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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Jun 23. 2024

사건과 범인과 로맨스, 세 가지의 추리 게임

패딩턴 발 4시 50분 - 애거서 크리스티(해문)  ●●●●●●●○○○


"사람들은 어디서나 대개 그 부류가 비슷비슷하니까요."



   "친절한 헨리 경." 그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언제나 그분은 정말로 친절해요. 사실 난 조금도 똑똑한 편은 아니랍니다 - 단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겠지요 - 알다시피 난 오랫동안 한 시골마을에서 살아왔으니까 말예요 - " 

   그녀가 아까보다는 침착함을 되찾은 태도로 말을 덧붙였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약간 불리한 점이 있기는 해요 - 언제나 현장에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어떤 살마을 보고 그와 비슷한 사람이 연상된다는 건 매우 도움이 되는 일이랍니다 - 사람들은 어디서나 대개 그 부류가 비슷하니까요. 그 점이 매우 유능한 안내자가 돼요." 

                                                                                                                                                          - p. 180.




   . 우연하게도 나란히 뻗어있던 선로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달리던 건너편 열차에서의 살인. 창문 너머로 목졸려 죽은 여인과 뒷모습만 슬쩍 보인 짙은 머리의 키 큰 남자. 그리고 다시 유유히 멀어져 가는 기차. 창문 너머 기차에 타고 있던 목격자의 신고를 받고 뒤늦게 역무원들과 경찰의 조사가 시작되지만 범인은 물론 시체조자 발견되지 않고, 당연히 살인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범행이 이뤄진 것조차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채 마무리될 뻔한 완전범죄. 하지만, 으레 그렇듯, 범인은 지독하게 운이 없다. 창문 너머로 살인을 목격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목격자의 절친한 친구가 다름 아닌 제인 마플이었기 때문이다. 


   . 직전에 읽은 '죽은 자의 어리석음'이 애거서 크리스티가 50년대 내내 빠져있던 슬럼프에서 이제 좀 벗어나나 싶은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면, 뒤이어 나온 이 '패딩턴 발 4시 50분'은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걸 알리는  크리스티 여사의 숨겨진 명작이다. 누가 범인인지를 밝히는 정통추리를 기반으로 여기에 가족극과 로맨스라는, 여사가 가장 장기로 삼는 요소가 고루고루 모아져 있다보니 기본부터 어느 정도 먹고 들어간다. 


   . 뿐만 아니라 정통추리라는 장르 특성상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초반 부분이 가장 지루할 수밖에 없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과연 정말 사건이 있었는가'를 오픈 게임(?)으로 짤막하게 준비하고, 그 과정에서 런던과 지방을 오가는 기차 노선과 시간표와 기차 여행 장면을 통해 철덕(....)들을 사로잡는다. 거기다 마플 양의 손발로 활약하는 '전문 가사외주 노동자' 루시 아이리스배로(하무라 아키라 캐릭터의 일부는 여기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닐까)라는 매력적인 인물을 등장시키는 등 초반을 재미있게 읽을만한 장치를 겹겹히 마련해두고 있다.


   . 그렇게 '오픈 게임'을 통해 시체가 숨겨져 있을 법한 대가족이 사는 장원을 추리해 낸 마플 양이 루시 아이리스배로를 그 집의 가정부로 보내면서 '누가 범인인가'를 추리하는 본게임이 시작된다. 아버지에게 한 번도 인정받지 못한 것을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마음에 품고 있는 구두쇠 노인과, 노인이 죽기 전까지는 유산을 상속할 수 없는 세 아들, 그리고 집안에서 조용히 시들어가는 딸, 아내를 잃은 채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사위, 그리고 변호사와 의사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뒤틀린 채로 굳어가던 그들 앞에 죽은 여자와 루시가 등장하면서 각자가 봉해놓고 있던 마음들이 새어나온다. 물론 크리스티 여사의 작품답게 그 마음이라는 건 범죄에만 국한되지는 않고, 덕분에 읽는 사람은 범인을 추리하는 건 물론이고 응답하라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러브라인도 추리해야 한다. :) 




   "루시 아이리스배로는 어떻습니까? 거기에도 역시 웨딩 벨(결혼) 같은 게 있습니까?" 

   "글쎄요." 마플 양이 말했다. "아마 그럴 가능성이 많을 거예요. 조금도 이상할 게 없지요." 

   "그들 가운데 누구를 택하게 될까요?" 더못 크래독이 말했다. 

   "모르시겠어요?" 마플 양이 물었다. 

   "전 모르겠습니다." 크래독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부인은 아시겠습니까?"

   "아, 예. 알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가 그를 향해 눈을 깜빡거려 보였다. 

                                                                                                                                                          - p. 290.





   . 사실 범인은 이런 류의 소설을 처음 읽는다면 좀 당황스럽게 느껴지겠지만 그동안 여사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왔다면 몇 번 나왔던 유형이기 때문에 미스디렉션이 밝혀지는 시점에선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고, 오히려 러브라인을 맞추는 게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더구나 사건의 진상이 확실히 밝혀지는 것과는 달리 이쪽은 암시만 하고 끝나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서 이 소설의 리뷰들을 보다보면 둘째다, 아니 넷째다, 혹시 사위인가? 하는 추리들이 많은데, 내 생각에는 러브라인 역시도 미스디렉션이 들어가 있고 정답은 전혀 다른 쪽이 아닌가 싶다.... 지만. 그 이상 얘기하면 스포가 되므로. 여기까지. :)




   "문제는 - " 마플 양이 말했다. "사람들이 탐욕스럽다는데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말이에요. 일이 시작되는 건 언제나 그런 식이지요. 애초부터 살인으로 시작하는 건 아니랍니다. 살인을 하고 싶지도 않을 뿐더러 생각조차 않지요. 단지 지나친 욕심이 생기고, 자기가 갖게 될 것보다 더 많은 걸 원하는 것, 바로 그게 시작이랍니다." -

                                                                                                                                                         -  p.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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