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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Jun 16. 2024

부진에 빠졌을 땐, 가장 잘하던 것부터 하나하나씩

죽은 자의 어리석음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우리들이 모르는 일을 실로 많이 알고 있는 여자입니다."



   "분명히 뭔가 단서가 되는 것을 당신이 들었든지 눈치챘다는 걸 나로서도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았다든지 들었다든지, 혹은 눈치챈 것이 무엇인지 당신 자신도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 듯 하고. 당신은 단지 그 결과를 눈치채고 있을 뿐이지요. 내 식으로 말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어떤 건지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직감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모르죠." 

                                                                                                                                                            - p. 23.




   . 1950년대 초중반은 (내가 꼽는) 애거서 크리스티 여사 최악의 암흑기다. 전쟁이 끝난 후 나온 '비뚤어진 집'과 '예고살인' 두 명작 이후 5년여 동안 크리스티 여사는 그냥그런 단편집과 엉망인 스파이물과 들쭉날쭉한 장편을 냈고, 그 부진은 1년에 두 권씩 출간하던 페이스를 한 권으로 줄여 집필 기간을 늘인 이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 그래서 나 역시도 밋밋함과 졸작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책들 사이에서 영국 사회의 변화를 읽어내보기도 하고, 유머에 집중하기도 하고, 다른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찾아내기도 하는 등 이런저런 깨알같은 부분에 집중하며 책을 읽어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아무래도 졸작을 계속 읽다보면 읽는 사람도 슬럼프 비슷한 느낌에 빠지기도 하고 해서. :) 하지만 그런 소설들을 죽 읽어가다보면, 반대로 조금만 괜찮은데 싶은 책을 읽으면 눈이 반짝 뜨인다. 내겐 이 '죽은 자의 어리석음'이 그런 소설이었다. 처음부터 포와로가 등장해서 적극적으로 사건을에 뛰어들고, 더 이상의 '참신한' 시도 없이 지극히 '확실한' 사건이 벌어져 이야기가 정석적으로 진행되어 간다. 





   "시체의 현장은 실로 간단해요. 스카프와 배낭이 하나 놓여 있으면 되니까요. 그리고 그녀가 해야 하는 행동이란 단지 발걸음 소리가 들리면 마룻바닥에 픽 쓰러져서 목에 끈을 감는 일이죠.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발견되기까지 그 보트 창고 안에 가만히 숨어 있으면 되는 거예요. 꽤 지루한 역을 맡은 셈이지만, 지루함을 참게 하기 위해서 재미있는 만화 몇 권을 안겨주기로 했어요. 그 중에 한 권에는 단서가 쓰여 있긴 하지만.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잘 진행되어 가고 있어요." 

                                                                                                                                                            - p. 29.

   




   . 올리버 부인이 기획한 작은 지방 마을의 범인찾기 놀이에서 범인 역을 맡은 소녀가 살해당하고, 곧이어 그 마을 지주의 부인이 외국에서 돌아온다는 사촌을 두려워하다가 실종된다.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마을에서 살아왔다는 한 노인이 실족사한다. 모호함도 없고 변화구도 없다. 이 셋을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이 셋의 죽음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을까. 이들 주변의 사람들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간만에 35년 전 크리스티 여사가 처음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보여줬던 작가와 독자와의 머리싸움의 원형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 다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명작이라는 건 아니다. 솔직히 수작에도 턱없이 못미친다. 이야기는 너무 늘어놓아져 있고, 미스디렉션을 위한 장치는 딱히 기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비중만 높다. 사건에 대한 묘사는 길지만 정작 제대로 된 설명은 없고, 사건들 간의 밸런스도 한쪽에 지나치게 쏠려 있다 등등. 평점이 보여주는 것처럼 전반적으로는 별로지만 부분부분 읽을만한 곳이 있었다 정도일까. 사실 이 소설이 1930년대 포와로의 - 그리고 크리스티 여사 전성기의 한가운데에 나온 소설이라면, 이보다 훨씬 박하고 짧은 평을 한 채 그대로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잇따른 망작 뒤에 나온 소설이라 되려 이득을 본 부분도 있다. :) 





   "나는 이렇게 생각해요, 친구. 스터브스 부인은 죽었습니다. 어째서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건 말이죠, 폴리엇 부인이 그렇게 단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인이 입으로는 무슨 말을 하든, 또 전혀 반대쪽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이 가장하고 있든, 그 부인은 하티 스터브스의 죽음을 믿고 있습니다. 폴리엇 부인이라는 사람은 말이죠." 포와로는 덧붙였다. "우리들이 모르는 일을 실로 많이 알고 있는 여자입니다."

                                                                                                                                                          - p. 175.

   



   .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런저런 서툰 시도를 하던 크리스티 여사가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가고, 그 가파른 변화 속에서 자신의 소설이 마냥 낡은 것처럼 느껴져도, 결국 자신의 원점은 탐정이 나오는 정통추리와 범인찾기에 있다는 걸 인정하고 다시 이를 갈고 닦는 시작점이라는 느낌이라. 실제 이 소설이 나온 이후 70대의 크리스티 여사는 '누명', '깨어진 거울', '끝없는 밤', '버트램 호텔에서', '복수의 여신' 등 무서울 정도의 페이스로 명작과 걸작을 쏟아내기 시작하니.... 이 소설 하나로 슬럼프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슬슬 슬럼프의 출구가 보이는 지점에 선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러니 여사님 화이팅, 그리고 여기까지 어찌저찌 따라 읽어 온 나도 화이팅(....)





   "그래서요? 자, 얘기해보시죠." 경감의 말투는 애원조였다. 그는 탐정소설 작가라는 인물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이 부인을 만나기 전까진 전혀 몰랐다. 올리버 부인에게 마흔 권이 넘는 작품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상태라면 백 권이 넘는 저서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 p.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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