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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Jun 29. 2024

어쨌든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도 나도 모두도 그렇다.

인간의 굴레 - 서머셋 모옴(학원사)  ●●●●●●●●●○



"어째서 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나?"
"왜 그런지 무척 기뻤기 때문이에요."



   필립은 신기한 듯이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아주 동떨어져 버린 그들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무언가 슬펐다. 그 자신 얼마나 많은 것을 결심했고 더욱이 그 성과가 얼마나 빈약한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이제 다시 돌이켜 볼 방법도 없다. 지나가 버린 세월, 생각하면 모든 것은 오로지 허사였던 것 같았다. 더욱이 지금도 또 때묻지 않은 쾌활한 소년들이 그와 똑같은 길을 밟고 서 있는 것이다. 그가 학교를 떠난 지 아직 하루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 마음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적어도 이름쯤은 모두 알고 있었을 것 같은 이 고장에, 지금은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또다시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서 그때는 이 소년들이 바로 지금의 그 자신처럼 생판 낯선 남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해보아도 조금도 위안이 되어주지 않았다. 다만 인생의 공허함을 새삼 강하게 느끼게 될 뿐이었다. 

                                                                                                                                                          - p. 455.




   . 아, 너무 재미있었다. 25년 전에 나온 옛날 전집이라 깨알 같은 글씨가, 그것도 요즘 책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는 2단으로 꽉꽉 메워져 있는 게 무려 500쪽. 하지만 그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다리를 절긴 하지만 총명하고 자의식이 또렷한 소년이 공부와 신앙과 예술과 사랑과 가난을 차례차례 거치며 그럴싸한 꿈과 이상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결국은 평범하지만 건강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과정이, 훈훈하고 희망적이긴 커녕(?) 서머셋 모옴 특유의 비꼼 가득한 삐딱한 시선으로 빼곡이 쓰여져 있었다. 




   마침내 학교 생활이 끝나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느낄 것으로 예기했던 미칠 것 같은 환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교정을 거닐었다. 깊은 우수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기가 저지른 일이 어리석은 일이나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다시 교장 앞에 가서 학교에 머물겠노라고 말할 수도 없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굴욕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가 올바른 행동을 했는가 반성해보았다. 자기 자신과 또 모든 사정에 대해서도 어쩐지 불만스러웠다. 그는 사람이라는 것은 고집을 세우고 나면 언제나 꼭 후회하는 것일까 하고 혼자 뇌까려 보았다. 

                                                                                                                                                            - p. 76.


   "파리의 라틴 쿼터에서도 만났고 베를린이나 뮌헨 하숙집에서도 만났지. 페루 기아나나 아시시의 싸구려 호텔에도 있어. 플로렌스엘 가보라구, 보티첼리 앞에 수십 명이 떼를 지어 서 있고 로마에서는 시스틴 성당 벤치에 의젓하게 앉아 있지. 이탈리아에서는 포도주를 퍼마시고 이곳 독일에서는 엄청난 맥주를 과음하지. 놈들은 무엇이든 좋은 것이기만 하면 덮어놓고 감탄해. 그것이 무엇이든 말야. 그러면서 차차로 훌륭한 책을 쓰려는 거지. 생각해 봐요. 1백 47권의 훌륭한 책이 1백 47명의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슴 속에서 잠자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한 가지 슬픈 일은 이 숱한 훌륭한 책들이 실제로 한 권도 씌어질 성싶지 않다는 사실이지. 그래도 역시 세계는 활발하게 움직여." 

                                                                                                                                                            - p. 89.




   . 이런 류의 이야기라면 설령 환경은 어려울지언정 인물은 선한 게 보통이고 설령 중간에 불량스럽거나 잠시 타락했더라도 속물은 아닐텐데, 모옴의 펜에 걸리면 그런 거 없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환경도 아니다. 다리를 저는 건 안타깝지만 그럭저럭 후견인 역할을 하는 삼촌과 숙모도 있고, 부모가 물려준 유산도 어느 정도 있어서 (삼촌이 그 돈을 떼어먹은 것도 아니다) 흥청망청 쓸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자기가 꿈꾸던 길로 나갈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오히려 나중에는 유산을 가지고 투자하다가 쫄딱 망해서 삼촌의 돈을 간절히 바라기도 하고, 결국은 삼촌이 남겨준 유산으로 기사회생하기까지 하는 행운아에 가깝다(....) 




   요즈음도 가끔 노라를 생각하는 때가 있었다. 밀드레드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그녀였다. 그 여자 같으면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만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 여자라면 틀림없이 동정해 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그것도 부끄러웠다. 저쪽은 시종 잘해주었는데 이쪽이 지독한 짓을 해버린 것이다. '아아, 그 여자 하나만 지켰더라면!' 

                                                                                                                                                          - p. 315.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옴은 주인공을 통해 평범하고 살짝은 속물 같은 인간의 인생 그 자체를 그려낸다. 머리가 그럭저럭 좋기도 하고 남들과는 다른 꿈을 꾼다며 스스로를 차별화하지만 딱히 본인이 꿈꾸는 이상을 실현할 정도의 재능이 있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현실을 묵묵히 견뎌낼 의지도 딱히. 그 와중에 또 외모는 엄청 따져서 얼굴과 심성 중 하나라면 언제나 얼굴을 선택한다(....) 덕분에 전반부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만두는 등 하여간 포기의 연속이고, 후반부의 대부분은 버리고 버림당하고 애태우게 만들고 애태우는 막장드라마 그 자체다. 덕분에 읽는 사람이 오그라들 정도로 이불킥과 흑역사가 난무하고 그 덕에 거울을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그게 어느 방향이든 간에 주인공은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고 경험을 쌓고 나이를 먹으며 성장해간다. 딱히 무엇 하나 대단한 것 없는 그 과정이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져 있다. 




   "아무래도 전 화가로서는 도저히 성공할 것 같지 않아요. 이류 화가 따위가 되어봐야 별수도 없겠고, 차라리 그만둘까 하고 생각하는데요."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 필립은 순간 망설였다. 

   "아무래도, 제 생각 같아선 이 생활, 그 자체가 더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겁니다." 

   평온하고 둥그런 크론쇼의 얼굴이 싹 변했다. 입언저리가 별안간 축 처지고 두 눈은 멍하니 눈구멍 속으로 푹 꺼져들어 버렸다. 이상스러울 만큼 등이 굽고 갑자기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카페 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이 생활이 말인가?" 하고 소리쳤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런 생활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한 시간이라도 빨리 떠나는 걸세." 

   필립은 아연해져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감정 앞에서는 언제나 소심한 그는 순간적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고 있는 이 남자도 또 하나의 실패의 비극을 의미하는 것이다. 침묵이 흘렀다. 크론쇼도 또한 자신의 일생을 생각해 내고 있을 것이라고 필립은 생각했다. 찬란하고 희망에 불타던 청춘, 그리고 그 빛이 점점 사라져 가던 실망의 가지가지, 단조롭고 비참한 현재의 쾌락, 나아가서는 닥쳐올 암담한 장래, 아마도 이러한 것들을 차례차례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 뻔했다. 필립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쌓인 접시더미로 옮겨졌고 크론쇼의 시선도 또한 같은 것을 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 p. 205.


   프와네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다가 문득 마음이라도 변한 것처럼 그 자리에 멈추어서서 필립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말일세, 만약 자네가 내 의견을 듣고 싶다면 말해주겠네. 용기를 내서 다른 일을 해보도록 하는 거야. 좀 심한 말 같지만 이 말만은 해두겠네. 결국 내가 자네 나이만 했을 때, 만약 누군가 내게 이런 충고를 해준 사람이 있었더라면 나는 얼마나 고마웠을까 싶단 말일세. 그리고 틀림없이 그 충고를 따랐을걸세." 

   필립은 어리둥절해서 선생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프와네는 억지로 입술만으로 미소를 지었으나 그의 눈은 여전히 엄하고 슬픈듯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이미 때가 늦은 다음에 자신의 평범함을 깨닫는다는 것은 너무 참혹한 일일세. 안 그런가? 그렇게 되면 조금도 마음이 좋아지지 않지." 

                                                                                                                                                          - p. 208.


   "퍽 오래 걸렸군." 

   "죄송합니다. 왜 먼저 식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응, 기다리려고 했던 걸세. 여태껏 플레처 부인 집에 있었나?"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해지는 것을 구경하느라고 그만 시간 가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어째서 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나?" 

   "왜 그런지 무척 기뻤기 때문이에요."

                                                                                                                                                          - p. 208.




   . 서머셋 모옴은 '달과 6펜스'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 때만 해도 '그닥'과 '전혀'의 중간 정도였는데, 이 책은 한쪽한쪽을 넘기는 게 너무 즐거웠다. 거기다 어쨌건 인생을 다루는 내용이니만큼 적당한 메시지도 들어 있고. 정작 모옴은 작중에 등장하는 인물의 입을 빌려 내 소설은 따지고 보면 별 거 없는데 낚인 독자들은 그럴듯하게 봐주더라면서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뚝 떼지만. :) 융단 부분이 너무 노골적이었던 것만 빼면(그래서 일부 판본에선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주인공이 학교로 돌아온 장면이나 그 결말에 마음이 찡해지기도 했고.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샐리, 나와 결혼해주겠소?" 

   "당신이 원하시면." 

   "그럼 당신은 결혼하고 싶지 않단 말인가?" 

   "아니죠. 저도 물론 이젠 자기 집을 갖고 싶고, 또 그럴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필립은 빙긋 웃었다. 이제는 샐리의 성격도 어지간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그러한 태도에도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럼 나하고 결혼하는 게 싫단 말인가?" 

   "어머, 달리 결혼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럼, 이것으로 결정이 되었군."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들으시면 놀라실 거예요. 그렇죠?" 

   "아아, 난 행복해." 

   "저 배가 고파요." 

   "아아, 샐리!" 

   필립은 웃으면서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들은 일어나 미술관을 나왔다. 그리고 잠시 난간에 서서 트라팔가르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이륜마차들과 역마차들이 빗살처럼 왕래하고 사람들이 사방으로 바쁘게 오고 갔다. 태양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p. 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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