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빚다'란 재료를 다듬어 형태를 창조하는 것 혹은 어떤 분위기,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을 뜻한다. 지금 내가 써 내려갈 이야기는 나의 전직에 대한, 그리고 나의 인생을 어떻게 빚었고 빚고 있는가이다. 주변에 흔치 않은 도예전공부터 현재 인기직업이라는 개발자로 오기까지의 여정과 일생일대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던 나의 결혼에 대하여 30살이 된 기념으로 더 이상 내 머릿속에 흩어지기 전에 내 일생을 뜨겁고 찬란하게 만들어준 나의 배우자와 내 열정을 담아 보려 한다.
어쩌다 도예를 하게 되었는가 물어보면,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운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릴 때부터 미술대학을 꿈꿔왔고, 도자기는 실생활과 가깝지만 동시에 멀게만 느껴지는 예술이었다. 그렇기에 나에게도 도자기를 빚는 것은 너무나도 생소하고 적응하기 힘들었던 행위 중 하나였다. 운동도 안 해본 저체중이었던 몸으로 흙 10KG를 들고 나르며 원심력과 싸우는 물레는 나에겐 헬스장이었다. 그뿐이었는가. 한 번의 전공 수업은 항상 4시간 논스톱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흙먼지가 묻어 화장도 옷차림도 포기해야 했으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야 했다.
그만큼 중도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공부가 아닌 다른 배움에 이렇게 투자하는 것이 교과서를 읽는 시간보다는 즐거웠고 동시에 지속되는 창작활동이 꽤나 흥미를 느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흠뻑 빠져 도예를 하게 된 계기는 '질투'였다. 이미 도예에 뜻이 있어서 들어온 학생도 있었는데, 도예고에서 이미 기술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어서 교수님의 총애를 받았었다. 그 총애 때문인지 우쭐대는 모습이 눈살 찌푸리게 보기 싫었고 언젠가 내가 이겨내어 저 코를 납작하게 하리라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별을 보면서 등교하고 별을 보며 하교하는 것을 일상으로 지냈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던 때 가장 큰 과 축제인 물레대회에서 학년 통틀어서 1등을 이루어내는 성과를 내기도 했었다. 그 순간 “이렇게 배우는 게 즐거울 수 있구나” 싶었고, 배움이 끝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도예를 사랑하게 되었다. 대학 다니는 동안에 과 대표도 했었고, 아동도예 창업동아리 회장으로 활동하며 배우는 2년 동안 학기에는 공부에, 창작활동을 방학에는 동아리활동으로 창업활동까지 허투루 쓴 시간이 단 1시간도 없었다. 마음으로만 사랑하지 않고 정말 내 한 몸 다 바쳐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열정적으로 보낸 것에 응답이라도 받듯, 아동도예 사업 취업에 성공을 이루었다.
아이들과 함께한 3년은 다시 돌아봐도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예술은 배고픈 직업이기에 유복한 가정에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만의 공방을 차릴 배짱도 없었던 나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노동시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임금과 아동도예 강사로서 그때 그 나이에 견디지 못했던 감정노동이었다.
그 뒤로 2년 동안은 방황이었다. 카페, 콜센터, 학원, 영업 등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지만, 반복되는 일상은 점점 나를 기계처럼 만들어갔다. 매번 바뀌는 스케줄표와 출퇴근 시간을 버티며, 나는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나날을 끝내리라 다짐했다.
처음부터 개발직을 매력적으로 느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국비지원 학원에서 경리 및 영업으로 근무 중이었다. 거기선 한창 IT계열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수강생들을 관리해야 하는 나에게 그때 처음으로 개발직이라는 직업을 알게 된 것이다. IT를 배우는 수강생들은 스펙이 정말 좋았다. 미국에 인턴을 하다 온 사람, 타 전공이지만 관련 전공으로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사람 등 너무 화려한 분들이 공부를 하는 분야이기에 나는 당연히 할 수 없는 직종이겠거니 무관심했었다. 그러다 친하게 지내는 강사님이 1년간 나를 설득하셨었다. 나의 문제 해결능력과 사고를 보면, 개발과 정말 잘 어울린다며 추천을 해주셨다. 들었을 당시에는 서비스직에 고민이 많던 나에게 격려차원으로 해주신 말씀이겠거니 하며 흘러들었다.
그러다 강사님이 파이썬 관련 웹개발 주말 강좌를 운영하시며 나를 초대해 주신 것이 모든 시작이었다. 처음 수업에 앉았을 때, 스크린에 가득 적힌 알파벳과 기호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눈앞에서 ‘코드’라는 낯선 언어가 춤추듯 흘러갔고, 나는 한 줄도 따라가지 못한 채 앉아 있어야 했다. 솔직히 말해 처음엔 흙물레보다도 더 버겁게 느껴졌다. 흙은 손끝의 감각이라도 믿을 수 있었지만, 코드는 머릿속 개념이 잡히지 않으면 화면에 아무 결과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을 끝까지 따라가며 첫 웹페이지를 띄웠던 날의 전율은 아직도 기억난다. 흙덩이가 그릇이 되어갈 때처럼,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경험이었다. 흙과 달리 결과물은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화면 속에 분명히 존재했다. 그 순간 "이 길이라면 다시 시작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쉽사리 전직을 하기에는 20대 후반 여자의 나이에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더 이상 신입으로 취업하기엔 많은 나이 그러나 경력직으로 가기엔 적은 애매한 나이였기 때문이다. 영어로만 된 코드와 발 빠르게 변해가는 IT트렌드에 맞닥뜨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이 몰려왔다. 그래서 나는 1년간 고민만 하며, 파이썬 교재를 붙잡았다 놨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 과정에서 사이버대학교에 다니던 회계학과를 소프트웨어학과로 전과해 수업을 듣기도 했다. 온라인 강의 화면 너머의 교수님 말씀이 한마디도 이해되지 않을 때면 좌절도 했지만, 동시에 호기심은 더 커졌다. 네이버 커넥트 재단에서 운영하는 파이썬 스터디에 참여했을 때, 나와 같은 비전공자들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나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위안도 얻었다. 수료 후에도 몇 명이 모여 스터디를 이어가며, 서로 코드 리뷰를 하고 함께 버그에 부딪히며 성장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처음 나를 개발로 이끌어준 강사님의 국비지원 교육이었다. 나는 그 강의를 꼭 들어야 한다고 믿었지만, 예상치 못한 사정으로 결국 등록조차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기회가 사라지는 듯한 허탈감이 몰려왔고, ‘역시 나는 개발자가 될 수 없는 걸까’ 하는 의심도 커졌다.
그 후로 석 달 동안, 수많은 교육 과정을 찾아다니며 상담을 받고, 커리큘럼을 비교하고, 밤마다 후기를 뒤졌다. 불안은 점점 쌓였지만, 그 시간은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개발을 향한 의지가 흔들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길로든 반드시 해내겠다”는 결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에게 맞는 좋은 강사님을 만났다. 그 만남은 이전의 좌절이 없었다면 결코 닿지 못했을 인연이었다. 나는 그분의 수업에서 본격적으로 개발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시 학생처럼 하루 8시간 넘게 강의를 듣고, 밤마다 예습과 복습을 반복했다. 흙먼지 대신 모니터 불빛 속에서, 물레 대신 키보드를 붙잡고 날을 새우며, 또다시 별과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살아냈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러, 나는 결국 한 회사의 웹개발자로 자리 잡았다. 아직 부족하고,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았지만, 누군가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만들고 운영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흙으로 아이들 장난감을 빚던 손이, 이제는 코드를 빚어 누군가의 일상에 닿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리고 그 사이, 내 옆에는 좋은 연인이 생겼고 우리는 결혼이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도예가도, 개발자도, 아내도 처음이었지만, 그 모든 경험이 나를 더 단단하게 빚어주었다.
이 글은 성공담이 아니다. 실패와 좌절, 작은 성취가 이어진, 여전히 만드는 중인 나의 여정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있다. 도예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무언가를 빚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