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만지어놓고 떠난 아이
내 삶의 전부, 서율이가 태어난지 벌써 40개월.
시험관으로 임신, 출산 후 단 한 번도 자연임신을 꿈꿔온 적 없었고, 그저 서율이 키우다가 '좀 살만하다 싶으면 냉동배아 이식하러 병원에 가야겠다.' 단순히 생각하고 지낸지도 3년, 남들은 연년생 아니면 두 살 터울로 동생 출산하 고 무난히 키우는 것 같은데 나는 좀처럼 아이 키우기가 쉽지 않았다.
쉽지 않은 게 아니라 죽을 맛이었다.
주부로 살아가며 육아를 전담하고 있던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워킹맘들의 삶에 비할바 아니겠지만 늘 11시-12시에 자고 7시 반에 일어나는(어른의 패턴과 같은) 아이와 늘 함께 하기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참 힘든 시간들이었다.
원래도 늘 피곤했지만 어느 날부턴가 초저녁이면 졸리고 머리만 닿으면 잠이 쏟아져 아이보다 먼저 잠드는 날이 반복되었는데, 어느 날 나는 호르몬이 요동을 치는지 기분이 다운되는 정도를 넘어서 갑자기 우울해지고 집에만 있고 싶어 졌다.
갑자기 왜 이럴까... 정신 차리고 달력을 보니 생리 예정일이 열흘이나 늦어졌고,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며 뭔가에 홀린 것처럼 배란테스트기를 손에 들었다.
나는 그동안 임신 테스트란 쓸 일이 없는 여자였다.
나팔관은 막혔고, ‘다낭성 난소증후군’이라는 이벤트가 있었기에 당연히 임신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 임테기는 사지도 않았고, 해보지도 않았는데 배란테스트기가 보이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테스트를 해보았더니 너무나 선명한 두줄이 보이는 게 아닌가? 바로 약국으로 달려가 초 민감한 임신테스트기를 사 왔다.
서율이 갖기 전 난임을 겪으며 수없이 임신 테스트의 한 줄을 보았고, 무너졌기에 임테기만 보아도 가슴이 울렁일 지경이라 망설여졌다. 긴장할 틈 없이 순식간에 두줄로 변한 임테기 앞에서 ‘내가 도대체 뭘 본거지?’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내가 자연임신이라니!! 시험관 아기 시술하러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니!!’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기쁜 마음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사람이 참 간사하단 말을 이때 쓰는 걸까?
‘서율이도 아직 잘 못 키우는데 둘째를 감당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남편에게는 임테기 사진을 보내주며 둘만의 기쁨을 나누었다.
남편이 고맙다며, 그 동안 둘째를 기다렸다는 듯 너무 행복해했고, 그 모습을 보며 나도 금세 행복감에 젖어들었지만, ‘어떻게 둘을 키우지? 자신이 없어.’ 이런 말을 참 자주 내뱉었다.
첫 임신 때는 시험관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병원에 갈 이벤트가 많고 어렵게 이식한 배아가 잘못될까 두려워 양가의 배려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찍이 임신 소식을 전했고, 별 탈 없이 출산까지 했는데, 둘째 소식은 좀 천천히 전하고 싶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질 않았고, 남편에게 시댁에는 천천히 알리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이미 소식을 전한 뒤였고 너무 기쁘신 듯한 음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며 통장 계좌번호를 부르라고 하시던 아버님.. (용돈 입금 플렉스) 그렇게 기다리셨는지 우리 며느리 너무 예쁜 짓 한다며 한껏 고조된 듯한 어머님의 음성까지.. 그렇게 행복한 임신 5주가 지나갔다.
나는 호르몬의 노예가 되었고 임신 초기라 그런지 잠도 쏟아지고, 1일 1식 하던 패턴도 바꾸어 열심히 끼니도 챙겨 먹고 약한 입덧까지 하며 7주 차 병원 가는 날만을 기다렸다. 아기 심장소리를 너무 듣고 싶었다.
첫 아이의 심장소리를 듣던 그 감동적인 순간도 기억이 나고, 서율이에게도 동생의 존재를 알렸기에 심장소리도 들려주고 싶었다.
아직 어리디 어린 서율이에게 동생의 존재를 조심스레 설명했고 서율이는 샘도 안 내고 아침이면 일어나 “동생아 안녕?”하며 뽀뽀도 해주고 인사도 해주었다.
우리는 태명도 짓고 “까꿍이, 순둥이” 중에서 무엇으로 결정할지 계속 고민했고 서율이가 까꿍이로 결정해주었기에 심장소리 듣고 오면 태명도 마음껏 불러주자며 7주 차만 기다리고 기다렸다.
예약을 했던 날 보다 3일 정도 먼저, 병원으로 향했다. 여자의 직감이라는 게 이렇게도 정확할 줄이야...
예약 날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병원에 가게 되었다.
나는 혼자서 가겠다고 했지만 남편도 역시 심장소리가 너무 듣고 싶은 나머지 회사도 땡땡이치고 중간에 병원으로 왔다. 나의 임신 스토리를 알고 있던 선생님은 너무 축하한다며 들뜬 목소리로 “자 우리 힘차게 심장 뛰는 소리 들어볼까요?” 하셨고 곧 모니터에 아기집이 보였다.
적막을 깨고 내가 물었다.
“아기가 없네요?”
너무 당황한 선생님은 “앗.. 왜 아기가 없죠? 음... 7주 후반이면 1센티는 되어야 하는데...”
말끝을 흐리신 선생님은 이내 초음파를 멈추었고, 설명을 시작했다. “고사란 이네요......”
“고사 난자예요?”
“네.. 고사란인데, 아기집만 있고 아기가 없어요.. 어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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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은 또 적막감만 맴돌았고, 그 적막을 깨고 내가 물었다. “그럼 이제 어찌하면 될까요?” 나는 울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남편도 신경이 쓰였고, 누군가의 앞에서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인지 꾹 참고 참으며 이성적인 질문만을 쏟아냈더니 선생님은 이내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더 씩씩하게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이 병원에서 명랑 쾌활하기로 소문난 분이셨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임신하면 다시 꼭 이 선생님께 와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고사난자'라는 말이 엄마의 책임처럼 들린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인지 자꾸만 '고사란'이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난임을 겪다보면 타인의 행동과 말에 예민해지지만 배려 역시 잘 알아차리게 된다.
"혹시 금식했어요? 오늘 바로 수술하고 가실래요?"
아기집이 남아있는 걸 제거하고 가라는 말이었다.
나도 참 촉이 있는 여자인지 아침에 물만 한잔했을 뿐 2주째 매일 챙겨 먹던 아침을 거른 채 병원에 왔다.
그 덕분에 다시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며 바로 수술대에 올랐다.
링거를 꼽고, 수면마취가 시작되자 바로 몽롱해졌고, 슬플 겨를도 없이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겨졌다.
마취에서 깨어가는데 오른쪽 베드에서는 무슨 일인지 누군가 하염없이 울고 있었고, 왼쪽 베드에서는 진통을 하고 있는지 아기가 곧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는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만나기도 전에 이별을 해야 하다니..
커튼을 사이에 둔 세 여자는 다른 운명 속에서 함께 울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터졌고, 오른쪽 베드에서 들려오는 큰 울음소리 덕에 조용히 아이를 보낸 슬픔을 쏟아낼 수 있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링거를 다 맞고 나서 나와 허탈한 미소로 남편과 만났고, 우리는 밥을 먹으러 갔다. 그래도 먹어야지, 곧 아이 하원 시간이 다가오는데 굶고 나갔다가는 놀이터에서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니...
서율이 하원 시간, 아이를 보자마자 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바로 놀이터로 달려가 노는 걸 보니 금세 나도 마음이 진정되며 '네가 있어서 너무너무 다행이다.' 싶어서 서율이에게 너무나 감사했다.
아이는 정말 축복이다. 그러니 서율이의 존재가 얼마나 더 귀하게 느껴지는지 내 두 번째 아이를 통해 느끼게 되었다. 사실 기다리던 임신이었지만, '둘을 어떻게 키우지?'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완벽하게 마음 정리가 되었다. 나는 둘째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조금 더 몸과 마음을 굳건히 한 뒤 아이를 만나야겠다.
나를 성숙하게 해 주기 위해 잠시 곁에 머물려다가 떠난 나의 아가야.
다음번에 다시 찾아와 준다면 많이 행복해하고, 태명도 바로 지어주고, 몸도 많이 아낄게.
그날을 회상하며 잊지 않기 위한 나의 마음과 다짐을 꼭 글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기에 오늘까지만 울고, 이제부터는 울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