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 코드3> 중용 또는 적정성
"Diversity 다양성" by Shutterstock l 다양성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다양성 속에 강함이 있다(왼쪽) "Biodiversity 생물다양성" by Szymek Drobniak l 인간의 선택과 행동에 매달린 뭇 생명체들의 운명을 표현(A metaphor of our biological world depending on us. Atlas bearing our living things on his shoulders)
이혼녀, 편부모, 이민자, 비전공자 배우, 흡연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70여 년 현대사를 걸어온 그의 행적을 쫓아보면 대체로는 정상과 표준을 벗어난 경계에 있었다. 변방의 나라, 변방의 신분, 변방의 성별에 속했던 그가 온 세계의 시선이 집중되는 '주류'의 심장에 서게 되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포효한 말들은 이렇다.
'무지개'와 '최중', 두 단어를 관통하는 코드는 무엇일까?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어떤 '정상성(normal)'에 대한 문제제기 아닐까? 또는 '표준(standard)'에 대한 이의제기 였거나.
'윤배우의 최중(最中)'에 의해 부정된 '최고(最高)'는 우리 사회에서 '정상'을 대체하는 표현이었다. 이상하게도 이 '정상'은 '보통'(common sense)을 넘어서는 1등을 의미했고, 언젠가부터 우리는 그 1등을 당연한 듯 '이상향'이거나 삶의 '모델'로 받아들였다.
유일하거나 희소할 수밖에 없는 '1등'이 모든 갑남을녀 인생의 롤모델이자 정상적인 성취의 기준이 되자, 이 사회는 '승자독식(The winner takes it all)'이라는 가치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했고 격렬하고 처절한 경쟁을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여기며 살아가게 했다. 1등이 아니면 '비정상' 이거나 '열등'하거나... 그런 평가와 대우가 전혀 문제로 여겨지지 않는,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이었다. 탓할 건 오로지 자신의 능력과 게으름이었다.
다음, 윤배우의 '무지개'가 겨눈 것은 '획일성'이었다. 정답만 있는 사회, 옳은 것과 그른 것의 분별만 있는 사회, 트랜스젠더에게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기회조차 박탈되는 사회. 획일적 기준으로 주어진 모종의 모범답안들만이 우리 사회의 '표준'이자 '준거'가 되었다. 그 경계를 벗어나면 가차 없이 배제당했고, 당연한 듯 차별당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거나 억울할 게 없었다. 다만, 자신의 태생이 서럽거나 슬플 뿐.
그래서 윤배우의 언어는 사실상, 아직도 충분히 덜 진화된 '지금, 여기'의 문명에 던진 화두로 받아야 한다. 그의 언어는 몇 마디 안됨에도 불구하고, 당연한 듯 차별과 배제를 감행하며 '정상과 표준'만을 향해 전진해온 '지금-여기' 세계의 부조리한 단면을 단박에 드러내었다.
극소수만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승자독식판의 온전한 세팅을 위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다양성들이 희생 제물로 공여되어 열등하거나 모자라거나 부족하거나 비정상인 걸로 취급당해 온 '이상한 정상' 사회의 단면을 단박에 포착했다. 그 결과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그 소수의 '최고'들로부터 '개-돼지'처럼 조롱당하고, 차별당하고, 배제당하고, 무시당함을 당연한 듯 세습해온 것은 어쩌면 '인위적으로 설계된' 불평등 때문일 수 있다는 걸 단박에 깨쳐주었다.
불교의 '금강경'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 아니던가!
그러니 윤배우의 언어들의 값어치는 그저 한 영민하고 힙한 여인의 재치와 재능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하다. 내게 그의 말들은 주류사회에 던진 변방의 수류탄처럼 들렸다.
비정상 가족, 비정상 부모, 비정상 국적, 비정상 배우, 비정상 사고 구조, 비정상 표현방식... 온갖 '비정상'의 낙인을 덕지덕지 훈장처럼 매단 채, 높고도 음험한 '정상과 모범'의 장벽들을 온몸으로(그의 표현대로라면 '반복적인 학습과 훈련(prctice)'을 통해) 정면돌파해 온 한 거인의 경고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자신이 헤쳐 나와야 했던 그 겹겹 장벽들의 가장 근원적인 배후로 지목했던 것이 바로 '최고'와 '정답'만이 살아남아 대접받는 차별적이고 위계적인 사회 구조였다. 온 인생을 걸고 부조리의 장벽들을 하나하나 격파해온 이의 시선으로나 가능한 날카로운 포착이자 적나라한 까발림이었다.
다만, 이미 거인이 된 그의 칼끝은 생채기를 남기는 날카로움보다, ''최중'과 '무지개'가 더 좋지 않겠느냐'라는 식의 우아하고 힙한 울림으로 변주됐다.
그런데, 윤배우가 외면한 '최고'라는 극단은 이제 버려야 할 가치일까? 의미있는 어떤 경우가 있긴 한 걸까?
가장 큰 생물, 가장 작은 생물, 가장 오래 사는 생물, 가장 빠른 생물, 가장 시끄러운 생물, 가장 강인한 생물, 가장 치명적인 생물, 가장 똑똑한 생물 등 온갖 기준에서 '극한'까지 진화한 '최고'의 생명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이 있다. 『굉장한 것들의 세계』의 저자 매슈 D. 러플랜트는 코끼리를 처음 본 이래 최상위 생물체에 집착하는 아이가 되었음을 고백한다. 그는 '사람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극단의 존재에 매료된다며, 그게 인간 고유의 독특한 취향일 것이라고 한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초등학생 아이가 손에 들고 있는 『기네스 세계 기록』을 빼앗으려고 시도해 보라.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이 책을 손에 넣었다. 워릭초등학교 북클럽을 통해 이 책을 주문하여 며칠 만에 통독하고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내 딸이 여덟 살이 되자, 그 애 역시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인 판본의 기네스 세계 기록을 뒤적이며 몇 시간씩 보냈다. 당연했다. 이 책은 한없이 흥미진진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우림은 어디인가? 어떤 곤충의 침이 가장 아플까? 꼬리가 가장 긴 공룡은 무엇인가?"
다른 말로 하면, '최고라는 극단'에 대한 집착은 인간 특유의 성장과정, 한 시절 스쳐가는 소아병적인 취미생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딱 거기까지 일 때만 아름답고 유용한 것일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고라는 극단'이 그것에 유일하게 집착하는 취향을 지닌 인간에게 효용성과 가치를 제공할 영역에 대해서도 굳이 콕 집어 언급했다.
"바로 이처럼 우리가 이 행성에서 아는 모든 것이 너무 비슷하므로, 설령 얼핏 보기에 우리와 많이 달라 보이는 대상일지라도, 또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들과도 달라 보이는 대상일지라도 이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가장 빠른 동물에서부터 가장 작은 생명 형태, 가장 느리게 진화하는 생물체, 가장 오래 사는 유기체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연 세계에서 보이는 가장 극단의 현상은 우리의 한계를 알기 위한 관점을 제공한다. 아울러 우리의 잠재력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이 잠재력은 오랜 세월 바로 우리 앞에 있었다. 가장 큰 것, 가장 작은 것, 가장 오래 사는 것, 가장 빠른 것, 가장 시끄러운 것, 가장 강인한 것, 가장 치명적인 것, 가장 똑똑한 것 속에 그리 꼭꼭 숨지도 않은 채 조금만 눈여겨보면 알 수 있는 상태로 말이다. 우리는 늘 이런 것에 궁금증을 품었고, 늘 이런 것을 수집했으며, 늘 이런 것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극한이라는 것들은 실존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존하는 모든 것들의 '잠재력'을 가늠하게 하고 현재의 한계를 극복할 꿈의 방향성을 제시해 줌으로써, 모든 '진화'의 계기가 돼주기에 가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모법답안의 극한인 '이데아'라는 것도 누군가의 관념과 공상 속에 존재할 때 아름다울 뿐이다. 모든 꼼지라 거리는 것들이 다양하게 피어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으로써. 그러나 그 '이데아'를 지상에 강림시키려 하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의 표준이자 준거로 선포하는 순간, 그 아름다운 가능성들은 폭력적이고 획일적인 잣대와 우상으로 돌변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꿈틀대며 꿈꿀 수 있던 영혼의 여백을 상실해버린 채, 누군가에게만 모범적인 어떤 이념의 열혈 동조자이거나 사이비 종교의 호구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잊지 말자. '최고라는 극단'은 실존에서의 내 삶을 더 도약시킬 가능성을 가늠할 사유의 공간을 열어주기에 가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열린 '극한들 사이'의 공간에서 우리는 나의 실존에 가장 적절한 삶의 위치(position)과 태도(stance-스탠더드가 아니라 스탠스다!!))를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모든 위계와 차별과 배제를 넘어, 윤배우가 말하는 '최중'을 향하는 다양한 빛깔의 '무지개' 중의 하나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중'을 향한 삶의 방식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周易』 겸괘(謙卦)에 읽히는 ①지중유산(地中有山) ②中庸과 적정성 ③재성보상(裁成輔相) 아닐까? 신지 영감과 공부한 세 가지 이야기를 여기 정리해 둔다.(이어진 앞글 보기 영원한 제국은 없다)
땅속에 산이 있는(地中有山)
“땅 가운데 산이 있는 것이 겸괘이니,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많은 자는 모으고 적은 자는 보태어 물건에 맞추어 공평하게 베푼다.”(『周易_謙卦』 <象曰> 地中有山이 謙이니 君子以裒多益寡 하여 稱物平施하나니라.)
왕필의『주역정의』에 등장하는 재미있는 문장을 한 번 보자.
"응당 '산이 땅속에 있다(山在地中)'고 말해야 하는데, 지금 도리어 '땅속에 산이 있다(地中有山)'고 말한 것은, 많은 자와 적은 자가 모두 유익함을 얻었음을 뜻한 것이다."
'山在地中'과 '地中有山', 이 둘의 차이를 말하고 있는데 언뜻 이해가 안 된다. 북송의 역학자 호원(胡瑗)의 훈수를 보태면 좀 도움이 될까?
"간괘는 아래에서 강직하면서 멈추어 있고, 곤괘는 위에서 유연하면서 순종하고 있다. 대체로 안으로 강직하면서 밖으로도 유순하지 못하면 오만한 과실을 범할 수 있고, 밖으로 유순한데 안으로도 강직하지 못하면 아첨에 가깝다."
쉽게 말하면, 호원은 '외강내강'이나 '외유내유'에 대해서는 모두 '비판적'이다. 왜? 과유불급이니까. 그러나 호원의 표현을 조금 비틀어 주면 대체로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두 기질이 드러난다. '외유내강' 또는 '내유외강'. 과도하게 오만하지도, 과도하게 비굴하지도 않은 성정 말이다. 이 두 기질은 대체로 '선악의 가치판단'으로 '비판'받는 대상이 아니다. 그저 '좋고 싫은 취향'의 문제로 '평가'받는 대상일 뿐이다.
사람들은 '과도한' 것들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거나 위험회피본능이 생겨난다. 반면, 본능적으로 안정감과 매력을 느끼는 미감은 이런 식이다. 높으나 나즈막하고, 존귀하나 겸양하며, 가득 차면 빈 듯한.
『노자』의 '반면의 미학'이기도 하고 현대적으로는 '반전미학'이라고도 하는 이런 감각은, 사실 우리 안에 아주 오랫동안 DNA처럼 장착되어 있던 미감이다.
그런데 '山在地中'과 '地中有山'는 무슨 상관인가?
'山在地中'는 우리가 '응당' 상식으로 생각하는 땅과 산의 모습이다. 멀리 지평선이 보이고 산들이 첩첩이 솟구쳐 있는. 그런 보통의 풍광을 한자 문법으로는 “山在地中”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산이 땅 위로 솟아 있다". 솟구치는 데 경계가 없으니 주변과 아래를 돌아보지 않고 혼자 막 솟아오르는 산의 모습이다. 앞만 보고 달리는 거다.
반면, “地中有山”은 한자 문법으로는 일종의 비문(非文)일 수도 있다. "'땅속'이 산을 품고 있다"라고 번역되니. 그러나 얼마나 시(詩) 적인가?
땅이 산을 품고 있다니
산이 아직 땅속에 숨어 있다니
산이 높으나 멀찍이 물러나있어 보일까 말까 하다니
솟구치기 전에 멈칫하고, 머뭇거리고, 경계하기를 손님처럼 하지 않는가. 『노자』의 '만물은 스스로 손님처럼 처신할 뿐이다(만물자빈萬物自賓)' 가 이런 뜻일 것이다.
中庸과 적정성
이런 익숙한 미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알게 모르게 오랫동안 장착돼온 '중용(中庸)'의 감각에서 온 것이다. 중용은 대립하는 두 측면을 이분하는 정중앙이 아니다. 정확한 '균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기계적 중립도 산술적 평균도 아니다. 공산주의적 평등은 더더욱 아니다.
中庸은 높아지면 낮추는 것이고, 달아오르면 식히는 것이고, 가득 차면 덜어내는 것이고, 너무 가까우면 물러서는 것이다. 지나치지 않아 너무 큰 격차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너무 큰 간격으로 인해 추락할 때 심각한 대미지를 입지 않도록 조절하는 지혜이다. 평형 상태를 유지하며 생태계의 신진대사가가 지속가능하도록 하는 과학적 인식의 결론이다. 과도함과 치우침으로 인해 파국에 직면하지 않도록 하는.
'차면 이지러지고 영광의 정점에 서면 무너지게 되는' 반복과 순환의 과정에서, 만일 최고점과 최저점의 격차가 너무 크다면 어떻게 될까?
심하게 다치겠지? 한때 잘나가다가 추락한 어떤 이는 다시는 재기의 꿈을 꾸지 못할지도 모른다. 성장이 느린 어떤 개체는 활짝 만개할 어느 날의 꿈을 갖지 못해 절망 속에 지레 시들어버릴 테지. 코로나라는 긴 터널도 반드시 끝나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감히 못 가질 것이다.
시소의 한 쪽이 '적정한 높이'를 상실하고 주저앉아 버리면 어떻게 될까? 다른 한쪽이 추락한다. 대칭 저울의 한 쪽에 적정 수준 이상의 무게를 지우면 어떻게 될까? 저울 자체가 망가진다. 한 나라 안에 한 계층의 삶이 심각하게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다른 한 계층의 부가 심각하게 솟구쳐지면 어떻게 될까? 먹이사슬 관계의 생물 중 한 개체가 심각하게 줄어들면 어떻게 될까? 또는 심각하게 늘어난다면?
'양극화'가 갈수록 심화되고 고착화돼 당연한 일상인 듯 용인되는 사회가 되면 어찌 될까? 노예의 운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던 과거 신분사회의 21세기 버전이 지상에 재현될 것이다.
그러면 또, 우리의 리그는 그들의 리그를 위한 '도구'로 존재할 뿐임을 숙명인 듯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게 되겠지. 살려고 갔던 노동 현장에서 주검이 되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상이 되겠지. 그 죽음조차 '내 잘못을 탓'하며 숙명으로 받아들여야겠지.
그들의 리그의 시선에서는 우리 리그의 사람들에게는 외식하는 일조차 '미칠 만큼' 과분하게 보일 것이고, 우리 리그의 택배 기사들이 아파트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수레에 짐을 옮겨 실어 그 넓은 단지를 헤매며 가가호호 배달해야 비로소 당연하고 정상적이라는 안도감을 주겠지.
그러나,
다른 한쪽이 존재함으로써 이쪽도 존재한다는 과학적 진리를 체득한 사람들은 모든 것은 일견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가 팽팽하게 긴장하는 힘의 균형 속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서로 번갈아 오르락내리락할 정도의 힘의 밸런스가 보존될 때에야 비로소 모든 종류의 생태계가 건강하게 작동하고 순환할 수 있다는 정도의 지혜는 기본으로 장착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런 지혜를 잘 표현하는 현대어가 '코로나'로 인해 차츰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이제서야.
'적정성'. 적정한 거리, 적정한 격차, 적정한 (차별 아닌) 차이.
긴장하되, 서로를 멸하지 않을 거리. 망가지되, 완전 이탈로 사라져버리지 않을 궤도...를 보장하는 공존의 방법이다.
결국 '적정성'이란 것, '중용'이란 것은 '균등함'의 문제가 아니라 '밸런스ㅡ균형'의 문제다.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간격 차이. 그런 차이라면, 어느 한 쪽의 존재 자체를 절멸시켜 버릴만한 차이가 아니라면, 존재들 간의 균형 자체를 붕괴시킬 만한 차이가 아니라면... 그런 정도의 차이라면 용인될 뿐만 아니라 온 지구 생물다양성의 근원이 될 것이다. 그런 정도의 '용인 가능성' '참을 수 있는 한계'가 '중용'이고 '적정성' 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코로나 국면에서 <겸괘>가 내주는 숙제는, 누구든 무엇이든 어느 한 쪽만 과도하게 우뚝 솟아 있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일 것이다. 마치 땅속에 숨어있는 산처럼, 산을 품어 버린 땅처럼.
아무리 둔난의 시절을 겪더라도 이런 '중용ㅡ적정성의 밸런스'를 절대 망가뜨리지 말고 끝까지 지켜내라는 충고일 것이다. '亨(큰 제사)'을 통해 국민통합의 정신적 무장을 강조하는 이유도 험난한 국면에서는 자칫 저 적정 밸런스의 긴장이 붕괴돼버릴 수 있기 때문일 테고.
배우 윤여정의 '최고가 아닌 최중을 지향하자'는 권고도 이런 맥락에서 귀 기울여 보는 것이 어떨까?
재성보상(裁成輔相)
이런 '적정성'은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바로 '재성보상(裁成輔相)'을 통해서다. 다시 겸괘 상전을 보자.
“땅 가운데 산이 있는 것이 겸괘이니,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많은 자는 모으고 적은 자는 보태어 물건에 맞추어 공평하게 베푼다.”(『周易_謙卦』<象曰> 地中有山이 謙이니 君子以裒多益寡하여 稱物平施이라)
무슨 말일까?
왕필은 "많은 자는 겸손함을 사용하여 모으고, 적은 자는 겸손함을 사용하여 보태어서, 물건에 따라 주어서 베풂에 공평함을 잃지 않는 것"이라 한다. 즉, "많고 적은 이에게 모두 주어서 많고 적음에 따라 모두 주는 것이다. 많은 자도 은혜를 베풂을 얻고 적은 자도 은혜를 베풂을 얻으니, 이것이 ‘베풂에 공평함을 잃지 않는 것’"(『주역정의』)이라 했다.
정이천(程伊川)과 주자(朱子)는 이런 모습을 "많은 것을 덜어서 적은 것에 더해줌"의 뜻으로 보았다.
"이 물건의 많고 적음에 걸맞게 하여 공평하게 베풀어서, 물건이 먼저 많았던 자는 그 베풂을 얻고, 물건이 먼저 적었던 자도 그 베풂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건에 맞추어 공평하게 베푼다(稱物平施)'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하여,
"군자가 아랫사람을 대함에 있어 만약 겸손한 자가 있을 경우, 벼슬이 먼저 높았으면 영화와 품계를 더해주고, 지위가 먼저 낮았으면 또한 작록을 가해주어서, 그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르고 그 겸손함의 많고 적음을 상고해서 모두 많고 적음에 따라 베풀어줌을 말한 것"(『주역정의』)이다.
하여, "적정성"을 향한 '재성보상(財成/裁成輔相)'의 실천하는 하늘, 땅, 귀신, 인간... 각자의 방법을 명쾌하게 정리해보면 이렇다.
“겸은 형통하니, 천도가 아래로 구제하여 광명하고, 지도가 낮추어 위로 행한다. 천도는 가득한 것을 이지러지게 하여 겸손한 것을 보태주고, 지도는 가득한 것을 변하여 겸손함으로 흐르게 하고, 귀신은 가득한 것을 해치고 겸손함에 복을 주고, 인도는 가득한 것을 싫어하고 겸손함을 좋아하니, 겸은 높은 사람은 빛나고 낮은 사람은 넘을 수가 없으니, 군자의 끝마침이다.”(『周易_謙卦』 <彖曰> 謙은 亨하니 天道下濟而光明하고 地道卑而上行이라 天道는 虧盈而益謙하고 地道는 變盈而流謙하고 鬼神은 害盈而福謙하고 人道는 惡盈而好謙하니 謙은 尊而光하고 卑而不可踰니 君子之終也라)
덤으로, 땅의 도리를 실천하는 군자는 이' 재성보상'의 덕을 어떻게 펼쳐야 할지 구체적으로 보면 이렇다.
"백성들이 제대로 입고 먹어서 추위와 굶주림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군주의 도리(『맹자_ 양혜왕 상편(梁惠王 上篇)』)"라는 맹자의 주장에 대해 주자는 “법제와 품절의 상세함을 다하고 재성보상의 도를 지극히 하여 백성을 좌지우지함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바로 왕도의 완성이다.”라고 해석한다.
『周易』 태괘(泰卦) 상전(象傳)에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찾을 수 있다.
“하늘과 땅이 교류하는 것이 태괘(泰卦)의 모습이니, 군주는 이것을 본받아 천지의 도(道)를 마름질(裁斷) 하여 완성하고 천지의 마땅함을 법제화(輔相) 하여 백성을 돕는다.”
재성(財成/裁成)은 넘치는 것을 마름질한다는 것이니 지나침을 억제하는 것이고, 보상(輔相)은 부족함은 보완하여 돕는다는 뜻으로 '정사를 보좌하며 돕다'라는 의미도 있으니 '법제화'하여 정치적으로 단단하게 보장한다는 의미다.
극단적인 차이와 간격의 적정성이 가장 선제적으로 필요한 곳은 어디일까? 먹고사는 문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훌륭한 가치와 종교조차도 식후락이다. 새로운 시대도 개혁도 혁명도 먹고사니즘 너머의 무지개인 것이다. 청산도 개혁도 좋고 혁명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또는 그 이후에라도 이 먹고사니즘으로 빈정 상하는 누군가가 생겨나는 순간 그 조직은 이완되기 시작한다.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거나, 어느 한 쪽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거나, 눈 딱 감아줄 정도의 격차와 배제를 넘어서거나, 임계점을 넘는 참을성을 요구하면... 그 조직의 앞날에는 '해체'라는 정산서만 남는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이상주의적 성리학의 세계에서 살아가던 도학 선비님들도 이 명료한 '먹고사니즘'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다. 괘사 "謙은 亨 하니 君子有終이니라"는 몹시 추상 수준 높은 고준담론 같았지만, 기실은 겸덕이 선제적으로 돌보아야 할 것은 바로 '분배'의 적정성, 중용적 경제환경임을 '콕' 집다시피 언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