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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헬 May 03. 2021

뚜벅뚜벅 같이 걷는 길

The Salt Path를 읽고

외서 출간 기획서를 쓰기로 하고 제일 어려웠던 건 기획서 쓸 책을 찾는 일이었다. 처음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시장이 크다는 자기계발서를 뒤졌는데, 시장이 큰 만큼 보는 눈도 많은지 괜찮다 싶은 책은 거짓말 안 하고 정말로 대부분 국내에 출간돼 있었다(초짜인 내 눈에는 괜찮은데 국내에 출간이 안 됐다면, 나는 당연히 내가 의심스러워서 기획서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론, 처음엔 나름의 '괜찮다'는 기준이 판매 순위와 리뷰 수였으므로 좀 더 분명한 '철학'이 있었다면 또 다른 책들이 눈에 들어왔을지 모르지만, 빨리 한 편이라도 써서 어디든 보내야겠단 생각에 마음이 급하니 나에게 자기계발서는 그저 넘사벽으로만 보였다.



좋다, 넘사벽 말고 내가 좋아하는 걸 찾자, 싶어 그 뒤로는 에세이와 회고록을 뒤졌다. 에세이와 회고록을 찾자니 어려운 점은 책이 아무리 좋아도 저자의 국내 인지도가 낮거나 없다면 어필할 점이 아주 분명하지 않은 이상 기획에 힘이 실리기 어렵다는 거였다. 하지만 안에 분명한 이야기가 있고 보편적인 정서가 들어간 책이 있기만 하다면, 어차피 한술에 배부를 리는 없으니 연습 삼아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찾은 두 권으로 첫 번째, 두 번째 기획서를 썼다.



그런데 역시. 내 눈에 띌 좋은 책을 나보다 더 눈 크게 뜨고 밤낮없이 책만 찾아온 사람들이 놓칠 리 없겠지. 알고 보니(출판사 관계자들이 알려주셨다) 두 권 다 이미 국내 어느 출판사에선가 시작한 책들이었다. 둘 다 너무 아쉬웠지만 어디 이런 일이 한두 번이랴. 그런 경우는 비일비재하다고 들었고, 앞으로도 무수히 겪을 일, 어쨌든 좋은 책들이니 좋은 번역가들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면 초짜치고 내 눈도 괜찮은 걸로 치자 위안을 삼았다.(사실 두 번째 책은 맨땅에 헤딩도 이런 헤딩이 어딨냐며 거들고 나선 남편이 찾아 준 책이지만, 기획서는 내가 썼으므로^^;;)



그러던 차, 두 번째 기획서를 썼던 The Salt Path가 얼마 전 쌤앤파커스에서 <소금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판권이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아쉬웠지만, 한글판으로 예쁘게 나온 걸 보니 내가 번역한 책도 아닌데 가슴이 왈랑왈랑(?)했다. 그리고 한 권을 오롯이 마쳐 주신, 일면식도 없는 역자 분께 마음으로 크게 박수를 보냈다.



이 책의 저자 레이너 윈(Raynor Winn)은 영국의 도보 여행가 겸 작가다. 하지만 이 두 타이틀은 전부 저자가 선택했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생긴 것들이다. 윈 부부는 웨일스의 버려진 농가를 고쳐 이십 년 동안 전원생활을 하다가 투자 실패로 전 재산을 잃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 모스가 희귀병 진단을 받고 치료제도 없이 진통제만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 된다. 압류 집행관들이 문을 두드리는 동안 계단 밑에 숨어 있던 부부는 어차피 이제 집도 없고 갈 데도 없는데 천 킬로미터 남짓 되는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패스'를 걷기로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용감하고, 심지어 낭만적이기까지 한 결정과 달리 이 여정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서사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를 벗어난다. 순수한 자연 예찬과 낭만적인 자아 성찰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모든 것을 잃은 부부의 감정과 상황이 당황스러울 만큼 솔직하게 묘사된다. 상대적으로, 이들의 상황과 관계없이 흘러가는 날씨와 계절의 변화가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나약한 면면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부부는 그대로의 삶에서 의미를 찾고 자유를 느끼며, 자연 속에서 치유를 경험한다.



또한, 삶이 궁지에 몰리는 상황에서도 부부는 농담을 던질 줄 안다. 곳곳에 뿌려진 유머러스한 상상과 대화는 절대 유쾌할 수 없는 상황을 반전시키기도 하고 웃지 않으면 넘길 수 없는 짠 내 나는 순간에 서로를 다독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밤이 되어 텐트에서 잠을 청하는데, 아내 레이너가 독립한 아이들을 생각하며 집도 절도 없는 부모가 돼 버린 상황을 비관하는 장면이 있다. 안타까운 장면인데, 부부의 대화가 너무 재밌다.

(한글 책은 아직 못 읽었으므로 영문을 대충 옮기자면)



"But not this, not the biggest thing, not about what effect it could have on us all. It's as if it's too painful to even go there; the elephant in the room. None of us can say it." I turned over to face Moth in the darkenss of the tent. "Do you think what's happening to us, our family, will damage them? I can't stand the thought that it's going to cause them lasting scars."

"They don't talk to you about it because it's you that has the problem, not them. They talk to me. We've talked frankly about it all. It's going to be hard, it is hard, but they're strong. It's chaning us all, and if you just try to face it, then maybe we call all cope. There is no elephant. Can't be, we haven't got room."

"Firaffe, in the tent then."

"Ray, just go to sleep."

"그런데 이 말은 못 했어, 이게 제일 큰일인데 이 일로 우리가 다 어떻게 될지는 얘길 못했어. 거기까지 가는 건 너무 괴로웠거든. 거실에 코끼리가 있는데 우린 아무도 입을 못 떼고 있어.” 텐트 어두운 구석 쪽으로 모스를 돌아봤다. “이 일로 애들이 힘들어하면 어쩌지? 애들한테 못 지울 상처가 되면? 그런 건 생각도 하기 싫은데.”

“당신이 그렇게 힘들어하니 애들은 당신한테 말 안해. 나한테 하지. 우리 다 솔직하게 이야기했어. 어렵겠지, 어려워. 하지만 우리 애들 약하지 않아. 이제 우린 다 달라졌어. 당신이 피하지 않으려고 애써 주면 우리도 다 견딜 거야. 그리고 코끼리는 무슨, 거실도 없는데.”

“그럼 텐트 속 기린이라고 하든지.”

“여보, 잠이나 자.”



중년 이후 삶에 대한 메시지들도 좋았다. 돈도 명예도 젊음도 건강도 아니라면, 무엇을 구심점으로 살아가야 할까. 그런 것들이 아니라도 방향을 잃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까. 책에서 이렇다 하고 답을 주는 건 아니지만, 내가 내린 나름의 결론은 "관계"이다. 부부가 오롯이 서로의 존재만 믿고 하루하루를 걸어가는 길,이 물론 다 아름답지는 않지만 불완전한 대로 완전한 그 관계가 내 눈에는 참 따뜻해 보였다. 단맛보다 좋은 단짠맛이랄까. 그런 관계 또는 삶에 대한 성찰이 묘하게 드러난 부분이 있다. 행인이 부부에게 해안가에서 자라는 블랙베리를 건네며 거기서만 맛볼 수 있는 단짠 맛 블랙베리를 묘사하는 장면이다.



"You thought blackberries had passed, didn't you? Or you've eaten them and thought you didn't like the. No you need to wait until the last moment, that moment between perfect and spoiled. The blackbirds know that moment. And if the mist comes right then, laying the salt air gently on the fruit, you have something that money can't buy and chefs can't creat. A perfect, lightly salted blackberry. You can't make them; it has to come with time and nature. They're a gift, when you think summer's over, and the good stuff has all gone. They're a gift."

“블랙베리는 철이 지났다고 생각하셨죠? 전에 먹어 보셨다면 별맛 없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아니랍니다, 블랙베리는 마지막 순간을 기다려야 해요. 농익은 시점과 물러질 시점의 중간쯤이죠. 찌르레기는 그 시점을 기가 막히게 알아요. 그 무렵 엷은 안개가 내리면 블랙베리에 소금기 밴 공기가 앉아요. 돈으로는 살 수 없고 요리사도 흉내 못 내죠. 은은한 소금 맛 완벽한 블랙베리를요. 사람은 못 만들어요, 시간과 자연이 하는 일이죠. 여름이 끝났다 싶을 때,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다 싶을 때 생기는 선물 같은 거랍니다.”



남편과 매일 밤길 산책을 한 지 2년쯤 된 것 같다. 한 번에 한 시간 조금 못 되게, 슬슬 4킬로미터 정도를 2년 걸었으니 우리가 걸어온 길도 2천 킬로미터는 될 것 같다. 대문만 나서면 방언 터지듯 쉴 새 없이 말을 하는 날도 있지만,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하는 날도 있다. 단짠의 연속인 날들을 함께 살아 주는, 같이 있어도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사람이 옆에 있어 좋다. The Salt Path를 읽으며, 나의 소금길을 함께 걷고 있는 그에게 참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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