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사람들과의 와인, 글 그리고 이야기
나른한 햇살이 내리는 주말 오후였다. '소셜링'이라는 이름으로 글 쓰는 모임에 망설임 없이 참가신청을 한 게 발단이었고. 활짝 열린 문을 지나 바깥보다 환한 공간으로 들어선 순간, 처음 보는 이들의 낯선 눈길을 받았을 때는 '취소할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마침 회식 다음날이라 피곤했는데 '역시 집에서 쉴 걸' 하는 확신의 절망.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건 마냥 즐겁다고 여겨왔는데 덜컥 겁이 났다. 단순히 앞에 서는 게 두려웠다기보다는 실수하면 어떡하지, 떨리는 마음에 잔뜩 횡설수설 늘어놓기만 하면 어떡하지 하는. 나를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깃털 같은 마음은 늘 가볍게 뒤집히는 법. 적막한 시간이 조금 지나고 대화를 시작하면서 후회하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그라들었다. 외려 나오기를 잘했다는 뿌듯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렇게 약 5시간을 보낸 총평은, 다양한 분야의 새로운 사람들과 단 하나의 공통점으로 만난다는 게 이리도 짜릿한 일인 걸 이제야 알았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정도. '다양한 분야', '새로운 사람', '단 하나의 공통점'. 세 가지 특성이 준 감상이 각각 달랐고, 그것들이 공존했기에 주말 하루를 참 보람차게 보냈다는 결론에 닿았다.
먼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
전혀 다른 분야와 삶을 사는 이들과 마주하니 식상한 주제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는 일이 모두 다르니까 공부니, 자기 계발이니 하는 이야기에서 멀어져 인생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평소 일반적인 대화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는 이런 대사가 있었다.
"나 하고 싶은 말은 못 했어.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 말고 쉬는 말이 하고 싶어.
대환데, 말인데, 쉬는 것 같은 말."
일상 속에서 말은 정말 많이 한다. 점심시간에 회사 동기와도, 쉬는 날 만나는 친구와도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해야 하는 말이 아니라 하고 싶었던, 쉬는 것 같은 말을 나눌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내 존재를 떠드는 말 말고, 정말 나를 쉬게 하는 대화 말이다.
더불어 잘 몰랐던 분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직업을 소개하는 자리는 아니었으므로 얕은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보다 그 자리에서 집중했던 건, 각자가 하는 일을 대하는 태도였다.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지금까지는 딱 두 분류로 구분할 수 있었다. 정말 일에 열의가 넘치는 (속된 말로 일에 미쳐 있는) 사람과 '일은 일일뿐!'이라 하더라도 자기 계발에 언제나 몰두하는 사람. 따지고 보면 다른 분류도 아니다. 똑같이 일에 매달리고 공부하는데 그게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냐,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냐의 차이일 뿐. 그렇다 보니 공부보다는 글을 쓰고 자유와 낭만을 좇는 나는 그저 한량, 문제아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단순히 업계가 다르기 때문은 아닐 테지만, 이날 모인 사람들은 달랐다. 본업에 진심으로 몰입하는 이도 있었고, 일과 꿈의 경계에서 적당한 타협점을 찾은 이도 있었다. 본인의 꿈과 연계해 직업에서 자아를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적당한 현실에 안주하며 직업 밖에서 자아를 찾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어디쯤일까. 표류하는 느낌은 여전했지만, 내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이만 접어도 될 것 같았다. 직업을 '생계의 수단'으로만 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누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은은 '새로운 사람'.
모임 소개글에서 가장 끌렸던 포인트이기도 한 안내는 < 친구들과 이야기하기엔 오글거리는 내용을 터놓을 수 있다 > 였다. 익숙한 공간이나 친숙한 주변인에게는 늘 흉터가 있는 법이라서. 새로운 사람들, 심지어는 이 자리가 끝나면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는 그런 관계에 있는 동안은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터놓을 수 있다는 게 참 안락했다.
물론 처음부터 청산유수 떠든 건 아니었다. 앞장서기를 좋아하고, 듣는 것보다 말하는 데에 익숙하지만 꽤 오랜만에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발화는 긴장되는 일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묻으려 와인을 들이켰다. 와인이 제 기능을 해준 건지, 그 긴장마저 즐기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것 자체에 전율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단 하나의 공통점'.
초면인 이 모임에서는 '글을 쓴다'는 게 유일하게 닮은 점이었다. 자리하고 있는 이들 중 책을 출판한 작가는 한 사람도 없었지만, 글을 쓰기에 우리 모두 작가라는 것. 어느 구절에 나오지 않던가. 시인은 아니지만, 시를 쓰기에 시인이라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특히 자기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은 대게 따뜻하다. 본인의 이야기를 꺼내놓을 줄 아는 만큼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할 줄 안다. 잔뜩 끄집어내어 글을 쓰는 데에 익숙하니까, 깊이를 아는 만큼 공감의 기술도 유려하다. 그런 것들이 처음 보는 사이에서도 유대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번 모임을 가지면서 에세이를 찾아 읽는 이유가 선명해졌다. '이렇게 하면 행복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우울할 땐 이렇게 해 보세요!'라고 말하는 글에 반감이 들었던 이유나, '저는 이러니까 행복하더라고요. 그냥, 그렇더라고요.' 하는 글을 더 찾아 읽게 되었던 이유도.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듣고 영감을 얻은 만큼, 나와 닮은 걱정을 안고 사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땐 듣는 것만으로 따스한 위로가 되었다. '내가 힘든 만큼 너도 힘들어서 다행이다'하는 못난 마음이 아니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마음속 구렁텅이를 공감할 사람이 있다는 동지애의 일종이랄까.
내가 지난날을 걱정하고, 과연 해낼 수 있을 것인가 고민했던 시간이 무의미할 정도로 '충분히 잘 해낼 것 같은데?' 하는 응원도 얻었다. 단순하게 내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되더라. 현실과 꿈 사이에서 무겁게 고민하던 것도, 지금 이 순간 내겐 사치라고만 여겨져 망설였던 그늘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새로운 일을 벌이고 기꺼이 해낼 추진력이 솟았다.
함께 자리했던 T님의 건배사 속 "우리는 추억을 먹고 사니까, 지금 이 순간의 우리를 위하여"라는 말이 마음에 깊게 남았다. 건배사의 여운이 짙었던 건, 따뜻하게 간직할 추억의 찰나를 함께 만든 이들에 대한 감사함 덕분일 테다.
'오늘 우리의 만남도, 글이 될까요?'라는 질문을 하셨지요. 네, 이렇게 글이 되었습니다. 말씀드렸던 것처럼 제 필명을 공개하지 않아도, 우연히 제 글과 마주친다면 글 쓴 사람이 저라는 사실을 떠올리셨겠죠. 이미 짤막한 후기를 작성해 공유하긴 했으나, 그 후기로만 담아두기엔 느낀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짧은 후기를 그저 길게 늘인 것 같아 보일 수 있지만, 그날의 온도와 감사히 받아 온 마음들을 담아두고 싶어 모두 잠든 새벽에 고스란히 기억을 적어내렸습니다. 이 글을 말미암아 그날 모임이 당신에게도 따스함으로 기억되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