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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Jun 22. 2024

기능에서 표현으로, 그리고 또 어딘가로

공간이 만든 공간 - 유현준(을유문화사)  ●●●●●●●◐○○



빈 공간이 구축되는 형식과 모양을 보면
만든 사람의 생각과 문화를 비추어 볼 수 있다.



   단순히 물체만 만드는 것은 조각이다. 건축이 조각과 다른 점은 건축은 빈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물체를 만드는 행위라는 점이다. 인간은 건축물이라는 물체를 만들고 그 물체가 만든 빈 공간을 인간이 사용한다. 빈 공간을 프레임하기 위한 물체를 만드는 일은 엄청나게 큰 에너지와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의 지혜를 모아야 하고, 크게는 사회적 동의가 있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빈 공간이 구축되는 형식과 모양을 보면 만든 사람의 생각과 문화를 비추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공간을 분석하고 이해하면 사람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사람의 생각이 어떻게 발생하고, 서로 다른 생각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융합되고 어떻게 생각의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지 추리해보는 책이다. 이 추리의 과정에서 건축의 빈 공간의 특징은 중요한 물질적 단서와 증거가 된다. 

                                                                                                   - p. 34. 왜 건축물의 빈 공간을 보아야 하는가




   . 얼마 전에 윌 곰퍼츠의 '발칙한 현대미술사'를 리뷰하면서 이제 사진의 발달로 인해 현대미술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는 것이 되었고 '새로운 것'을 만들기보다는 '개량'하는 것이 되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건축 역시도 분야만 다를 뿐 유사한 과정을 밟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래 건축은 환경을 반영하여 사람이 살고 모이게 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었지만, 20세기 들면서 건축가의 '표현'을 반영하는데 치중하게 되었고, 자연히 건축가들은 '자신만의 것'을 드러내기 위해 나와 다른 이들의 건축을 흡수하고 융합해간다. 이런 흡수와 융합은 시대와 장소를 망라하여 이뤄진다. 


   . 그들은 지구 반대편, 혹은 몇백년 전 건축물들의 설계도(?)들을 나란히 펼쳐놓고, 특징이 될만한 부분을 하나하나 추출하고 융합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새로운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처마와 지붕을 강조했고, 반 데어 로에와 르 코르뷔지에는 벽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건축을 꾸준히 시도했으며, 안도 다다오는 이와 반대로 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나눔으로써 움직임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전통 건축과 달리, 안도의 건축에서는 수직적인 이동을 더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안도의 디자인은 일본 전통 건축의 2차원적인 '시간 죽이기' 기법에 3차원적인 수직적 변화를 첨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의 교회'에서 보면, 안도는 오르락내리락 하는 계단을 단순히 지형에 순응하기 위해서가 아닌, 시간을 지연하고 파노라마 장면을 유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높이에서 다양한 장면을 연출할 수 있었다. 

                                                                                                             - p. 325. 신체를 측량기로 만드는 건축




   . 이러한 표현들이 주목과 갈채를 받게 됨에 따라 더 많은 이들은 자신만의 다른 목소리를 내놓으려고 한다. 구석구석을 찾아봐도 더 이상 '교배'할 거리가 떨어지자 과거와 미래에서 소재를 찾기도 하고, 아예 건축이라는 학문적 경계를 넘어 철학과 융합하겠다는 포부를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현대의 '읽는' 미술이 그렇듯, '표현을 위한' 건축 역시도 그 끝은 인간과 유리된 채 건축을 위한 건축만이 남을 수 밖에 없다는 딜레마에 다다르게 된다. 거기다 컴퓨터라는 너무나 편리한 도구가 일반화되면서, 컴퓨터를 사용한 결과물들은 점점 유사해져 간다. 도구에 결과물이 종속되어가는 것이다. 




   20세기 중반까지 지리적으로 이미 세계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이종 교배되지 않은 지역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됨으로써 '지역 간 이종 문화 교배'라는 문화 혁신의 동력이 소진되었고, 건축은 20세기 중반부터 국제주의 양식에 머무른 상태에서 발전의 정체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루이스 칸 같은 건축가는 새로운 문화 유전자를 오히려 과거에서 찾는 방식을 택했다. 

                                                                                                                     - p. 334. 지리적 이종교배의 종말




   . 이렇듯 책은 앞부분 절반에서는 역사와 환경에 적응해 온 건축의 흐름을 정리하고 있고, 그 뒤의 절반에서는 더 이상 종속적으로 환경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들의 표현의 결과물인 20세기 건축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전반부에선 마치 총, 균, 쇠의 건축 버전을 읽는 느낌도 들고. 사실 그렇다보니 이것도 건축 저것도 건축하는 식으로 끼워맞추기 하는 느낌이 없는 건 아니지만 - 일본과 조선의 상업발달의 차이가 2층 이상 건축물의 유무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는 등 - 거대한 흐름이 있고, 각각의 현상은 그 흐름에 적응한 결과라는 명쾌한 인과구조는 매력적으로 읽힌다. 총, 균, 쇠가 그랬던 것처럼. 




   높은 공간은 경우에 따라서 사회 권력의 최상층과 최하층이 사용했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의 등장으로 아무리 높은 곳도 화석 에너지를 사용하여 쉽게 올라갈 수 있게 되었고, 매일 올라가야 하는 주거 공간에서도 높은 곳은 권력을 가진 차지가 되었다. 이제 건축물로 지을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높게 지어서 사람이 공중의 공간을 이용하게 되었다. 이제 얼마나 효율적으로 높게 건물을 지을 것이냐는 문제만 남았다. 그리고 강철과 콘크리트 재료는 이전에는 지을 수 없었던 높은 층의 건물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 p. 210. 조경에서 시작된 서양 공간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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