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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엽미술 May 23. 2021

카롤링거·오토 왕조, 로마네스크로의 이행

 중세 시대의 미술은 이른바 종교 미술의 시대라 할만하다. 때문에 동·서로마로의 분열, 이는 가톨릭이 동·서로 나뉘는 동시에 미술의 흐름 역시 동·서로 나뉘게 됨이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이 분열 이후, 동로마에서는 비잔틴 미술이 천년제국인 비잔틴의 멸망까지 이어지나, 서로마는 로마네스크 미술 경향의 등장 이전에는 그다지 언급되는 바가 많지 않다. 하지만 서로마에서 무슨 성상금지령이라도 내려진 것도 아니고, 서로마에서도 당연히 미술, 기독교 미술 활동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면 로마네스크 이전, 서로마 지역에서는 어떤 미술 작품이 있었을까?

 분열된 서로마 제국은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같은 명확한 구심점도 없이 외세에 멸망당하게 되고, 이후 이 서로마 지역에 다양한 왕국들이 생겨난다. 특히 오늘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의 전신이 되는 프랑크 왕국 또한 생겨나는데, 교황에 의해 이 프랑크 왕국의 왕이 서로마 황제로 추대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프랑크 왕국의 수도 '아헨'이 비잔틴의 콘스탄티노플에 가깝게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즉 로마네스크 이전의 서로마 미술을 찾으려면 바로 이 곳이란 말이시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카롤루스 대제의 재위 기간인 8세기 중후반에 시작되어 9세기 후반까지 이루어진 이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카롤루스 르네상스로도 불린다. 사실 르네상스라고 이름이 붙었으나 회화나 조각, 건축 같은 발전을 위한 투자가 이루어진 시기는 아니었다. 애초에 성직자들의 교양을 높이기 위한 목적을 가진, 순수한 교회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가 사용하는 언어가 라틴어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고전의 부활과 문화 부흥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작은 카롤루스 대제의 문화 진흥책이었다.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 카롤링거 르네상스 혹은 카롤루스 르네상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말했다시피 그리스어와 라틴어 독해가 가능한 학자의 양성이 목적이었고, 그리고 수도원에서 로마·그리스 필사본 제작이 이루어졌다. 그가 그의 치세 동안 많은 영토를 확보한 만큼, 이를 안정적으로 다루기 위한 노력의 하나였으리라.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거대해진 제국을 지탱할 정도로 안정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진 못했기에, 이후 프랑크 왕국은 나뉘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된다.

 르네상스의 의미는 부활과 재생이다. 때문에 카롤링거 르네상스 역시 이전의 것의 부활을 추구했다. 미술에 있어서는 로마 제국 초기 기독교 미술의 부활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때 유화 같은 발전한 미술 기법이 등장하지도 않았기에, 미술이래 봐야 필사본에 있는 삽화 정도이다. 그래도 우리는 여기서 이후 이어지는 경향과의 연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로마네스크의 종교 도상 중심의 도식화로 가는 과정 말이다.

 


■아헨 대성당

 8세기에 만들어진 아헨 대성당은, 현재 독일에 있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프랑크 왕국의 수도 아헨에 만들어진 성당이다. 또한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점 역시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러 부분이 각기 다른 시대에 지어졌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비잔틴 건축의 영향이 보이기도 하며, 고딕식으로 지어진 부분,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부분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의 공존을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 이를 지은 카롤루스 대제의 유골 또한 이 곳에 묻혀있다니, 이래저래 의의가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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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좌에 앉은 그리스도 : 고데스칼크의 전례용 복음서 채색본

781~783

 한 세밀화 화가의 의해 그려진 작품이다. 이 그림을 통해 초기 기독교 미술과 로마네스크 회화의 연결 부분에 이 카롤링거 왕조 미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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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레흐트 시편

 9세기 특히 820년대 만들어진 이 시편은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 미술과 로마네스크 회화의 연계를 보여주는 대표적 작품이자, 카롤링거 왕조 미술의 대표적 작품이다. 당시 중세 성경은 히브리어나 헬라어, 라틴어 본이 있었는데, 사실 이는 일반 신자들이 읽을 수 있던 물건이 아니었다. 때문에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러한 그림이 들어간 일종의 그림책을 만들게 된 것이다.


오토 왕조

 첫 황제였던 오토 1세의 이름을 따 오토 왕조 혹은 가문의 기원인 작센을 따라 작센 왕조로도 부른다. 거대한 영토를 유지할 안정적 시스템이 확립되지 못한 프랑크 왕국은 세 나라로 분열되게 된다. 서프랑크, 동프랑크, 중프랑크, 이 중 동프랑크, 즉 오늘날 독일 지역에서 일어난 게 오토 왕조이다. 사실 오토 왕조는 그 역사가 길지 않다. 때문에 여기서 다룰 부분 역시 11세기 초에 한정될 것이다. 그러나 오토 왕조가 카롤링거 미술을 이어받아서 이를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다.

 카롤루스 시대에는 회화 위주였다면, 오토 왕조에서는 밀납 주조법 등, 정교한 조각이 발전하게 된다. 그 내용에 있어서는 구약, 신약의 인간 창조와 구원, 타락 등 역시나 종교적인 내용이었다. 그 표현에 있어서 오히려 재밌는 부분을 찾을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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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바르트의 문, 성 미카엘 성당의 청동문 조각

1015

 다양한 기독교적 내용이 그려진 조각이다. 특이한 것은 의미를 갖는 사물들만 강조했다는 점이다. 나머지는 생략하고 간략화하였다. 이를 통해 극적인 주제가 더욱 강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왼쪽 문 4번째 칸을 보면, 이는 원죄를 범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에게 변명을 하는 장면인데, 주제가 되는 아담과 이브 그리고 뱀 등은 표현해놨지만, 그 이외의 배경 따위는 과감히 생략한 것을 볼 수 있다. 또 오토 왕조는 표현주의적인 특성을 보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바로 비례가 무너져있다는 것이다. 비례가 무시되는 것은 아담과 이브의 육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현대 미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극적인 비례 파괴는 아니더라도, 다소 왜곡된 육체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성 미카엘 수도원

1001~1031

 위 청동문이 있는 수도원이다. 오토 왕조의 시기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유행했던 시기와 겹친다. 로마네스크 경향이 나타난 것이 대충 1000~1200년경 정도로 볼 수 있는데, 이는 오토 왕조가 있던 시기인 것이다. 또한 이 성 미카엘 수도원 역시 초기 로마네스크 건축물로 뽑힌다.


 학교 교육에서 세계사를 다루다 보면, 해당 교과서에서 중요히 다루지 않는 부분은 많이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세계적으로 권력을 지닌 국가들에 대한 역사는 꽤나 자세히 다루지만, 아프리카 혹은 중앙유라시아의 국가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이는 미술사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술사를 훅 훑어보다 보면, 그 사이의 빈틈보다는 큰 덩어리째로 떼어서 보게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실 역사는 칼로 자르듯 베어지는 구분되는 것이 아닌, 거대한 흐름의 연속이다. 카롤링거 왕조의 경향을 이어받아 발전시킨 오토 왕조, 그리고 그 오토 왕조에서 이후의 경향으로 보이는 로마네스크의 건축 양식이 보인다. 이렇듯 역사는 서로 겹치고 겹쳐있는 것이기 마련이다. 사실 역사의 재미는 이러한 흐름의 연속을 찾아는 맛에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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