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이라는 이름의 기형적 팽창

카를 5세의 제국

by 민진성 mola mola

역사는 때로 논리를 비웃는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이었던 카를 5세의 등장은 그 정점에 서 있는 사건이다. 독일권 가문인 합스부르크가 이베리아반도의 주인이 된 과정은 치밀한 정복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지독하리만큼 운 좋은 결혼과 상속이 빚어낸 기형적인 영토의 팽창이었다.



우연이 빚어낸 거대 서사

카를 5세의 가계도는 그 자체로 당시 유럽의 욕망이 투영된 지도다. 부계로부터는 오스트리아와 저지대 국가를, 모계로부터는 스페인과 나폴리, 그리고 신대륙의 소유권을 넘겨받았다. 이는 국가 간의 유기적 결합이 아닌, 한 개인의 손아귀에 우연히 여러 장의 카드가 쥐어진 것에 불과하다.

흔히 오해하는 지점이 여기서 발생한다. 신성 로마 제국이 스페인을 점령한 것이 아니다. 법적, 문화적으로 완전히 분리된 별개의 국가들이 '카를'이라는 단 한 명의 통치자를 공유했을 뿐이다. 역사학적 용어인 '인적 통합(Personal Union)'은 이 불안정한 동거를 설명하는 가장 건조한 수식어다.



합스부르크, 스페인에 뿌리내리다

그가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시조로 불리는 이유는 명확하다. 혈통은 외래인이었을지언정, 그는 스페인의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을 자신의 제국을 유지하는 핵심 동력으로 삼았다. 그는 합스부르크라는 가문의 이름을 스페인 왕관에 각인시킨 첫 번째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통합은 필연적으로 균열을 내포하고 있었다. 카를 5세가 퇴위하며 제국을 아들 필리페 2세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양분한 것은,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통치의 한계를 자인한 꼴이다. 이때 비로소 스페인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본가와는 다른 독자적인 궤적을 걷기 시작한다.



제국의 무게와 개인의 소멸

말 위에서 생애 대부분을 보낸 이 통치자의 삶에서 개인의 의지는 읽히지 않는다. 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남긴 영토를 수호하기 위해 평생을 종교 전쟁과 반란 진압에 소모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는, 거대하게 부풀려진 영토의 파편들을 간신히 붙들고 있어야 했던 한 남자의 강박적인 고독이 투영되어 있다.

지도는 선으로 그어지지만, 그 선을 넘나드는 것은 결국 혈연과 상속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욕망이다. 카를 5세라는 존재는 그 욕망이 시대의 우연과 만났을 때 얼마나 거대하고도 기괴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증명하는 하나의 사료에 불과하다.





#생각번호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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