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의 성벽

우리가 믿는 가치는 누구의 야합인가

by 민진성 mola mola

과거의 평신도들이 '신의 뜻'이라는 깃발 아래 피를 흘렸다면, 현대의 우리는 '인권', '국가', '법'이라는 깃발 아래 모인다. 500년 전 교황과 국왕의 야합이 신의 이름을 빌렸듯, 오늘날의 거대한 시스템 역시 우리가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고결한 가치들을 내세운다. 여기서 우리는 멈춰 서게 된다. 내가 믿는 이 정의로운 가치들은 진정 인류의 진보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세련된 야합인가.



가치는 필요에 의해 발명된다

역설적이게도 인류의 위대한 가치들은 가장 혼란스럽고 추악한 이권 다툼 속에서 탄생했다.

법은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강자의 기득권을 질서 있게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시작되었다.

국가는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효율적인 세금 징수와 동원을 위해 영주들의 야합으로 공고해졌다. 가치는 하늘에서 떨어진 순수한 결정체가 아니라, 당시의 권력자들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지 않기 위해 합의한 '휴전 협정서'에 가깝다.



음모론과 역사의 재현 사이

어디까지가 음모론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알 수 없다는 질문자의 혼란은 타당하다. 모든 역사가 기득권의 치밀한 음모는 아닐지라도, 모든 가치가 권력의 작용 반작용 결과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모론은 특정 세력이 악의적으로 세상을 조종한다고 믿는 것이지만, 역사의 재현은 각자의 실리를 쫓는 무수한 욕망들이 얽혀 하나의 '거대한 흐름(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교황은 아들을 원했고, 국왕은 이혼을 원했다. 그 사소하고 추악한 욕망이 얽혀 이탈리아의 지도를 바꿨듯, 현대의 가치들도 누군가의 절실한 이해관계가 응축된 결과물이다.



'안타까운 평신도'가 되지 않는 법

우리가 역사를 배우며 느끼는 안타까움의 실체는 '무지'에 있다. 자신이 믿는 가치가 누구를 배불리고 있는지 모른 채 목숨을 던졌던 그들처럼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끊임없이 가치의 배후를 질문해야 한다. "이 이념이 승리했을 때, 누가 미소 짓는가? 이 법이 제정될 때, 누구의 불편함이 사라지는가?" 이 질문은 가치를 부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치에 매몰되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가 믿는 가치가 야합의 산물일지라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관리자는 더 이상 맹목적인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치를 믿는 이유

비록 인권과 법이 야합의 부산물이라 할지라도, 인류는 그 야합의 과정에서 조금씩 '덜 잔인한 방식'을 선택해왔다. 신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던 시대에서, 법의 이름으로 권력을 제한하는 시대로 넘어온 것은 분명한 진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치의 신성함이라는 환상은 버리되, 그 가치가 만들어낸 '질서의 효용'은 영리하게 이용해야 한다. 역사는 야합의 연속이지만, 그 야합의 결괏값이 조금이라도 다수에게 유리해지도록 감시하는 것, 그것이 현대라는 전쟁터에 나선 우리의 숙명이다.





#생각번호20260123

본 글은 RE:Mind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관련 기록과 개인 아카이브는 여기에서 이어집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12화성전(聖戰)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