳에 세운 대성당이 바로 알무데이나대성당이었다. 


기독교 군대가 1686년 부다를 탈환한 이후 여러 사람이 대성당을 조금씩 재건했지만 1723년 일어난 부다 대화재 때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 대성당이 재건된 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탄생 6년 뒤인 1873년이었다. 제국 황제이자 헝가리 국왕인 프란츠 요제프가 재건하라고 지시한 덕분이었다. 공사 총책임자는 요제프기술대 교수이며 헝가리과학아카데미 회원이었던 슐렉 프리기예슈였다. 오늘날 성마차슈대성당의 모습은 이때 만들어졌다. 


슐렉은 예수회가 만든 건물을 모두 철거해 대성당을 옛 모습대로 복원했다. 중세 원형이 어땠는지 알 수 없는 부분에는 창의성을 살렸다. 대성당이 완공된 것은 1893년이었다. 



성마차슈대성당이 대관식성당이라고 불리는 것은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였으며 헝가리 국왕이었던 프란츠 요제프와 그의 부인 황후 엘리자베트가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했기 때문이다. 


성마차슈대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곳은 유럽의 다른 대성당과 비교해볼 때 엄청나게 크거나 화려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 헝가리의 경제력이 대규모 대성당을 짓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성당에서 특별히 눈에 띄거나 관심을 끄는 것은 없다.


성당 안에서 반드시 봐야 할 것은 황후 엘리자베트 관련 자료다. 성당 1층은 성당 공간이고 2층은 박물관인데 엘리자베트 자료는 2층에 있다. 그녀의 사진과 동상은 물론 그녀가 쓰던 물건이나 각종 관련 자료가 전시됐다. 



성마차슈대성당을 둘러보고 나오면 기본적으로 성삼위일체광장 일대의 여행은 끝난 셈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부다왕궁 쪽으로 갈 수는 없다. 아직 한군데 남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대성당 맞은편 센타롬샥 거리에 있는 케이크 가게인 루스우름 추크라스다다.


루스우름 추크라스다는 1827년 독일 출신 제과 기술자 안탈 뮐러가 개업한 부다페스트 첫 서구식 제과점이었다. 이곳이 유명해진 것은 맛 외에도 황후 엘리자베트, 즉 시씨의 단골 제과점이기 때문이었다. 시씨가 1865년 남편 프란츠 요제프 황제를 따라 부다페스트를 처음 방문했을 때 루스우름 추크라스다의 크림 케이크를 먹었는데 그 맛에 반해 단골이 됐다는 것이다. 


물론 제과점 앞으로 무작정 간다고 해서 케이크를 사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곳인 만큼 관광시즌이나 토, 일요일에는 가게 안팎에서 빈자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붐빈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점이고 시씨의 단골이라는 소문이 난 데다 부다페스트 최고의 관광 명소에 자리를 잡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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