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과 멋진 신세계
SM엔터테인먼트의 신인 걸그룹 에스파(aespa)가 데뷔했다.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덕질 요소가 있는 것인지 ‘돌알못’인 나는 잘 모르겠지만, ‘스엠’이 새 그룹을 낸다고 할 때마다 소셜미디어는 말할 수 없는 열기로 들썩이곤 한다. 요즘에는 연습생의 팬덤까지 있다고 하니 아이돌 시장의 잠재력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된다.
스엠에 따르면 에스파는 “Avatar X Experience(아바타 X 익스피리언스)를 표현한 ‘æ’와 양면이라는 뜻의 영단어 ‘aspect’(애스펙트)를 결합해 만든 이름으로, '자신의 또 다른 자아인 아바타를 만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는 세계관”에 기반해 만들었다고 한다. 쉽게 말하면 동방신기 멤버들이 ‘최강’창민과 ‘유노’윤호처럼 희한한 닉네임을 하나씩 가졌었다면 에스파는 멤버별로 각자의 가상세계 아바타를 갖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유산슬을 시작으로 연예계에 ‘부캐’가 유행 중인데 에스파는 본캐가 유명해지기 전부터 아예 부캐와 함께 1+1 데뷔를 하는 셈이다. 일단 돌판 주류 소비층의 반응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과 비슷하다. ‘뭔 소리야?’ 라고 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는 새 아이돌 멤버와 컨셉이 공개될 때마다 나노 단위로 쪼개어 분석에 들어갔던 사람들도 이번에는 아바타라는 개념 자체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SM타운 여권’과 같은 스엠의 실패한 전략으로 취급받고 있는 것 같다.
라고 생각하셨다면 바로 에스파가 그 결과물이다. 빅히트를 넘어 메가히트를 쳐버린 BTS를 보고 나 같은 사람이야 기사를 보면서 대박 쩐다 정도의 반응만 하고 말았지만 스엠과 이수만 대표는 어땠을까. 아주 쪼금 1정도는 배가 아프지 않았을까? 유엔 연설까지는 아니더라도 빌보드 차트에 오를 정도의 영향력 있는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지 않았을까? 미국에서 인기의 절정을 누리고 있는 블랙핑크는 또 어떤가.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는 케이팝 시장에서 이제 웬만한 상품으로는 우월한 위치를 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갈며 돌파구를 찾았던 게 아닐까?
BTS의 흥행을 보면서 피눈물을 흘린 스엠은 BTS의 ‘리스크’에 주목했다. BTS의 리스크는 아이돌이라는 상품의 특성 그 자체였다. 기업에게 오너리스크가 있다면, 아이돌에게는 ‘멤버리스크’가 있다. 음주운전, 폭행, 폭언, 유흥업소 출입, 각종 경범죄, ‘물의를 일으키는’발언, ‘과거’, 그리고 때로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심한 논란을 빚는 ‘열애설’. 때로 BTS도 이런 사건에서 자유롭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더 큰 리스크가 있다. 바로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나이듦’ 이다.
BTS는 ‘유명한 걸로 유명’ 하다. 멤버 이름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나조차 그들이 유명한 것쯤은 안다. 멜론차트 100이 뭔지 모르는 정치인들도 BTS를 운운한다. 그들의 인기는 이제 그들을 떠나 분리해서 존재한다. 이를테면 내가 어느날 ‘BTS 붕어빵’을 만들어서 판다고 가정하자. 비롯 몇 시간 못 가서 저작권 문제로 사업은 접어야겠지만 그 자체로도 인터넷상에서 유명해질 수 있는 정도까지 됐다. BTS의 영향력은 솔직히 말해 최근 정부에서 부지런히 외치고 있는 ‘한국판 뉴딜’보다 크다.
그 덕을 업고 BTS의 소속사인 빅히트는 상장까지 했다. 이 때 문제가 생겼다. 빅히트의 상장은 온전히 BTS라는 상품의 흥행 때문이다. 그런데 BTS를 더 이상 팔지 못한다면? 이를테면 현재 빅히트의 청약률을 넘어버린 교촌치킨이 어느 날 레드콤보와 허니콤보의 레시피를 잃어버렸다면? 순식간에 교촌치킨이라는 브랜드의 가치는 추락한다.
빅히트의 걱정도 여기에 있었다. 빅히트 한 주를 받으려면 1000대 1의 경쟁률을 뚫어야 했다. 공모 금액에 거의 60조원이 몰렸다. BTS의 흥행 여부에 수십 수백만의 투자자들의 목줄이 달렸다.
BTS의 미래는 더 이상 BTS의 것만이 아니게 됐다.
그런데 그 미래가 영원할 수가 없다. 10년 안에 멤버들은 어쨌든 군대를 가야 하고, 20년 뒤에는 나이가 들면서 활동에도 변화가 생길 것이고, 그런 와중에 크고 작은 ‘논란’들은 끊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 전망이 탄탄대로여도 투자할까 말까 한데, 미래 가치가 명백히 하락하는 상품에 장기적인 돈을 들일 투자자는 없다. 적어도 자본은 아이돌을 그렇게 여긴다. 당시 ‘국위선양에 따른 BTS 군복무 면제’ 논의도 사실은 이런 배경 아래 나온 것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스엠은 ‘그렇다면 그 리스크를 없애자’고 생각했다. 아이돌이라는 상품의 리스크는 그 상품이 인간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과 맞춰 변하게 되는 과정을 ‘변질’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는 것을 지우면 된다. 시간이 흘러도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이미지를 유지하는 아이돌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멤버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가상현실 캐릭터들을 ‘아바타’라는 이름으로 끼워파는 느낌이지만, 만약 이 전략이 성공하면 앞으로 사람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것이다. 아바타를 멤버들과 함께 꾸준히 노출시켜 사람들의 눈에 익숙해지도록 만든다. 인스타램과 트위터 같은 플랫폼은 당연하고 TV, 신문, 버스 배너, 간판 뭐 아무튼 닥치는 대로 아바타들의 출연을 늘린다.
사람과 달리 이미지만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런 작업은 더 쉽다. 게임 속 캐릭터로 등장시켜도 되고 영화, 웹드라마, 웹툰 등 다양한 컨텐츠에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스케줄이라든지 행사장 간 이동 거리라든지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처음에는 비웃던 사람들도 아바타의 존재를 점차 친숙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 대중들의 호감을 얻을 기회가 생기면 그 때부터 상승세를 타면 된다. 하다못해 ‘하루종일 열일하는 아이돌류 갑’과 같은 느낌으로 유명세를 얻을 수도 있다.
이 다음부터 멤버들은 굳이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 아바타들만 출연하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서 공중파에 내보내도 된다. 브랜드 쇼케이스 같은 데도 출연할 수 있다. 최근에 유행하는 비대면 소통으로 인해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서로를 마주하는 데 익숙하다. 행사장에 대형 스크린을 설치하고 아바타 이미지를 띄워 두면 된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아바타의 얼굴에 조금 질려갈 때쯤이면 약간의 손을 보면 된다. 가상의 캐릭터는 헤어스타일과 옷만 조금 바꿔도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다. 그래도 질린다고 하면, 사실 그래도 상관 없다. 새 아바타를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이전의 성공 사례를 바탕으로 다시 도전하면 되는 것이다.
라는 것이 내 가정이다. 이건 스엠이 ‘NCT(Neo Culture Technology)’의 컨셉을 발표했을 때와 비슷한 발상이다. NCT라는 그룹의 컨셉 같은 것은 그대로 가져가고 그 안에서 멤버만을 계속 교체하는 시스템. 즉 문제가 생긴 부품을 교체하면서도 그룹의 정체성을 가져갈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아이돌 시장에는 멤버들의 얼굴이나 이미지를 본딴 인형이나 캐릭터 사업이 자리잡고 있다. ‘BT21’는 BTS가 만든 캐릭터라는 사실만으로 흥행했다. 거기에 멤버들의 얼굴이 들어가 있지 않아도 된다. 뮤직비디오 조회수가 4억에 달하는 K/DA 라는 걸그룹도 가상의 캐릭터로 이뤄져 있다.
아바타와 함께하는 아이돌도 마찬가지다. 멤버들이 없어도 앨범은 나오고, 그룹은 활동하고, 회사는 돈을 쓸어가는 시스템은 계속 굴러갈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더 편리할수도 있다. 어차피 대부분의 팬들은 살면서 아이돌을 실제로 볼 기회가 많지 않다.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는 아이돌은 몇년을 공들여 연습시킬 필요도 없고, 방송사와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애를 먹을 필요도 없고, 매니저 등 스태프 비용을 들일 필요도 없으며, 스트레스와 멘탈 케어, 끊임없는 구설수에 따른 리스크 관리 등 온갖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아도 돈을 벌어다 준다. 이런 비용이 하나의 캐릭터를 잘 만드는 비용보나 높아지게 될 때, 기업은 가차없이 아이돌을 버려도 된다. 연예인이 ‘신흥 귀족’이라고 불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진짜 귀족은 끊임없이 새로운 컨셉의 아이돌을 탄생시킬 수 있는 소수의 기획사들과 개발자들이 될 수도 있다.
에스파는 스엠의 첫 시도이니만큼 성공 여부를 100% 장담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가상 세계의 아이돌이라는 다소 난해한 개념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데는 좀더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보다 케이팝의 영향은 크다. 스엠의 도전을 보고 영감을 받아 벤치마킹하는 기업이 한두 곳쯤은 나올 테다. 그러다 보면 ‘아이돌 없는 아이돌 시장’은 점차 일상화될것 같다. 다만 그렇게 됐을 때 지금도 돌아가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출하를 기다리는 재고품처럼 쌓인 연습생들의 문제는 누가 해결할 것인가가 숙제로 남는다.
옛날 산업혁명 초기 러다이트(기계 파괴 운동)들은 그들 대신 일을 차지한 방적기를 박살냈다지만, 만일 상대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이라면 대체 어떤 식으로 대항해서 싸울 수 있겠는가?
제리 카플란 <인간은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