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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Jun 08. 2024

터무니없이 따뜻하고 소소한 일상물이 읽고 싶어져서

나선계단의 앨리스 - 가노 도모코 (손안의책)  ●●●●●●●●○○


그렇다고 해도 이미 이전처럼 쓰기만 한 커피 따위는
마실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가 일찍이 그리던 탐정사무소라는 건 결코 이런 식이 아니었다. 이 상황은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 - 좀더 확실히 말하자면 추락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니키가 품은 일종의 꺼림칙한 마음은 아마도 그 대부분이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 어이, 니키 준페이. 정말로 이대로 괜찮은 건가? 이게, 네가 바라던 일인가? 많은 월급을 주는 대기업을 이제 와 그만두면서까지 바랐던 것은, 프릴과 레이스와 꽃무늬 티 포트였나? 그건 아닐텐데.... 그렇지 않았을거다. 

   머릿속에서는 자신의 목소리가 항상 그렇게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미 이전처럼 쓰기만 한 커피 따위는 마실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 p. 193. 아이 방의 앨리스




   . '전직퇴직자 지원제도' 

      50세 이상이거나 근속 30년 이상 직원 해당.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사업자를 하는 이에게 사업이 궤도에 오르는 1년 동안 급여와 수당을 동일하게 지급. 1년 후 퇴직금 지급. 

       단, 헤드헌팅 등 전직은 불가.


   . 여기, 읽자마자 등골이 싸해지는 동조선식 구조조정에 무려 '그럼 난 사립탐정 사무소를 내겠다'고 맞불을 놓은 50대가 있다. 회사 입장에서야 이런 제안을 덥석 물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마냥 반가운 일이어야 할텐데, 그럼에도 이건 차마 생각못했다는 당혹스러움이 사내에 퍼지는 가운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린 시절의 꿈을 찾아 나온 니키 준페이. 당연히 무턱대고 연 탐정사무실에는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더없이 현실적인 사흘이 지나고, 첫 방문자가 나타난다. 얼굴 한가득 근심걱정을 담은 손님이나 무섭게 생긴 협박범이 아닌, 고양이를 품에 안은 아리사라는 이름의 갓 스물이 된 소녀(?)가. 그렇게 아리사 - 앨리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 유독 추리소설 중에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패러디하거나 모티브로 삼는 소설이 많다. 몇 년 전 추리소설로선 거의 있을 수 없는 기적적인 역주행을 한 고바야시 야스미의 '앨리스 죽이기'나, 읽어본 적은 없지만 '앨리스 더 원더 킬러'라는 소설도 있고, 소설은 아니지만 미스테리 성격을 띠는 게임 중에서는 '문호와 알케미스트'라는 게임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한참 앞에 이 '앨리스 시리즈'가 있고. 보통 최근에 나오는 작품들은 원작의 기묘한 맛이나 상징적이고 해석할 여지가 많은 내용, 이상하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한 캐릭터들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소설은 앨리스 시리즈의 가장 달콤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가지고 온 것 같으면서도 중간중간 현실의 무게가 느껴지는 부분들에 손이 멈춰지곤 한다. 





   그건 그렇고, 아기 손톱이 이렇게나 빨리 자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너무 자르지 않도록, 물론 손가락을 자르거나 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잘라 준 손톱이 다음날에는 이미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사가 신경 쓰던 할퀸 상처 같은 건,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아기의 신진대사는 아메바의 증식을 방불케 하는, 실로 무시무시하다는 한 마디로 요약된다. 그러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자라는 것도 당연하다고 니키는 묘하게 납득했다. 

                                                                                                                               - p. 203. 아이 방의 앨리스





   . 아무리 일상물이라지만 옆 건물 입주민이나 원래 다니던 직장의 뒤치닥거리, 심지어는 아직 철들지 않은 남편의 꿈이 깨질까 걱정하는 아내의 알선에 이르기까지 너무나도 현실적인 사건들에 정말 일반인이 탐정사무소를 차렸다간 굶어죽기 딱 좋겠구나(^^;) 싶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그래서 까딱 잘못했다간 징그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탐정과 조수의 조합도 전혀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한 가족이 서로 간의 신뢰를 확인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한 소녀를 돕는다. 물론 탐정사무소이니만큼 모든 사건이 - 사건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이 마냥 달콤할 수야 없겠지만 씁쓸함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진심을 엿볼 수 있다. '추리를 위한 추리', '잘 먹히는 키워드'에 의존하는 일상물에 지쳐서 진짜 따뜻하고 소소한 '일상'이 읽고 싶어진다면, 꼭 읽어봐야 할 이야기다. :)




   "그리고 여기에 또 한 사람, 맹렬히 화를 내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인형처럼 예쁜 옷들이 이것저것 입혀지고, 사진을 찍히고, 어린 시절부터 미래의 남편이 결정되고, 그런건가보다 하고 자라왔고. 그게 어느 날 갑자기 자신과 상관없는 사정 때문에 '그 얘기는 없던 걸로 한다'는 말을 듣고.... 결국 의문을 갖게 된 거죠. 자신이 인형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거예요." 

                                                                                                                               - p. 257. 앨리스가 없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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