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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초연 Dec 25. 2023

2023년의 소회

스물여섯을 마감하면서.

올해 나는 많은 걸 내려두었다. 도덕, 정의, 가치관, 절약. 어느새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시작은 올해 삼월 헤어짐과 가족의 사정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생은 무척 덧없고 감각이라는 고통을 수반하니, 어디서든 이 끈을 놓아버리고만 싶다.


출생과 더불어 얻게 되는 1인몫의 의무. 하필 생이 주어져서 욕구가 생기고 남과 비교를 통해 욕망이 피어난다. 이 조차도 참으로 형편없는 감각. 인간의 생로병사 4고를 제외하고, 나머지 4고의 것은 감각으로부터 발현되니, 얼마나 감각적인 삶을 증오할 수밖에 없는가.


모든 인간관계는 쇠사슬처럼 엮여져 나의 몸은 조여오는데, 여러 개의 큰 쇠사슬은 우리 가족의 것, 중간 사슬들은 내가 사정을 알아버린 주변 지인의 것, 얇게 칭칭 감겨있늗 사슬들은 한 번의 인연으로 만나 자취를 남기고 사라진 이들의 것.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켜 아침의 힘을 얻어가는 조촐한 나의 육체. 관념이 무너지더라도 조여 오는 저 힘 덕에, 매일을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게 참으로 초라하다.


이십 대 초반에는 이왕 생을 얻었으니, 낯 부끄럽지 않게 살겠다는 결의가 있었으나, 이젠 그 의미도 상실했다. 나에 대한 부끄러움은 감각에 대한 집착에서부터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저 사회적인 선과 악의 통념에 사로잡혀 또 하나의 사슬로 나를 감싸는 것. 사법적인 절차와 결론만 단정 지으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왜 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시험에 달려든 파우스트가 될 수 없는가? 누가 나를 정의했는가? 어차피 사회는 처제술에 능한 이만 살아남는 구도인데, 어떠한 기대를 더 할 수 있는가? 인간실격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둘도 없는 친구 또한 실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그 관계의 영속성으로 인해 죽음 따위에 대한 조사를 읽는 게 고작, 친구의 의미는 아닐까. 이처럼 모든 관계와 감각에 대해 무뎌지면 나는 이십 대의 후반에 조금은 더 힘을 내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길는지.


초라한 육체와 정의 없는 영혼의 합작이 이뤄진 이초연이라는  인간. 당면한 이십칠 세의 삶은 어떤 구도로 잡아나갈 것인가. 지금도 도덕관념에 대한 자기반성 따위로 이 글을 적고 있는가. 인간에서 실격당하면 어떠한가 일본 패전의 사소설 작가들처럼 삶을 마감하는 주체가 본인만 아니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이십육 세의 이초연, 올해도 살아주었구나.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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