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오라기 Dec 20. 2020

넷플릭스 <더티 존>: 여성이 마주하는 일상적인 공포

당신은 그게 나였다는 걸 기억하게 될거야




*결말을 비롯한 전반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장르별로 어떤 작품이 정리돼 있는지 잘 찾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들이 많은데 사실 어플리케이션의 조작법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TV 프로그램’과 ‘영화’, ‘최신 등록 콘텐츠’등의 분류 안에 또 다시 드라마/예능/코미디/로맨스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 방식이다.


넷플릭스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콘텐츠를 보유하고 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싶은 분들에게는 조금 불편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이 작품이 이 장르에 있다고?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도서관을 생각해 보면 쉽다. 큰 도서관에 가서 소설책이 총 몇 권이나 있는지, 뭐가 있는지 일일이 확인해 보지는 않듯 넷플릭스에서도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보고 싶은 영상을 검색해 보고, 그런 건 없지만 이건 어떠세요 하고 권하는 작품을 틀든지 말든지는 우리의 선택이다. 과거 나의 취향과 수억명의 데이터가 모여 만든 인공지능 검색 엔진을 비롯해 나처럼 추천 리뷰글을 작성해 드리는 리뷰어를 활용하시면 되므로 너무 걱정은 마시라.


개인적으로 장르 구분을 바꿨으면 하는 작품 중 하나가 <더티 존>이다. TV드라마 및 스릴러 장르로 돼 있는데 내 생각에는 ‘공포’혹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분야로 확장해도 무리가 없는 연출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사람 뭔가 이상해요. 정말 모르겠어요?


출처: 넷플릭스 <더티 존> 트레일러




<더티 존>은 ‘존 미핸’이라는 사이코패스 남성의 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그의 일화는 LA타임스 기자의 팟캐스트를 통해 알려지게 됐는데, 6주 만에 1000만 다운로드를 기록할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반면 너무나 자극적인 내용으로 인해 비판도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수많은 범죄 실화 가운데서도 독보적인 관심을 받은 사례인데,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데브라’의 이야기다. 데브라는 인테리어 분야에서 큰 성공을 거둔 사업가이자 두 딸을 둔 엄마로서 완벽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네 번의 이혼을 하면서 실패한 결혼 생활에 대한 상처가 있는 사람이다.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말도 있지만 역시 이혼 네 번은 너무하지 않나 싶다. 남자 운이 지독하게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 데브라의 남자 보는 눈이 너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외모도 재력도 다 가진 데보라가 남자에게 원하는 것은 ‘나를 잘 이해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것’ 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외모와 스펙이 사람을 고르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데이트 앱을 통해 남자를 고른다. 그러니까 당연히 돈 자랑을 하거나 죽은 아내 얘기를 꺼내는 등 대화가 도저히 통하지 않는 상대만을 만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더더욱 현타를 겪으며 우울감에 빠진다.


그런 데브라를 구원한 것이 ‘존 미핸’이다. 일단 외모가 훈훈해서 반신반의하며 만났는데 알고 보니 마취과 의사로서 국경없는 의사회에서 활동했다는 보기 드문 경험을 가진 매력적인 사람이다. 게다가 대화가 너무너무 잘 통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다.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직업적인 성공도 인정해 준다. 나를 연애 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해 주는 느낌. 결국 데브라는 존을 만난 지 5주 만에 함께 살 별장을 구입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엄마가 이혼을 네 번이나 하면서 받은 상처를 잘 알고 있는 딸들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수밖에 없다. 특히 큰딸은 ‘그 사람 진짜 이상하다’며 존에게 위치 추적기를 달아야 한다는 둥 강한 의심을 보인다. 그러나 사랑은 장작처럼 말릴 수록 불타오르는 법이라 딸들과 가족의 반대 속에 힘들어하는 데브라는 더더욱 존에게 기대고 의지하게 되며 이 과정에서 고립은 더욱 심해진다.


<더티 존>은 비록 미국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이라도 일방적인 폭력과 가스라이팅 앞에서는 한순간에 약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수많은 여성 헐리우드 스타들도 데이트 폭력과 가정 폭력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경우가 많다. 운전이 미숙하다고 해서 누구나 교통사고를 당해 즉사해야 하는 법은 없고 복잡한 계약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전재산을 날려야 하는 법은 없는 것처럼 데브라가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다고 해서 존과 같은 남자를 만나 대가를 치러야 할 이유는 없다. 단지 상대방에게 진정한 사랑만을 원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리스크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더티 존>은 흥미진진한 범죄실화라기보다 오히려 공포물에 가깝게 느껴진다.



뒤통수 조심하는게 좋을 거야. 이제 넌 내 프로젝트거든.

출처: 넷플릭스<더티 존> 트레일러




사랑에 눈 멀고 귀 막고 있던 데브라도 마치 종이가 서서히 물에 젖어 흩어지듯 촉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존이 의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간호사였고, 가진 것도 별로 없어 자신의 돈과 차를 마음대로 쓰고 집 곳곳에 CCTV를 설치한 것 까지는 데브라도 그럴 수 있다고 쳤다. 그의 모든 행동에는 그럴 만한 이유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존이 숨겨둔 문서에서 남자 교도소에서 받은 편지가 나오고 접근금지명령서 같은 것들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그가 수많은 중범죄 전과를 가진 심각한 약물 중독자로서 자신의 재산을 갈취하기 위한 작업을 해 오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평범한 사람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에 법이라는 존재를 잘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 테두리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허점을 잘 알고 있다. 존은 태생부터 그런 부류였다. 차도에 뛰어들어 보험료 인상을 두려워하는 운전자들에게 합의금을 뜯어내거나 환자에게 줄 약물을 가로채는 일은 일상이다. 특히 그의 잔혹함은 남자를 믿고 쉽게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헌신하는 여성들에게 유감없이 발휘된다.


감옥을 다녀온 후에도 밥먹듯이 사기를 치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협박을 가하는 모습에 여동생마저 치를 떨며 정신 좀 차리라고 화를 내지만 그런 그에게 존은 ‘이제 넌 내 프로젝트야’라는 경고를 한다.


프로젝트. 이것은 한편으로 존이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을 가장 잘 묘사한 대사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나약한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재빨리 파고들어 결국에는 그의 모든 것을 빼앗고 항의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 그래서 존과 엮인 사람들은 분노보다는 공포에 시달린다. 그가 언제 나타나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평범하게 살 수 없도록 만들지 모른다는 공포.


<더티 존> 작품 내에서 이를 매우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장면이 있다. 존과의 재산 분배 문제를 논하기 위해 데브라가 변호사를 찾는 신이 있는데 과거 재산 이력 같은 게 필요하다고 말하는 과정에서 대화에 참여하는 데브라와 달리 존은 변호사를 말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누가 봐도 쎄하고 이상한 분위기에 변호사는 존과 같은 건장한 백인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겁을 집어 먹고 이야기를 서둘러 종료한다. 물론 이런 둘만의 분위기를 데브라는 눈치채지 못한다. 그 뒤 변호사는 존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데브라를 구하기 위해 충고의 메시지를 보내거나 메일을 쓰는데 이를 데브라 몰래 먼저 파악해 역으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존에게 무서움을 느끼고 결국 데보라의 일을 맡는 것을 포기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이 존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지를 잘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존은 궤변과 거짓말로 여성을 공략하고 그 주변 사람들에게는 상식적으로 할 수 없는 행동으로 겁을 준 다음 당사자에게 ‘그 사람 좀 이상한 것 같아’라는 말로만 충고하고 물러나게 만드는 작전을 기가 막히게 잘 해낸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되지만 존에게는 그저 이 모든 것이 ‘프로젝트’일 뿐이다.



그 녀석은...여자들한테 개처럼 굴거든요.


출처: 넷플릭스 <더티 존> 트레일러



마지막으로 <더티 존>의 모든 내용은, 물론 실화를 바탕으로 해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존은 데브라를 만나기 전 한 번 결혼을 했었는데 결혼식 비디오에서 존의 친구들은 이런 말을 한다.


이 친구의 결혼을 주제로 얘기해 보면 다들 깜짝 놀라거나 당황했다는 걸 아실 겁니다.
이유를 물으신다면 저희는 의심이 많은 사람들이거든요.

언젠가 내가 대통령이 되면 저 남자를 추방할 거에요.

존 미핸의 별명은 불결한 존 미핸입니다. 이유는 카메라 앞에서는 말 못해요.


물론 이런 대사가 결혼식 비디오에 찍힐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즐겁게 웃으면서 마치 농담처럼 그런 말들을 했기 때문이다. 축제 분위기 속에 왁자지껄한 신랑 들러리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친한 친구에게 장난을 칠 때 흔히 하는 말들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진심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존이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와 결혼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병원에서 약까지 훔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존의 아내는 과거 신랑 들러리 중 한 명을 찾아가는데 그는 ‘사실 왜 그 친구와 결혼하는지 의아했어요. 그 녀석은 여자들한테 개처럼 굴거든요’라고 태연하게 말한다. 존이 대학 때 사기를 치며 살았다는 이야기도 해 준다.


이 때 그의 태도는 결혼식 비디오 속에서와 다르지 않다. 시종일관 얼굴에는 웃음기를 머금고 있고 마치 남자들 사이에서 그 정도 일은 별 일 아니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다. 그런 그를 보면서 아연해지는 존의 아내로부터 우리는 술자리에서 오가는 ‘뼈 있는 농담’을 결코 흘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한편으로 그런 진담을 농담처럼 하며 가볍게 발을 빼 버리는 사람들의 의도하지 않은 잔인함을 엿보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 특히 ‘연애’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이 거론되기 시작하면 사회는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짓는 데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런 태도가 지금까지 수많은 무고한 희생양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랑해서 그랬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야. 한 번만 다시 생각해 봐. 연인 사이에서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라는 말을 듣고 나면 사랑은 복잡하고 숭고한 것이어서 어려울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무지했던 내가 너무 예민했던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반성을 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사랑도 결국 가족, 친구, 직장 동료와 같은 사회적 관계의 하나일 뿐이며 분명히 지켜야 할 선이 있고 이를 악용하려는 쪽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간단하고 단순한 공식은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무시되고 있으며 이 과정의 끝에서 새로운 <더티 존>이 탄생한다.


존은 어떤 합법적인 방법으로도 제재를 당하지 못하지만 끝에 가서는 나름대로 죄 값을 치른다. 어떤 ‘처벌이었는지는 직접 확인해 보시면 좋겠다. 실제로도 같은 결말이 났다는 점에서 속 시원하긴 하지만 사이다라고까지 하기는 어렵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수백, 수천 명의 더티 존과 수많은 데보라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귀신과 좀비보다 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가까운 누군가가  무서운 현대 사회에서 <더티 존>은 진정한 일상의 공포를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의 이전글 불멍의 사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