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아 Oct 22. 2020

학원이 무서워요

학원을 극도로 거부하던 아이

 학생 시절의 나는 참 학원 보내기 힘든 아이였다. 주변 친구들 다 학원을 몇 개씩 다니는데, 나는 하나조차 적응하지 못하고 안 가겠다며 떼를 썼다. 등원 직전 학원을 그만두겠다고 울며 버티다 엄마와 대판 싸우고 끊은 학원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영어 성적이 떨어지면서 한 달만, 딱 한 달만이라도 다녀보자 하고 등록했던 곳은 2~3주를 채 다 가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나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스트레스였다. 나도 내가 왜 그런지 몰라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냥 학원이 가기 싫었다기엔 거부반응이 너무 컸다. 정말 끔찍이도 싫었다. 뭐가 그렇게 싫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어느 날 나는 과거에서 정답을 찾았다.


 때는 초등학교 4~5학년. 내 인생 첫 영어 학원에 다닐 때였다. 피아노, 미술 같은 예체능 학원을 제외하고, 공부를 하는 학원은 처음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따돌림을 당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 계속해서 영향을 줄, 아주 큰 트라우마를 안겨줄 사건이었다.


 당시 우리 반에 내가 유일한 한 학년 아래라는 건 나의 자랑이었다. 우리 반엔 여자아이들 밖에 없었는데, 나를 제외하고 모든 학생이 다 나보다 한 살 많은 언니들이었다. 처음엔 내가 그만큼 영어를 잘한다는 의미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시작은 무난했다. 언니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재미있게 학원에 다녔다. 문제는, 우리 반에 한 언니가 새로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기존에 우리 반에 있던 언니들과 친한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음 온 날, 가장 먼저 교실에 도착한 내가 칠판이 정면으로 잘 보이는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는데 언니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새로 온 친구랑 같이 앉을 거니 자리를 비켜 달랜다. 솔직히 싫었다. 기껏 앉아있는데 일어나기도, 짐을 다시 옮기기도 귀찮았다. 그래서 거절했다. 결코, 무례하거나 싸가지 없이 답하진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당시 나는 정말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으니 기껏해야 눈치보며 고개를 젓는 게 전부였다. 게다가 그 언니들도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나와 별로 친한 언니들도 아니었다. 당시 나에게는 그 무리의 태도가 다소 강압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새로 온 그 언니는 처음 본 나에게 굉장히 당당하게 자리를 비켜줄 것을 요구했다. 한두 차례 더 요구했으나, 나는 끝내 거절했다. 그 시간부터 지옥이 시작됐다.


 결국 남는 자리에 나눠 앉은 언니들은 그날 수업 시간 내내 나를 노려봤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건가, 두렵고 억울했다. 지금은 많은 시간이 지났기에 모든 걸 선명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날 새로 들어온 언니, 그 언니의 눈빛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른다.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삐딱하게 앉아, 정말 나를 죽일 듯이 째려봤다. 무서웠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나, 조금 충격도 받았던 것 같다. 많아 봐야 초등학생인데, 지금 그때를 떠올려도 그 눈빛이 나를 뚫어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에 온몸이 떨린다.


 그날 이후로 학원에 가는 시간은 고통으로 변했다. 언니들은 내가 뭘 하든 아니꼽게 바라봤으며, 나를 마치 벌레 보듯 대했다. 내가 앉아있는 분단은 일부러 피해 앉고, 자신들 근처에 내가 앉으면 수군대며 일어나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때문에 앞, 뒤, 좌, 우는 예사고, 내가 앉아있는 분단 전체가 항상 텅텅 비어 있었다. 본인들끼리 옆 분단에 모여 앉아 떠들고, 웃고, 놀고, 수업을 들었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어느 날, 그런 나를 안쓰럽게 여긴 한 선생님께서 왜 다 같이 앉지 않고 자리를 피해 앉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언니들은 발끈하며 반발했다. 그때 필사적으로 귀를 닫으려고 했기 때문에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건 내 욕이었다. 쌤, 쟤는 ~~하단 말이에요. 한 언니는 내가 자신에게 손가락 욕설을 했다며 울분을 토했다. 욕설. 아까도 말했다시피 당시 나는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 지금도 나는 친구들이 입에 달고 살곤 하는 심한 욕설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다. 중학생 즈음 손가락 욕설과 비속어를 겨우 쓰기 시작했는데, 당시 친구에게도 비속어 한번 쓰지 못했는데, 내가 언니들에게 욕설을 했다니. 억울했다. 그동안 따돌림을 당했지만, 이렇게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을 직접 듣는 건 처음이었다. 아팠다. 눈물이 났다. 하지만 울기는 싫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이를 꽉 물고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는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셨다. 울고 싶었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와 잠자리에 들면 혼자 소리죽여 울었다. 한동안 자주 그랬던 것 같다. 원체 내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고 담아두는 성격이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가족들이 들을까 봐, 침대에 누워 숨죽이고 눈물만 흘리다 잠들었다. 소리 내지 않고 우는 게 습관이 된 게 그때부터였다. 그때 나는 기껏해야 겨우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견뎠다. 바보같이, 그때 난 그게 왕따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후엔 구체적인 기억이 없다. 그저 매일 혼자 시간을 보냈고, 울다 잠들었고, 그게 반복이었다는 것이 전부. 결국 난 끝까지 버텨냈다. 시간이 지나자 그 언니들이 먼저 학원을 그만두었다. 여러 명의 무리에서 한두 명만이 남자,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갑자기 얌전해졌다. 그러다 나도 학년이 올라가며 학원을 그만두었다.


 싱겁게 끝난 것 같은가. 정말 끝인가. 아니, 적어도 나에겐 끝이 아니었다. 아마 지금도, 평생 끝나지 않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한두 살 많은 언니들에 트라우마가 생겼고, 학교에서 그 나이대 여학생들을 보면 긴장하고 두려워했다. 나도 언니가 갖고 싶다고, 나는 왜 언니가 없냐고 고집부리고 울기도 하던 내가, 엄마께 나는 언니가 없어서 참 다행이라고, 언니가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고 말하기 시작한 건 그맘때쯤이었던 것 같다.


 그게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학원 가기가 어려워진 건. 학원엔 내 또래의 여학생들이 있고, 새로운 학원에 가면 나는 또 혼자 수업을 들어야 한다.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웠던 것이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도대체 학원 갈 때마다 왜 이러니, 넌. 나와 싸우며 함께 스트레스에 시달린 부모님의 물음에 난 결국 답하지 못했다. 너무너무 죄송한데, 말할 수가 없었다. 엄마 아빠, 나 학원에서 따돌림을 당했어. 그래서 너무 힘들어, 두려워. 학원이, 사람들이. 그냥 내 마음속에 묻어두었다. 아직도 부모님은 모른다. 털어놓지 못했다.


  중학교에 가서, 그 언니들을 다시 마주쳤다. 우리 동네엔 중학교가 하나밖에 없어서, 선택사항이 없었다. 그렇게 학원을 끊은 지 2년, 언니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1년. 다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끝이 아니었다. 아, 끝날 수 없겠구나. 나는 평생 이걸 지고 살아가겠구나. 중학생이 되어 다시 본 언니들은 잘 지내고 있었다. 나는 먼발치에서도 알아보고 애써 눈을 돌렸는데. 모른 척했는데. 나를 기억도 못 하는 눈치였다.


 급식소에 갈 때도, 운동장 앞에서도, 축제 때도. 우연히 그 언니들을 발견하면 떨렸다.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날 째려볼 것만 같았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서도 허탈했다. 아무도 모른다. 저 언니들과 함께 떠드는 친구도 모를 것이고, 선생님도 모르실 거고, 심지어 본인들도 다 잊은 것만 같다. 이 많은 사람들 중에 나만 알고, 나만 기억한다.


 중학교를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천만에. 사람 인연이라는 게 이렇게도 우스운지, 고등학교에 가서 난 또 마주쳤다. 고등학교 예비소집일 첫날. 같은 반에 배정된 친구들과 우리 반 멘토가 될 선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정말이지, 그 순간이 아직도 슬로우모션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드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방글방글 웃으며 들어온 선배. 학원에 새로 왔던, 초면인 나를 힘껏 노려봤던, 째지는 목소리로 내 험담을 했던,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그 언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있을까. 열 개의 반 중에, 수많은 선배 중에, 수많은 신입생 중에. 하필, 우리 반에, 내가, 그리고 저 언니가 멘토라니. 놀라기도 잠시, 너무나 허무했다. 신입생들의 멘토로 뽑혔다는 건, 저 언니가 성적순으로 뽑는 학교 심화반 소속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공부도 잘하고, 대학도 잘 가겠구나. 근데 그래도 되나? 그러면 안되잖아. 원망스러웠다. 솔직히, 잘 안되길 바랐다. 실패했으면, 입시든 뭐든.


 내가 너무 억울했던 건 그거였다. 그 언니는 완벽한 학생이었다. 얼굴도 예뻤고, 당차고, 자신 있고, 밝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 그게, 그게 너무 좌절스러웠다. 아, 저 언니는 앞으로도 잘 살겠구나. 대학도 잘 가고, 취직도 잘하고, 사람들 사랑받으면서. 나는 본인 때문에 너무나 고통받았는데. 그날 멘토로서 교탁에서 학교 소개를 하는 언니와 눈이 마주칠까 봐 전전긍긍했다. 질문을 받기 위해 신입생들을 훑어보는 눈을 피하려고 애썼다. 두려웠다.


 지금은 어떻게 됐냐고? 그 언니가 졸업하기 전 내가 학교를 그만뒀으니 이후 소식은 알 길이 없다가, 최근 우연히 SNS 프로필을 발견했다. 궁금하더라. 어느 대학을 갔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뭐, 예상대로였다. 좋은 대학을 갔고, 잘 살고 있더라. 원망스러울 정도로 예쁘고 밝더라. 비로소 깨달았다. 가해자가 더 잘 산다는 말의 의미를. 이젠 화나지도 않았다.


 다들 기억도 못 하겠지. 그때의 일은커녕 나의 존재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본인들의 얼굴, 목소리, 학교, 심지어 학원에서 쓰던 영어 이름까지 똑똑히 기억하는데. 내 가슴에만 남았다. 나만 기억한다. 나는 어쩌면 평생 극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 떠올려도 내겐 여전히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내가 어떤 피해를 입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할 만큼 어렸고, 연약한 심장에는 상처가 더 깊이 박혔다. 낯을 많이 가렸던 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됐고, 그래서 피하게 됐고, 나중의 일이지만 결국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지금 와서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쓴 건, 그냥 한번 털어놓고 싶었다.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나의 트라우마도 이 글과 함께 여기 넣어두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외면했던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