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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시울 Jun 30. 2024

누군가의 고생담을 이토록 바라게 되다니. :)

불온한 잠 - 와카타케 나나미(내친구의서재)  ●●●●●●●○○○



40대도 중반을 넘어가면 젊었을 적에는 상상도 못했던 사태가 일어난다.



   그렇게 되면 나도 준비할 의욕이 생긴다. 퇴원은 했지만 자택에서 요양 중인 도야마 대신에 창고에서 철도 미스테리 책이나 DVD를 긁어모으고, 리스트를 작성해 도야마에게 보내고, 그 작품이나 이 작품이 빠졌다는 도야마의 클레임에 대응하고 위장약을 먹었다. 열차 모형을 꺼내 상태를 확인하고, 피규어로 살인 현장을 만들고 사진을 찍어 도야마에게 보냈다. 피를 더 많이 뿌려달라는 도야마의 요청에 대응한 뒤 위장약을 먹었다. 철도 미스테리 토크쇼를 부탁한 작가에게 연락을 하고, 인터넷에서 작가가 좋아하는 것을 조사하고, 당일 차와 함께 낼 간식을 정하고, 사례금을 넣을 봉투를 준비했다. 도야마에게서는 주야 구분 없이 전화가 오고 위장약을 먹는다. 너무 바쁘다보니 간판 고양이 밥 주는 것을 깜빡해서 고양이 펀치를 얻어맞기도 한다. 

                                                                                                                            - p. 158. 도망친 철도 안내서




   . 살인곰 서점 시리즈를 차례차례 읽어나가면서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싶은 건, 와카타케 나나미는 어떻게 하면 하무라 아키라를 더 고생스럽게 굴릴 수 있을 지 하루종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 거라는 것이다. 거의 15년 만에 하무라 아키라의 신작이 나왔다길래 뒤도 안돌아보고 주문했더니 현실의 시간과 똑같이 열 다섯 살을 먹어버린 것부터가 그 시작이다. 덕분에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하무라 아키라 큰누님이라 부를 수 있게 됐지만. :)


   . 거기다 묘사는 쓸데없이(?) 현실적이라 사십견에 몸살에 감기에, 몸을 돌보지 않은 채 젊은 시절을 굴려진 40대가 달고 살만한 웬만한 질환은 다 달고 있고, 그런데도 15년 전과 똑같이 비정규직과 임시직을 전전한다. 아니. 15년 전과 똑같다는 건 요 몇년 새 서울수도권 집값이 폭등하면서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가 처한 상황처럼 실제 생활은 훨씬 팍팍해졌다는 것이다. 그나마 '추리소설 헌책방 & 사립탐정'이라는 추리소설 애호가라면 누구나 꿈꿀만한 일터를 구한 줄 알았더니 이제는 헌책방 주인까지 합세해서 '악의 없이' 하무라 아키라를 부려먹기 일쑤다(와카타케 나나미의 소설을 지금까지 따라온 독자들은 알겠지만, 그녀의 소설에선 저 악의가 없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호러다) 그렇게 '조용한 무더위'와 '이별의 수법'과 '녹슨 도르래'에 이어 마지막 '불온한 잠'에서까지 하무라 아키라의 고생담은 꾸준히 이어진다. 이 작가, 정말 주인공을 고생시키기로 작정했구나. :) 



   "철도물은 좋아하는 손님들이 많으니까요. 게다가 홈즈에서 크리스티, 크로프츠, 아유카와 데쓰야, 가미오카 부이치, 쓰지 마사키, 시마다 소지, 아리스가와 아리스, 가스미 류이치, 야마모토 코지 등 서점에 있는 책만 모아도 양이 상당할거예요. 창고 안쪽에 N게이지 철도 모형과 선로 세트가 있으니, 페어용 책을 모아둔 매대에 철도 모형을 설치해 달리게 하는 거예요. 피규어를 사용해서 사건 현장을 재현하는 것도 느낌이 있을 거고요." 

                                                                                                                            - p. 155. 도망친 철도 안내서




   . 그래도 이번 책이 하무라 아키라 2기 - '살인곰 서점 시리즈'의 마지막이라 그런건지, 이번 불온한 잠에서만큼은 간만에 들뜨고 신난 하무라 아키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살인곰 서점의 야심찬 이벤트, '철도 미스테리 페어'가 그것이다. 담냥염으로 병원에 실려간(그러니 아무튼 악의는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럴거다) 헌책방 주인 도야마가 꼭두새벽부터 업무전화를 걸어온다는 데에는 등골이 쌔하지만, 그래도 이정도 기획이면 탐정이기 이전에 미스테리 덕후인 하무라 아키라의 피가 끓어오른다. 홈즈에 크리스티에 크로프츠, 시마다 소지, 아리스가와 아리스 등 살인곰 서점에 있는 철도 미스테리물들을 죄다 끌어모으고, 철도 굿즈들을 배치하고, 열차모형에 피규어에 피까지 뿌려가며 서점에 살인 현장을 꾸민다. 지시를 받을 때마다 위장약을 먹어야 했다고 엄살을 피우긴 하지만, 정작 철야까지 해가면서 디테일에 목숨을 거는 건 하무라 아키라 본인이다. :) 


   . 물론 작가가 작가인지라 하하호호생글훈훈하게만 갈 리는 없다. 이번 페어의 핵심인, 무려 탄환 자국이 나 있는 초 희귀템인 'ABC 철도 안내서' - 그 ABC 맞다 - 가 사라지고, 그 와중에 하무라 아키라는 전기충격기에 또 한 방 맞고 기절,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작가. 주인공을 고생시키는 데는 정말 진심이라니까(....) 사라진 ABC 철도안내서를 겨우겨우 찾아낼 때마다 책은 어디론가 옮겨지고, 옮겨질 때마다 뭔가 꺼림직한 퍼즐이 맞춰지는데.... 그래도 역시나 하무라의 활약으로 미스테리 페어 현장에서 벌어진 대소동은 진압되고 사건은 '하무라 피날레'로 화려하게 마무리된다. 전기충격기 한 방을 제외하면(?) 별다른 쌩고생 없이(????) 끝났으니 살인곰 서점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친절한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나머지 세 편은 여느 때의 작가와 여느 때의 하무라긴 하지만. :) 그래도 원래 이야기 열 개가 있으면 아홉 번 정도는 주인공을 굴려야 이정도면 주인공도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하는 와카타케 나나미니까 이정도면 친절한 게 맞긴 맞지. 그런데, 정말 더 이상 기약이 없는 건 아니겠지? 교고쿠 나츠히코의 항설백물어나 미야베 미유키 여사님의 미시마야 시리즈를 잇는 하무라 아키라의 쌩고생 시리즈(난설백물어라고 부르면 적당하려나).... 어떻게 안될까? ㅠㅠ




   비 때문에 온몸이 축축해져서 차로 돌아와 짙은 갈색 수건으로 머리를 닦았다. 새치를 가려주는 헤어 매니큐어를 사용한 이래, 수건은 항상 갈색이나 짙은 남색이다. 40대도 중반을 넘어가면 젊었을 적에는 상상도 못했던 사태가 일어난다. 링거를 맞은 흔적이 1년이 지나도 남아 있다든가 흰 수건을 사용할 수 없게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 p. 7. 거품 속의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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