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취를 느끼지 못한 아이가 선택한 성장 방식
어릴 때 나는 상도 받고, 전교 1등도 해봤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잘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기쁨보다는 불안이 먼저 왔다. 성취가 끝이 아니라 다음 시험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험이 끝나면 하루 쉬지도 않고 다음 시험을 준비했다. 수업시간은 복습의 시간이었다. 교과서는 3회독 이상 하고 나서야 수업에 들어갔다. 실패의 가능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늘 먼저 준비하고 또 반복해야 마음이 놓였다.
나는 내가 겁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건 타고난 기질 때문이 아니라 안전감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틀리면 체벌이 기다렸고, 칭찬은 잠시뿐 다음 목표가 곧장 제시되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성취가 기쁨이 아니라 “이번엔 살아남았다”는 안도에 가까웠다. 성취를 즐길 겨를 없이 다음 위험을 대비하는 경계 모드가 자동으로 켜졌다.
게임을 할 때 나는 늘 처음엔 약하지만 오래오래 스택을 쌓아서 후반부에 강해지는 캐릭터를 골랐다. 아마도 그렇게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은 약하지만, 꾸준히 쌓아가면 언젠가 압도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캐릭터. 그건 내 무의식 속 희망이었고, 실제로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계속 공부했고, 계속 쌓았다. 남들은 시험이 끝나면 쉬었지만 나는 그 순간을 다음 스택을 쌓는 시간으로 삼았다.
이런 패턴은 나를 끊임없이 성장하게 만들었지만 성취 경험은 느껴지지 않았다. 기쁨은 잠깐 스쳐가고, 곧장 다음 과제를 떠올렸다. 이건 겁이 많아서가 아니라 “멈추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존 본능이었다. 그 덕에 나는 누구보다 많이 준비했고, 후반부로 갈수록 더 단단해졌다.
내가 부족하다고 믿었던 건 사실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략이었다. 이제는 그 전략을 내려놓고 성과와 존재를 분리할 시간이다. 성취가 나를 채찍질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 성장의 증거라는 사실을 다시 몸으로 느껴야 한다.
#생각번호2025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