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 엘리자베트, 즉 시씨의 노력 덕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한 이후 헝가리 경제는 눈부시게 발전했고, 1873년 부다와 페스트는 합쳐져 부다페스트가 됐다. 두 지역은 그 이전에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두 도시였다. 도시 통합은 부다페스트를 국제도시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됐다. 특히 페스트 지구의 발전은 눈부실 정도였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부다페스트의 모습이 형성된 것인 이때부터였다. 기존에 있던 세체니 다리 외에 마르기트 다리, 자유의 다리(옛 프란츠 요제프 다리), 에르지벳 다리 등 여러 개의 교량이 건설됐다. 구불구불한 골목 같던 도로는 사라지고 안드라시 대로 등 시원시원하게 직선으로 쭉 뻗은 새로운 현대식 도로가 생겼다. 유럽에서는 최초로 전기식 지하철이 안드라시 대로 지하에 건설된 것도 이때였다. 여기에 국회의사당도 건설됐고, 오페라 하우스 등 각종 극장, 뉴욕 카페, 카페 제르보 등 유명한 커피전문점, 세체니 온천과 겔레르트 온천 등도 만들어졌다.
오늘 여행의 시작 지점은 부다 지구와 페스트 지구를 연결하는 최초의 교량이었던 세체니 다리다. 숙소인 D8 호텔에서 세체니 다리까지는 다행히 걸어서 2~3분 거리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체니 다리는 공사 중이다. 1년이 지난 지금은 공사를 마치고 재개통했지만 2022년 10월에는 입구를 막고 관광객 통행을 제한했다. 전날 부다왕궁에서 내려다본 풍경을 기억하면서 세체니 다리 관광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세체니 다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범 이전인 1839~49년 사이에 건설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도나우강에는 다리라고는 하나도 없어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녔다. 다리 건설 사업은 다리가 없어 부친 임종을 지키지 못한 정치인 세체니 이슈트반의 제안에 따라 시작됐다.
세체니 다리는 헝가리 역사상 도나우강에 세워진 첫 ‘영구적 다리’였다. 세체니가 다리 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다리에는 세체니의 이름이 새겨졌다. 또 다리 앞의 넓은 공터에는 ‘세체니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광장에는 고목이 한 그루 있는데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라고 한다. 1789년에 심은 나무라고 하니 수령은 200여 년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는 은행나무 수령이 1100여 년인 것과 비교하면 아직 청년인 셈이다.
현재의 세체니 다리는 19세기에 세체니가 건설한 ‘원본’이 아니다. 원본 다리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이던 1945년 1월 18일 달아나던 독일군이 폭파하고 말았다. 탑 두 개만 겨우 붕괴를 모면했다. 헝가리 정부는 4년 뒤인 1949년 다리를 재건했다. 지금 부다페스트에서 볼 수 있는 세체니 다리는 이때 새로 만든 것이다.
세체니 다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양쪽 입구에 선 사자 석상이다. 당시 헝가리의 최고 조각가였던 마르샬코 하노스가 만들어 1852년 설치한 작품이다. 그런데 조각이 설치되자마자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사자에 혀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조각가가 사자를 제대로 못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마르샬코는 “사자는 입을 열어도 혀가 보이지 않는다. 입 안쪽에 만들어졌다”고 해명했지만 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가뜩이나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세체니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말았다.
실제로 세체니 다리 사자 석상에서 혀는 보이지 않는다. 마르샬코의 주장대로 안쪽에 보이지 않게 만들어졌다면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조각으로 올라가서 사자 입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외국 여행을 갔다 경찰서 신세를 지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체니 다리를 만들고 처음에는 통행료를 받았다. 걸어 다니는 사람, 마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에 따라 요금이 달랐다. 그 수입이 얼마나 엄청났던지 건설하고 수년 만에 공사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부다페스트 시청은 새 다리를 짓기로 했다. 다리 통행료를 더 받아 시청 세수를 늘릴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서 새로 생긴 다리는 세체니 다리 북쪽에 있는 마르기트 다리였다.
공사 중인 세체니 다리를 지나 강변으로 내려간다. 여기서 북쪽 마르기트 다리 쪽으로 가다보면 이색적인 조형물이 등장한다. 노동자의 작업화, 회사원의 구두, 여자의 하이힐, 어린이의 운동화 같은 쇠 신발이다. 이 조형물은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이다. 헝가리어로는 치푸 아 두나 프라톤이다.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은 튀르키예 출신 영화감독 칸 토카이가 홀로코스트기념관을 보고 아이디어를 냈고, 헝가리 출신 조각가 귤라 파워가 만들었다.
이곳에 설치된 신발은 모두 60켤레다. 주변에는 길이 40m, 높이 70cm의 돌 벤치가 있다. 3개 지점에 영어, 헝가리어, 히브리어로 쓴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 내용은 이렇다. ‘1944~45년 민병대 ‘애로 크로스’의 희생자들을 기념하며 2005년 4월 16일 건설하다’
애로 크로스는 극우 정치인 잘라지 페렝이 만든 극우정당이었다. 헝가리어로는 닐라스케레스테스였다. 이 정당의 지지자는 소외받은 군 장교나 병사, 민족주의자,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마자르주의를 주창했고,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와 군국주의를 신봉했고, 반유대주의를 전면에 내세웠다.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했을 때 애로 크로스는 나치의 수족 노릇을 했다. 독일은 1944년 말 소련군의 공격에 밀려 쫓겨날 때 애로 크로스에 유대인 학살 임무를 맡겼다. 애로 크로스가 저지르는 학살극에서 희생된 유대인은 무려 3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병원에 누운 노인은 물론 게토에 갇혀 사는 유대인 거주자, 거리에서 유대인 표식을 달고 다니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하게 학살을 저질렀다. 그중 상당수는 다뉴브 강가에 끌려가 학살당한 뒤 강물에 내던져졌다.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은 이런 역사를 반성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하필이면 왜 신발을 만든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당시 유대인을 학살한 애드 크로스 대원들은 유대인을 죽이기 전에 신발을 벗게 했다. 시장에 내다팔아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신발은 인간이 땅에 발을 디디게 해주는 최소한의 보호 장치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허약한 인간이 먼 옛날부터 가장 먼저 착용한 인체 보호 장치 중 하나였다. 이런 신발을 빼앗는다는 것은 단순히 살해하는 것을 넘어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신약성서>에는 신발을 빼앗는 것을 노예를 상징하는 행위라고 설명돼 있다. 고대 근동과 중동 지역에서는 성스러운 인물이나 장소에 다가갈 때 신발을 벗었다고 한다. 중세 유럽 일부 지역에서는 신발을 벗는 행위는 모든 법적 권리 포기를 선언하는 것과 똑같이 간주됐다.
칸 토카이와 귤라 파워가 신발 조형물을 만들어 설치한 것은 학살당한 유대인에게 신발을 돌려줌으로써 그들의 존재를 다시 세상으로 데려오는 일종의 복원 장치였던 셈이다.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앞에는 언제나 꽃이 놓여 있다. 희생자의 유족이거나, 과거의 학살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헝가리인들이 가져다놓은 것이다. 5년 전 겨울에 눈이 내렸을 때 간 적이 있었다. 하얀 눈에 덮인 빨간 장미와 녹이 슬어 검은색처럼 변한 신발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다뉴브 강가의 신발들’을 지나 강을 따라 조금 더 걷다보면 오른쪽에 웅장한 건물이 나타난다. 헝가리의 주권을 상징하는 국회의사당이다. 헝가리어로는 ‘오르사가즈’라고 불린다. 국회의사당은 다뉴브강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강을 향한 부분은 국회의사당의 뒤쪽이고 정면은 강 반대쪽이다.
헝가리 국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이어 통합도시 부다페스트가 출범하고 7년 뒤 국가의 주권을 상징하는 새 국회의사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국회의 생각은 다뉴브 강을 마주보는 건물을 짓자는 것이었다. 당시 헝가리 국회는 국회의사당을 갖지 못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회의를 열었다.
헝가리 국회는 국제공모전을 통해 헝가리 건축가인 임레 스타인들의 작품을 선택했다. 공사는 1894년에 시작됐다. 국회가 내건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사에는 헝가리에서 생산한 재료만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예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헝가리에서 생산되지 않는 재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실내 계단에 설치할 대형 기둥 열여섯 개를 만들 대리석이었다. 이 재료는 헝가리에서 도저히 구할 수 없어 스웨덴과 영국에서 수입했다.
헝가리 국회는 1896년 6월 8일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이던 새 국회의사당에서 첫 회의를 열었다. 새 천년을 시작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개원식이었다. 1894년 첫 삽을 뜬 국회의사당이 최종적으로 완공된 것은 1904년이었다. 이렇게 해서 건설한 국회의사당의 길이는 268m, 폭은 123m, 높이는 96m였다.
오르사가즈는 지금도 성이슈트반대성당과 함께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이 도시에서는 어떤 건물도 96m를 넘을 수 없다. ‘96’이라는 숫자는 헝가리 왕국 건국 연도인 896년과 건국 1천 주년인 1896년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르사가즈는 양쪽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는 짧은 ‘ㅜ’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헝가리 국회가 처음에는 양원제였기 때문에 한쪽에는 상원, 다른 쪽에는 하원을 넣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양쪽 건물은 마치 거울을 보고 건설한 것처럼 똑같은 구조로 만들어졌다. 헝가리 국회는 지금은 단원제여서 국회의사당 한쪽만 사용되고 나머지 한쪽은 관광객에게 투어용으로 개방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과거 상원이었던 건물에 깔린 카페트는 파란색, 하원이었던 건물에 깔린 카페트는 빨간색이다. 당시 상원의원 대부분은 귀족, 하원의원 대부분은 평민이었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귀족의 몸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고 믿었다고 한다.
헝가리 국회의사당 주변은 민족주의와 헝가리의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건물, 동상으로 가득하다. 국회의사당을 에워싼 너른 광장의 이름은 19세기 대표적 민족주의자로서 헝가리의 독립을 추진한 헝가리 혁명의 주역이었던 코슈트 라요수의 이름을 딴 코슈트라요수광장이다. 국회의사당 정면에는 코슈트 라요수 기마상이 있다.
건물 왼쪽에는 또 다른 19세기의 민족주의자이며 황후 엘리자베트의 정신적 연인이었던 안드라시 귤라 기마상이 있다. 이 기마상 기단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출범시켰던 ‘대합의’ 서명 장면을 담은 부조와 프란츠 요제프와 엘리자베트의 헝가리 국왕, 여왕 대관식을 담은 부조가 양쪽에 붙었다.
코슈트 라요수 기마상 왼쪽 모퉁이 정원에는 지하도처럼 보이는 구조물이 있다. ‘인 메모리암 1956년 10월 25일’, 즉 ‘1956년 10월 25일 기념물’이다. 헝가리가 옛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정권의 지배를 받던 1956년 10월 23일 이른바 ‘헝가리 봉기’가 발생했다. 봉기의 중심 장소는 헝가리 주권을 상징하는 국회의사당 앞 코슈트 라요수 광장이었다.
헝가리 공산정권은 이틀 뒤 무력을 동원해 광장에서 대학살극을 저질렀다. 10월 25일 대학살극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남녀노소를 포함해 총 2500명이었다. 이날이 화요일이어서 헝가리에는 이날 참사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른다. 당시 총격의 흔적은 광장 곳곳에 남았다. 국회의사당 맞은편 농업부 청사 건물 벽에는 ‘피의 화요일 기념물’이 있다. 공산정권이 발사한 총탄 흔적과 함께 각종 사진 등이 전시됐다.
농업부 청사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가면 제법 큰 도시 공원형 광장이 나타난다. 헝가리의 험난했던 현대사를 담은 ‘자유의 광장’이다. 이곳은 18~19세기 헝가리 역사상 가장 잔혹한 억압의 현장이었다. 어두운 역사가 아름다운 공원의 풍경에 가려진 것이다. 광장 곳곳에는 자유와 평화에 바치는 동상이 서 있는데 이처럼 어두운 역사를 상징하는 동상이다.
오스트리아는 오스만투르크를 몰아내고 헝가리를 합병한 뒤 1786년 자유의 광장 자리에 군을 주둔시켰다. 헝가리는 19세기 초 오스트리아에서 독립하기 위해 1848~49년 독립 혁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혁명군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때 이 광장에서는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많은 혁명 운동가 및 혁명군 병사가 자유의 광장 자리로 끌려가 처형당했다. 혁명을 이끈 당시 총리 바티야니 라요수도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출범한 뒤 오스트리아군은 철수했다. 그들이 주둔했던 공터는 광장으로 바뀌었고 1897년에는 공원이 됐다.
자유의 광장으로 들어가 보자. 가장 먼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동상이 서 있다. 헝가리가 이곳에 로널드 레이건 동상을 세운 것은 그가 냉전을 종식시킨 공로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로널드 레이건 동상 뒤에는 특이하게도 옛 소련이 건설한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가 보인다. 꼭대기에 별이 달리고 옛 소련을 상징하는 망치와 낫을 든 사람이 새겨진 기념물이다. 옛 소련이 헝가리를 사실상 지배했을 때 건설한 것인데, 헝가리 전국을 통틀어 유일하게 남은 옛 소련 기념물이다. 옛 소련이 붕괴된 이후 기념물 철거 논란이 일었지만 푸틴 러시아 대통령 지지파인 빅토르 오르반 총리가 2000년 집권하면서 논란은 잠잠해졌다.
광장 한쪽에는 전직 미국 대통령 동상을 세워놓고 바로 뒤에는 그 미국 대통령 뒤에는 미국과 냉전을 벌였던 옛 소련의 기념물을 만들어놓은 셈이다. 이것을 보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현실의 반영이라고 해야 하나?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를 지나 공원 반대쪽 출구-사실상 입구이지만-로 가면 또 다른 동상이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부다페스트에서 학살당한 사람을 기리는 ‘독일 점령 학살 기념물’이다. 기념물이 선 거리에는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각종 사진과 문구, 그리고 그들에게 바친 꽃이 가득하다. 이 기념물은 당시 목숨을 잃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헝가리인이 당한 고통과 피해를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기념물이 선 것은 9년 전인 2014년이었다.
기념물을 자세히 살펴보자. 기념물의 주인공은 천사다. 그의 한쪽 날개는 뜯겨나가 보이지 않고, 천이 날개처럼 펼쳐졌다. 천사는 오른손으로 사과를 붙잡으려 한다. 그런데 독수리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과를 빼앗으려 한다. 독수리 오른쪽 다리에는 ‘1944’라는 숫자가 적혔다. 여기에서 천사는 헝가리인, 사과는 헝가리, 그리고 독수리는 나치 독일을 상징한다.
하지만 ‘독일 점령 학살 기념물’은 건립 계획 발표 직후부터 유대인 사회로부터 극렬한 비난을 받았다. 유대인은 “나치는 유대인 50만 명을 학살했다. 일부 헝가리인은 여기에 동참했다. 헝가리 정부와 대다수 헝가리인은 침묵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치의 피해자인 것처럼 꾸민다”고 주장했다. 헝가리 주재 이스라엘대사관은 물론 양심적 시민단체도 극렬하게 항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