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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씐놔는 다연하지 May 20. 2024

예민한 사람이 살아가는 법 - 여행

집순이가 떠난 여행에서 만난 태풍

대학교 개강 전날밤 친구랑 연락을 주고받다가 여행 가고 싶다는 얘기가 나왔다. 아르바이트만 하다가 1학년을 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는 강원도에 바다를 보러 가기로 결정했다. 바로 내일!!!!! 같이 가기로 한 친구는 8명이서 함께 몰려다니던 대학교 동기 중 한 명이었다. 계획이 틀어질 수 있으니 다른 친구들한테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너무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강원도에 태풍 피해 특보가 뜬 것이다.

학교에서 다른 동기들과는 강원도에 대해 얘기를 나눴지만 여행 가기로 한 친구와 나는 서로 여행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하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거나 다음에 가자고 말할 용기는 없었던 것 같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갔다가 가방을 가볍게 하고 친구와 고속터미널에서 오후 9시-10시경에 만났다.

강원도로 가는 가장 늦은 티켓을 예매하고 고속버스를 타고 강원도로 향했다.

비행기 좌석보다 넓고 쾌적했던 심야 고속버스에는 친구와 나뿐이었다.


새벽 3시경 드디어 강원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행복해하던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던 것은...

고요한 적막과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막차라서 고속버스터미널도 끝나서 어두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터미널을 나와서 계속 걸어가는 와중에도 도시 전체가 불을 끈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기사에서 사상최대 태풍 피해라고 나오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도로는 유실되었고 가로등이며 하다못해 신호등까지 등이란 등은 다 꺼져있었다.

달빛에 의지해 걷는다는 말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인 데다가 바람도 불지 않아 현실감이 없는 밤이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의 고통을 도시 전체가 고요하고 컴컴한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다.


친구와 내가 걸어가던 길에 어두운 구멍가게 같은 가게가 문이 열려 있었다.

그곳 사장님은 물 빠진 가게를 정리하는 중이었고 우리에게 바다로 가는 길을 알려주셨다.

가는 길에 쓰러진 전봇대도 보았고 도로가 꺼진 곳에 생긴 물웅덩이도 보았다.


1시간쯤 걸어가던 길에 뒤에서 차 한 대가 섰다. 차에 탄 부부는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며 태워다 주시겠다고 했지만 지금까지 걸었던 노력에 누구의 도움을 더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감사하는 말로 거절하며 바다로 향했다.

한참을 더 걸어가던 길에 달빛에 반짝이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물을 보고 우리는 "바다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 기뻐서 계속 보며 가까이 가고 있는데 바다방향이 아니라 우리의 길 옆에서 반짝인다는 것을 알았다.

태풍으로 인해 끝없이 물에 잠긴 논을 보고 우리는 바다인 줄로 착각한 것이었다.


또 한참을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친구와 나는 말이 없었고 지쳤다기보다는 졸렸던 것 같다.

그때 코 끝에 바다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조금씩 날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3시간 만에 바다에 도착했다.

우리는 바다에서 해 뜨는 것을 보려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날이 흐려서 날이 밝은 후에도 해가 보이지 않았다.


경험이 없던 우리는 봉사활동을 하러 오신 분들의 얘기를 듣고서야 날이 흐리면 동해에 와도 해가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분들은 친구와 나에게 어떻게 여기에 왔냐고 하시며 재난민분들을 도우러 같이 가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친구와 나는 함께 가겠다고 하고 따라나섰다. 봉사활동 하러 간 집의 대문부터 집 안 창문까지 다 진흙으로 뒤덮인 것을 보았다.

창문을 닦다가 서서 조는 나를 보고 친구와 선교사님들은 웃으셨고 덕분에 우리는 피곤하지만 즐겁게 청소를 할 수 있었다.

청소가 끝나고 선교사님이 밥을 사주셔서 친구와 함께 밥을 먹고 돌아온 고속터미널은 화장실에 수도가 되지 않는 상태였고 우리는 불편한 기색도 없었고 불평하지 않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런 경험을 불평 없이 같이 해준 친구에게 고마웠다. 다행히도 그 이후로 그 친구는 나를 여행 같이 가기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평소의 나는 집을 너무 좋아하는 집순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경험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경험은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획에 없던 곳을 간다거나 매일 하던 루틴을 깨고 어딘가를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나의 성향을 아는 엄마는 스스로 벽을 깨 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을 느끼셨던 것인지 기꺼이 다녀오라고 하셨다.

별거 아닐 수도 있는 이 짧은 친구와의 여행은 앞으로 있을 나의 많은 여행에 앞서 스스로를 시험해 보는 엄청나게 큰 모험이자 경험이었다.

새롭고 불완전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느끼고 생각할지 나에 대해 알고 싶어 시도했던 도전이었고


도전하고 싶은 나와 안전하고 싶은 나 사이에서

또 다른 나만의 싹을 만들 수 있었던 가치 있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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