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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토리텔링주역 May 09. 2021

네 이웃의 부를 탐하지 말라

<주역 코드4> 빅피쳐를 향한 첫 걸음-발상의 전환과 세술(勢術)

"대부분의 나라가 기술 자체를 향상시켜 온 반면, 가나는 인간의 품격을 향상시켰다."(Maya Angelou)





미생(未生)의

문명

"송(宋)나라는 은(殷)나라 유민들로 구성된 나라인데 춘추시대 주(周)나라 문명을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제후국이다. 그렇지만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과거 유산에만 얽매임으로써 약한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송나라 사람은 선진국에 산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당시 사람들은 송나라 사람을 바보의 대명사쯤으로 여겼다. 그래서인지 선진시대 문헌을 보면 송나라 사람은 어리석은 인물의 표상으로 자주 등장한다... 송나라는 한때 화려한 국력을 꽃피웠던 나라여서인지 좋은 문화유산이 많았다. 갓과 같은 예모도 그 중에 하나이다. 이에 반해 당시 월나라는 머나먼 변방의 거의 야만 상태에 이었던 미개국이다.(김정탁)"


한 때 선진국이라는 미망에 도취돼있던 이가 각자의 '문화적 차이'를 모르고 자신에게 귀한 것이면 누구에게나 귀한 것일 거라 착각해서 낭패 본 이야기다. 부연하자면, 여기 숨겨진 코드는 첫째, 국가 간의 우열이 영속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한 시점의 영광에 취한 '차별적 인식과 처세'가 정치, 외교를 넘어 사회, 문화 영역에 까지 침투해 있었다는 것. 셋째, 그러나 그런 인지부조화는 현실에서는 결국에는 실패로 귀결된다는 것. 이 짧은 글만으로도 장자의 뇌가 얼마나 섹시한지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코로나도 섹시했다. 휘몰아치는 그 동선 끝에는 오래토록 우리가 '위대하다' 여겨 온 인간계의 금자탑들이 가차없이 무용해져 있었다. 범접할 수 없던 가치를 점유하고 있었던 '우월한 것'들은 코로나가 휩쓸고 간 불과 몇 개월 사이 그 존재 가치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표가 붙었다. '과학 문명'이후, 이 보다 더 위협적으로 인간 문명을 교란시킨 것이 있었던가? 이보다 더 전복적이었던 것이 있었던가? 우리가 기대하던 '찬란한 문명' 선진국들의 회심의 한방은 없었다. 그저 송나라의 갓처럼 속수무책 남루한 명성만 나부낄 뿐. 


한편, 코로나도 정의롭지는 않았다. 지금까지의 클리셰를 반복하는 그저그런 또 하나의 난폭한 점령자의 모습일 뿐. 따라서 폭력 앞에 늘 그래왔듯, 그 앞에 먼저 무릎 꿇은 것도 '약자'들이었다. 

의료 접근성이 취약한 빈곤한 나라와 그 국민이었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환자들, 사재기와 탈출에 불리한 가난한 자들이었으며, 기득권 사회에 진입하지 못해 불안정한 고용 현장을 떠돌며 전전긍긍하는 가정주부와 유색 인종, 난민들, 청년들이었다.

그런 비열하고 무자비한 진군 과정에서 코로나의 섹시함도 빛을 잃어 갔다. 저토록이나 자연 상태에 가까운 헐벗은 자들부터 공략한 걸로 봐서, 코로나가 그동안 오만하게 자연계를 유린하며 금자탑을 쌓아 온 무도한 악의 무리들을 응징하려 온 정의의 화신은 아닌 것이다. 다만, 헤프닝일 뿐.

그렇다면 그런 '개념없고 무원칙한' 재앙 앞에서 종국에 인간계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인간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코로나가 일으킨 거센 바람에 애써 감추어왔던 인간계의 민낯이 드러난 것이다. '문명'이라는 이불로 덮어 놓은 그 절단면에는 '야만'의 잔불들이 여전히 살아 깜빡이고 있었다. 우리가 그동안 '해결'하면서 '전진'해왔다고 믿었던 숱한 역사의 굴레와 질곡들이 사실은 '진화' 또는 '진보'라는 이름으로 대충 공구리쳐져 감추어져 있었을 뿐. 

코로나의 칼 끝에 절단된 인류사의 단면에는 우리가 '문명'이라 부르던 것들의 취약함과 기만성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절단면 위에서 두 가지 상반되는 가치 체계가 충돌하는 양상들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이론적으로, 개념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충돌하고 있는 '지금, 여기 현장'의 모습으로.


그러나 어쩌면, 바로 이 실존적 충돌의 현장에 우리 스스로를 구원할 열쇠가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본 월나라를 공략하는 데 실패한 송나라와 달리 성공한 사례도 있다. 아래 글에서 장자는 한 사람의 '품'의 넓이와 '격'의 깊이에 따라 한 나라의 명운이 달라지게도 하는 "발상의 전환"을 소개한다. 역시, 장자는 뇌섹남이다.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은 개발도상국 지역의 문화적, 정치적, 환경적 면을 고려하여, 삶의 질 향상과 빈곤 퇴치 등을 위해 적용되는 기술이다. 첨단기술과 하위기술의 중간 정도 기술이라 해서 중간기술, 또는 대안기술, 국경 없는 과학기술 로도 불린다.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저개발국에 적용된 적정기술은 물 부족, 질병, 빈곤, 문맹 등의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한다. 선진국에서도 적정기술은 소외 계층이 직면한 사회적 문제 해결에 유용한 기술 개발 방향성을 제시한다.

예컨대, 물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곳에서 큐드럼(Q drum)을 이용해 손쉽게 물 운반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오염된 물도 문제였다.그러자,큐드럼 안에 필터를 달아 오염된 물을 정수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큐드럼을 굴릴 때마다 물은 수차례 필터를 거치게 된다. 필터는 친환경 재료로 바이오 필터나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숯, 진흙, 짚을 활용한다. 큐드럼이 보급된 지역에서는 아이들의 학교 출석률과 진학률이 증가했다고 한다. 『적정기술_창의융합 프로젝트 아이디어북_조준동』




혼돈을 횡단하는 사유 방식

"발상의 전환"



지동설, 중력이론, 상대성이론,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었던 미시세계의 발견, 급기야 '과학적' 법칙과 질서가 통용되지 않는 혼돈의 가장자리 - 복잡계의 발견까지... 물리학이 이끌어 온 과학혁명의 여정은 그 파장이 결국엔 '과학'의 영역 너머 인류의 세계관을 강타하는 쓰나미가 되었다. 자연계의 전개과정은 어김없이 인간계의 발전과정에 침범하고 개입했던 것이다. 자연계의 의지로든, 인간의 발견에 의해서든. 그리고 그것이 곧 '문명의 경로'가 되었다.


무엇이 그런 문명의 경로가 끊어지지 않고 부단하게 지속될 수 있도록 도왔을까? 쿤의 사이클이 보여주듯이, 한 세계-그것이 미립자까지 다루는 과학의 세계든, 인간 사회의 세계이든-가 건강하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정상의 시기'와 '혁명의 시기'간의 밀당의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변증법에서 작용과 반작용의 운동에 따른 선순환 법칙이라는 것이고, 노자에 따르면 도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유'의 세계와 '무'의 세계의 꼬임이며, 주역에서는 시공간을 전개시켜가는 '음''양'의 상즉상입(대립과 융합)이다.


일단, 좀 거칠긴 하지만 이 모두를 넓은 바운더리의 교집합으로 묶어 '자연과 역사의 변증법적 발전 법칙'이라고 합의해 두자. 완생 문명을 향한 탐구 과정에서 미리 숙지하고 합의해야할 대전제다.


① 모든 것의 역사는 작용에 대한 반작용, 부정의 부정, 나아감과 물러남의 연속이자, 이미 충분히 성숙해져버린 자기 존재에 대한 부정과 전복을 통해서 아슬아슬 파멸과 추락의 경로를 비껴 간 결과물이다.

② 어제까지 '문명'의 얼굴을 한 것들이 오늘 '야만'의 얼굴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듯, 지금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는 '야만'의 얼굴들은 언젠가 우리가 다시 기꺼이 껴안으려 할 '문명'의 얼굴들일 것이다.


이 대전제를 움켜 쥐고 있어야 하는 까닭은, 야만과 문명이 뒤엉켜 충돌하고 있는 이 '혼돈의 가장자리'가 구원의 열쇠를 찾아 떠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 대전제를 기억한다면 코로나가 들춰 낸 혼돈의 단면 앞에서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어디로 부터 왔기에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지를 가늠할 혜안이 되어 줄 것이고, 단호하게 꺼뜨려 과거에 남겨둬야 할 잔불과 조심스레 살려가야 할 새 불씨를 가려낼 안목을 열어 줄 것이므로.


다시 쿤에게로 돌아가 보자. 지금 우리는 그 사이클의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 아직은 '표류'하기 시작한 '정상'의 단계일까? 아니면, '표류'상태임을 알리는 여러 시그널에도 불구하고 관성의 법칙만 작동되던 인간계에 대해 코로나가 '위기'를 확진한 '혁명'의 단계일까?





문명의 완생(完生)을 향한 '지금, 여기'의 한 걸음

"불부이기린不富以其隣"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얼떨결에 '전환기'(어쩌면 '혁명기')에 강제 소환 됐다. 늘 그래왔듯 이 함정을 벗어나 전화위복하여 오히려 문명의 진보로 나아가려면 장자 우화 속의 주인공들 같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불부이기린', <지산겸(地山謙)괘> 5효(六五)다.


"그 이웃으로부터 부(富)를 취하지 않으니, 침략과 정벌을 씀이 이로워서 이롭지 않음이 없다. (六五는 不富以其隣이니 利用侵伐 하여 无不利 하니라)"


이 외계어를 두고도 여러가지 해석이 있다. '이웃 때문에 부자가 될 수 없으니 그들을 침략한다' '이웃나라 때문에 난리를 만나 부유해질 수 없다' '부유하지 않아도 이웃을 이용한다'...

왕필은 "존위(尊位)에 거하여 겸손함과 순(順)함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부유하지 않으면서도 그 이웃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겸손함과 순함으로써 침략하고 정벌하면 정벌하는 대상이 모두 교만한 자와 역심(逆心)을 품은 자인 것이다."고 주석을 달았다.


평소 겸손한 처신을 통해 얻은 인심 덕에 부유하지 않아도 이웃을 정벌할 때 다른 이웃의 손을 쉽게 빌릴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런데, 그런 품성을 가진 자가 감히 다른 나라를 정벌한다는 것이 '도덕주의자' 성리학자들에겐 딜레마였다. 그래서 〈상전象傳〉에서는 “‘침략과 정벌을 씀이 이로움’은 복종하지 않는 자를 정벌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영민하신 왕필 선생은 이것만으로도 어째 명분이 아무래도 약하다고 보신 듯하다. 그래서 굳이 친절하게 부연 설명까지 붙여 주신다. 이웃의 힘까지 빌려 정벌하는 이유는 '교만'하거나, '역심을 품은 자'들이기 때문이라고.

과연 그럴까?해석이 이렇게 애매모호한 경우 더 명료한 의미에 접근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활용할 수 있다.



(1) 하나는

지괘(해당 효를 양▶음, 음▶양으로 바꾸는 효변의 결과로 나온 괘)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수산건(水山蹇)괘> 5효를 보자. "九五는 크게 어려움에 벗이 오도다. (大蹇 朋來 대건 붕래)"


"어려운 때를 당하여 홀로 험한 가운데에 있으니, 어려움이 큰 자이다. 그러므로 “크게 어렵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거함이 바른 자리(正位-양효가 홀수 자리에 있다는 말이다)를 잃지 않고 밟은 것이 중(中-상괘의 가운데인 5효가 양효이고, 대칭을 이루는 하괘의 가운데인 2효는 음효여서 각자 자리에 맞는 기질에다가 적절하게 호응까지 잘 맞다는 의미다)을 잃지 않아서 뛰어난 덕德을 지켜 절개를 변치 않으니, 동지 同志들이 모인다. 그러므로 “벗이 온다.”고 한 것이다."(왕필)


<수산건(水山蹇)괘>는 물 아래 산이 있는 괘이다. '물'은 험난함을 상징한다. 산에 막혀 잠룡으로 엎드려 있던 주무왕이 마침내 큰 산을 넘고 보니, 이번엔 떡하니 큰 물이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다. '섭대천(큰 강을 건넘-정벌, 전쟁, 이주 등을 의미)' 해야 마침내 대건(大蹇,천하가 처한 큰 역경의 시절)을 끝낼 수 있다. 다행히 건蹇의 5효는 능히 그런 자질을 갖추고 있는 자이다. '正位+中'이므로.


다만, 蹇은 산+강이라는 환경적 장애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절룩거리다'라는 의미도 있다. '절룩거리는' 다리로 혼자서는 '섭대천' 할 수 없다. 누군가에 의지해 힘을 합쳐야 가능하다. 이때, 구오는 '양효'여서 '음효'인 2효 4효 등과 친하기 쉽다. 더욱이 건괘에 처해 큰 산을 넘는 동안 5효인 주 무왕은 '正位+中'로서 바르게 처신하여, 1효 2효에 해당되는 약자나 이웃 나라들과 잘 지내 인심을 얻었고, 상괘 그룹에 속하는 은나라 주왕의 실정에 환멸을 느낀 은의 귀족들로부터도 은연중에 지지를 받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이 모두 와서 함께 할 것이다(朋來). 이것을 본괘인 겸괘에 응용해보자.


<겸괘>의 5효가 '겸'의 국면 동안에 '음효'로서 '불부이기린(不富以其隣)'의 태도로 덕업을 쌓으며 때를 기다린다. 그러나 머잖아 '섭대천' 할 결전의 순간에 '양효'의 기질을 드러내며 포효하면, '붕래'하여 더불어 '이용침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또 하나는

해당 괘의 역사적 배경서사를 찾아 그 맥락을 따라 추리해 보는 것이다. <겸괘>의 서사적 배경은 은나라와 주나라 교체기로 보인다. 망조가 들어가는 은나라의 영광을 주나라가 잠식해가는 과정에 대한 서사이다. '달도 차면 이지러진다' 했고, '영원한 제국은 없다' 하지 않았던가. 이 말들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무협 만화 앞 부분, 말 많은 프롤로그 읽는 기분으로 가볍게 쭈욱 훑어봐주자. 


이 서사는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하는 과정을 크게 세 부분으로 발췌-재구성해 본 것이다.


① 은 주나라의 문왕이 은(상) 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초석을 닦는 과정이다. 자신의 나라뿐만 아니라 인접한 국가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가는 지도자의 처세(리더십, 비르투...)에 대한 디테일들이 보인다. "공정한 판결을 청했다."ㅡ 고대 사회에서 주변 부족이나 나라의 인심과 복종을 얻을 수 있는 지도자인가는 영토나 권한에 대한 쟁의를 조정하는 그의 지혜와 역량에 달려있음이 여러 고대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솔로몬의 지혜>가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다.

② 는 영웅의 성장 서사에 필연적으로 끼어드는 '위기' 국면이다. 상나라 주왕의 폭정과 문왕(서백)의 옥사가 대비되며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음이 읽힌다.

③ 은 드디어 '섭대천'을 위해 강가에 이른 장면이다. 5효. '그 이웃으로 인해 부유해지지 않았으니(不富以其隣)', ①과 ②과정에서 아버지(문왕)의 덕업이 쌓이고 인심(민심)이 축적된 결과로 아들 무왕 대에 이르러 은의 주왕을 정벌하려는 결전의 순간에 마침내 주변의 세력과 마음을 총결집시켜낼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利用侵伐 无不利).


이제 이 전개 과정에서 종국에 무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제패하게 한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포석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불부이기린(不富以其隣)'. 무왕이 자신의 나라와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신뢰와 지지를 쌓아가는 과정의 핵심적인 처세이다.



(3)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발상의 전환'과' 不富以其隣'은 어떤 관계일까?

앞글에서 개혁이든 혁명이든 천하통일이든 그 모든 것은 '먹고사니즘'의 문제에서 빈정상하게 하는 일이 없을 때 가능하다고 했다. (윤여정이 던진 화두, '무지개'와 '최중最中')


그걸 은유적으로, 포괄적으로 표현한 것이 '불부이기린不富以其隣'이 아닐까?

이웃으로 인해서 부유해지지 않는다.

이웃의 부를 약탈하지 않는다.

이웃을 배제시키고 부당하게 부를 독점하지 않는다.

이웃을 기망하거나 겁박하여 불공정하게 거래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 문명의 여정은 '성장'과 '성취'의 이면에 당연한 듯 약탈과 배제와 독점을 정당화하는 과정이었다.

자연을 약탈하고, 약탈한 끝에 오늘 우리는 코로나와 대면하게 되었다.

이웃을 약탈하고 소외시키며 점점 더 강해졌고 부유해졌다.

그 끝에 '양극화'가 낳은 새로운 신분 사회가 도사리고 있다.


주나라의 모국 기나라와 문왕은 경주 최부자집의 가훈 같은 준칙을 세워 대대손손 주변에 덕을 베풀며 관계를 맺어 왔을 테다. 언젠가 도래할 그날에 대한 야심을 저고리 밑에 지긋이 가려둔 채. 왜?성리학자들의 생각처럼 '교만'하거나 '역심'을 품은 자를 응징해야 한다는 도덕적 양심과 이상 때문에? 놉!

"대업을 도모하기에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그저 이 질문에 대한 답일 뿐일 것이다. '세력'.


이 담백한 답은 어떤 도덕적 가치 판단도 존재하기 전, 확장과 축적이라는 인간의 본능으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다. 그런데 그 본능을 추구한 끝에 왜 누군가는 추락하고, 누군가는 비상하게 될까?

우리 안의 본능에는, '나'만 주연이고 이웃과 자연은 그저 포커스 아웃 돼버리는 본능이 있는가 하면, '나'는 이웃과 자연 그리고 우주 속의 많고 많은 점 중 다만 하나ㅡn분의 1의 존재일 뿐임을 자각하는 본능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 안에 꿈틀거리는 야망 혹은 욕망은 어떤 본능에서 비롯된 것인가?

당신은 본능의 노예인가? 본능의 지배자인가?


우리 안의 욕망이 만일, 송나라의 손트지 않는 약이라면...

전환기를 가로지르는 우리의 발상은 그 욕망의 '사용하는 바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장자의 나그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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