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는 2017년에 출시된 게임이지만 나는 얼마 전에야 엔딩을 봤다. 출시 당시 거의 200개 가까운 GOTY를 휩쓸었는데 개인적으로 여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근 3년간 했던 게임 중에서도 최악이다. 어떻게 이런 게임이 갓겜으로 찬양받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젤다의 전설 웅앵웅 시리즈는 닌텐도가 제작하는 비디오게임 콘솔의 대표 타이틀이다. 포켓몬스터를 하려면 닌텐도 ds나 3ds나 스위치를 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슈퍼마리오, 별의커비, 젤다의전설은 닌텐도만 보유하고 있는 단독 시리즈다.
게임이 발상 자체가 좀 독특한데 일반적인 rpg나 시뮬레이션보다는 퍼즐에 가깝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해지고 소재를 마구 모아서 무기나 방어구를 업그레이드 하는 플레이가 아니다. 맵에 있는 요소들을 활용해서 적을 해치우고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시나리오도 타이틀마다 그다지 개연성 있게 이어지지는 않아서 굳이 뭘 먼저 해야 할지 신경쓸 필요가 없다. 주인공인 링크는 대개 마왕을 물리치는 용사로써 활약하고, 그런 링크에게 이런저런 가이드를 해 주는게 공주 '젤다'다. 그래서 젤다의 전설이다. 주인공이 젤다가 아니다.
왼 젤다 오 링크
출시될 때마다 역대급 평점을 받으며 인기를 모으는 시리즈라고는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까지 인기를 못 끌었다. 개인적으로도 몇 번 해봤는데 퍼즐 푸는 걸 좀 귀찮아하는 나 같은 유저라면 별 재미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현재 닌텐도의 가장 최신형 콘솔인 스위치 버전으로 나온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는 역대급 of 역대급 이라는 평을 받으며 빵 터졌다. 이전 시리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맵이 넓다, 자유도가 무한하다, 그래픽이 혁신적이다, 플레이 방식이 신박하다는 둥 호평을 받았는데 내 생각에는 지금까지 나온 젤다 시리즈의 특징에 기존 게임의 방식을 섞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아졌을 뿐인 것 같다.
일단 그래픽이 좋아졌다고는 하는데 지금이 2020년인 걸 생각하면 이전 시리즈에 비해 좋아진 건 당연한 거고, 솔직히 말하면 요즘 흔한 인디게임 수준의 디자인이다. 필드에 등장하는 몬스터도 드래곤퀘스트처럼 몇 종류가 색깔만 바꿔서 등장하는데 그것도 드퀘보다 숫자가 적다.
몬스터 다 그냥 이렇게 생김
원래 젤다 시리즈가 몬스터를 막 죽인다고 해서 렙업하거나 그런 게 아니니까 이건 그렇다고 치자. 그 다음은 게임 볼륨인데, 확실히 할 게 많긴 하다. 주변 사물을 활용한 퍼즐 풀이+새롭게 대폭 추가된 오픈월드 요소로 인해 자유도가 꽤 높아졌다. 맵 크기가 꽤 되는데 끝에서 끝까지 걷기만 해도 재밌다.구획별로 몬스터 편차가 있긴 한데 심한 편이 아니라서 적당히 도망치면 된다. 기분 내키는 대로 절벽을 오르거나 서브 퀘스트를 해결하거나 빠른 이동을 가능하게 해주는 워프 존만 다녀도 된다.
**스포 무지 주의**
메인 줄거리는 100년 전 '하이랄 왕국'을 멸망하게 한 마왕 '가논'을 하이랄 왕국의 공주 '젤다'의 요청에 따라 100년 전 고대 영웅 네 명의 후손들의 도움을 받아 물리치는 거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식상한 전개다. 보스 전에 사천왕 만나기는 취업 준비 전 토익 스터디 하듯 국룰이 돼 있으니까 일단 그렇다 치자.
주인공 '링크'는 100년 전 젤다 및 고대 영웅 네 명과 함께 가논을 물리치려다 실패했다. 나머지는 죽었지만 젤다가 공주의 힘으로 링크를 100년간 잠들게 한 뒤 깨워서 다시 싸우라고 하는 건데, 게임을 전개하다 보면 흐릿했던 링크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기억 속에서 젤다는 자신이 신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로 계속 괴로워한다. 하이랄 왕족으로써 가논에 대항하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힘을 부여받아야 하는데 그게 없는 거다. 대신 주인공 링크가 퇴마의 검을 통해 선택을 받은 인물이라는 게 입증되고 젤다는 여기에 대해 열등감과 슬픔 등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100년 전의 고대 영웅들과 젤다, 링크
이런 설정이면 젤다 공주의 감정 변화가 중요하게 다뤄질 것으로 예상하는 게 보통이다.
젤다가 현타를 맞고 마왕을 물리치는 걸 포기했다가 다시 일어서든, 신의 선택을 받은 링크와 맞먹을 만한 힘을 갖든, 젤다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든 나름의 반전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어이없게도, 링크가 최종 보스인 가논을 물리치고 나면 젤다는 짜잔 하고 등장해서 '니가 잘 해낼 줄 알았다'하고 웃는다. 그리고 나서 게임이 끝난다.
공주 젤다가 끝에가서 하는말은 이게 다임
분명 제목은 젤다의 전설이고, 자신의 왕국을 구해야 겠다는 사명감으로 가득 찼던 젤다인데 링크한테 그냥 고맙다고 하고 끝이다. 그것 때문에 목숨까지 바쳤는데... 과거 회상 장면에서 반복해서 보여줬던 젤다의 감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에 트라이포스의 힘이 개방되기는 하는데 이것도 사이가 좋아진 링크를 지키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거다. 즉 링크가 아니었으면 젤다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본인의 감정과 고민조차도 링크가 없으면 변화되지 않는 인물로 묘사되는 것이다.
게임 내내 젤다는 그냥 링크의 보조도구 수준으로 이용당하다 끝난다. 링크의 활약을 돕고, 링크의 감정에 공감해 주고, 100년동안 쳐 자서 치매가 온 링크의 기억을 되살려 준다. 선택받지 못한 젤다가 느낀 열등감에 대해서는 누구도 해답을 주지 않는다. 젤다가 '저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에요'라고 하긴 하는데 그 일이라는게 뭔지 모르겠다. 젤다의 전설에서 젤다가 한 일은 링크에게 고대 영웅들을 만나라고 한 것, 가논의 힘을 억누르다가 링크가 가논의 힘을 어느 정도 깎자 마지막에 전투를 도운 것 정도다.
이걸 두고 백번 양보해서 젤다와 링크가 함께 힘을 합쳐 싸운 거라고 휘갑칠 수도 있겠지만 내 입장에서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링크가 더 돋보일 수 있도록 젤다가 도와줬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진짜 젤다가 링크와 함께 가논을 물리치는 설정으로 하고 싶었다면 왜 하이랄 왕국의 후손인 젤다가 선택을 받지 않고 뜬금없이 링크여야 했냐는 답이 있어야 하는데 제작사에서 그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언급이 되지 않는다.
열과 성의를 다해 이쁘게 그려놓고 주인공 활약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 마구 쓰다가 여신인 척 대접해주는 여캐에 소비자들이 이미 질렸다는 걸 모르는 듯하다.
이것만으로도 게임의 평가를 50%는 깎아내리는데, 결정타를 먹인 것은 고대 영웅 가운데 한 명인 '우르보사'가 소속된 '겔드족'의 설정이다.
앞에서도 말했듯 고대 영웅은 총 네 명이며 각기 다른 부족이라는 설정이다. 우르보사가 이끄는 겔드족의 설정이 환장대잔치다.
겔드족은 여성들로만 이뤄진 부족이다. 일정 연령이 되면 짝을 찾아 다른 나라로 떠난다. (그럴 거면 굳이 여자끼리 살 필요가 없지 않나...?) 그래서 그전까지 자신의 짝 즉 남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낮에는 요리 수업을 듣고 밤에는 연애 수업을 듣는다. 조선시대에도 귀족 여성들은 글 쓰고 활 쏘는 법을 배웠고 하녀들은 농사일을 했는데 일본은 도대체 저런 설정을 어디서 가져오는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분명 고대 영웅을 배출한 용감한 부족인데, 군사훈련은 천쪼가리 하나 걸치고 한다. 다른 부족과는 다르게 겔드족 마을에서 살 수 있는 복장은 굳이굳이 하늘하늘한 옷으로 만들어 놓는다.
사막에서 저런 옷 입으면 타 죽는다. 부연설명에도 '방어의 기능은 거의 없다'고 해 놨다. 방어기능이 없는 옷 입는 전투종족은 처음 본다. 여캐=노출도의 공식을 어지간히 깨기 싫었나 보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겔드족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이름이다. 무려 고대 영웅의 후손, 100년 전 세계를 구하려다가 명예롭게 목숨을 잃었다는 설정인 겔드족의 족장 이름은 '루쥬'다.
루쥬
그리고 족장을 지키는 호위무사의 이름은 '뷰러'다.
군사훈련을 시키고 있는 훈련대장인지 뭔지 여튼 대장의 이름은 '치크'다.
루주, 뷰러, 치크... 죄다 메이크업 용품 이름이다. 여자들만 이뤄진 부족이라고 이름을 화장품으로 지었다. 일본어나 영어로는 다르게 읽는지, 우연의 일치인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난 아니라고 본다. 명백히 란제리의 줄임말로 보이는 '란제'도 있고, '리무버' '소프' 까지 있으면 말 다 했다.
별 의미 없는 이름이라는 반박은 설득력이 없다. 주인공의 이름인 '링크'부터가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젤다의 전설 자체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닌텐도의 대표 타이틀인데, 주인공 및 주요 등장인물의 캐릭터 설정을 그냥 랜덤으로 정하지는 않았을 테다. 이것은 명백한 비하의 의미다.
여자 부족이니까 이름을 여성용품으로 짓자고 결정한 이 발상 자체가 너무 저질이다. 얘들한텐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화장품이나 얇은 옷, 연애, 요리 같은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어떤 물건 같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게임 전반적으로 젤다를 다루는 방식을 관찰하면 더더욱 이 같은 불쾌감이 잘 느껴진다.
솔직히 여기서 정이 딱 떨어져서 더 이상 플레이하고 싶지 않았는데 억지로 엔딩을 봤다. 도대체 왜 그토록 많은 게임 회사들이 이 게임에 최고점을 줬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도 이런 설정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던 건지 묻고 싶다. 아니면 영어문화권이나 유럽에서는 로컬라이징을 해서 평범한 이름으로 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훨씬 교활하고 악의에 차 있는 셈이다. 지들이 봐도 이건 좀 아니고 문제가 될 거라는 걸 알았다는 의미다.
다른 나라에서 제작된 타이틀에서도 종종 남성중심적 시각이 문제가 발견되지만 일본은 특히 심하다. 시대 흐름에 뒤처지다 못해 거의 뒤로 달리는 수준이다. 지금이야 그 밥에 그 나물이니까 어떻게든 비벼서 넘어가는 것처럼 보일 텐데 앞으로 몇 년 안에 바뀌지 않으면 도태되는 건 시간 문제다. 뭐 일본 회사가 망하든 말든 내 알바 아니긴 하다. 굳이 언급한 것은 이런 문화콘텐츠를 소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을 짚기 위해서였다.
까고 말해서 게임성도, 요즘 유행하는 오픈월드 요소를 대폭 섞어서 좀 잘 된 타이틀인데 왜 그렇게까지들 칭찬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서구의 일본 숭배자들 중에 젤다 골수팬들이 많아서 그랬을지도. 어쨌든 내가 다시 젤다의 전설을 플레이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지옥같은 45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