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굴레 - 태가트 머피(글항아리) ●●●●●●●●●○
자민당은 실제로 총선에서 50퍼센트의 득표를 한 경우가 매우 드물었지만
그 후 50년 동안 일본 의회를 절대적으로 장악했다.
자민당은 실제로 총선에서 50퍼센트의 득표를 한 경우가 매우 드물었지만 그 후 50년 동안 일본 의회를 절대적으로 장악했다. 그 첫 번째 요소는 입법 절차가 시작되는 중의원에서 농촌 선거구의 의석수가 농촌의 인구 비중에 비해 훨씬 더 많았다는 점이다. (중략) 두 번째 요소는 당시의 중선거구제에서는 각 선거구에서 복수의 중의원 의원들을 선출했다는 점이다. 각 선거구에서 한 명의 의원만 선출하는 일반적인 선거구 제도와 달리, 일본에서는 한 명의 유권자가 한 표만 행사함에도 불구하고 한 선거구에서 득표순으로 많은 다섯 명의 중의원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당선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 후보보다 반드시 더 많은 표를 얻을 필요는 없었다. 오직 당선권에 머무르기만 하면 되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내가 상대보다 더 뛰어난 후보임을 보여줄 필요도, 우리 당이 상대당보다 일본의 미래에 대해 더 뛰어난 비전을 제시할 필요도 별로 없었다. 단지 선거 당일에 필요한 숫자만큼의 지지자들이 투표장에 나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지지자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하는 것이었다.
자민당은 충분한 숫자의 농촌 선거구에서 자신들의 후보가 계속 당선될 수 있도록 자금력을 집중했다. 이런 작업에는 또한 주요 정부 부처들의 참여도 필요했다. 자민당이 뿌려대는 현금만으로는 선거에서의 승리를 보장하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각 부처는 예산을 농촌 지역으로 몰아주었고, 지역에 있는 자민당 의원들은 해당 부처들이 필요로 하는 예산의 배분을 국회에서 승인해주었다.
- p. 427. 정치.
. 생각해보면 우리는 일본 현대사에 대해 잘 모른다. 우리나라의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일본의 거품경제와 거품이 터진 후의 장기침체를 항상 언급하고, 총리의 망언이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촉각을 곤두세우긴 하지만 정작 버블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고 어떻게 터졌으며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망언이나 야스쿠니 참배를 누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이유로 하는지는 잘 모른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신사 참배 문제가 21세기에 들어서야 격화된 문제라는 것도, 자민당 중에서도 일부 계파에서 이용하는 것이라는 것도 잘 몰랐다. 그저 자민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는 계속 그랬겠거니 생각했다.
. 이 책은 극초반 부분을 제외한 600여 쪽의 분량을 2차대전 후의 일본을 서술하는 데에 할애하고 있다. 국내에 출간된 일본에 대한 책 대부분이 전국시대나 중일전쟁, 2차대전에 쏠려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은 정말 귀중하다. 흔히 우리에게 키워드로만 알려진 '한국전쟁 특수', '1955년 체제', '고도성장', '버블경제'등에 대해 그 배경에서부터 원인과 전개, 결과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허투로 넘기지 않고 세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패전의 폐허를 극복하기 위해 사실상 미국 시장에 의존하는 수출 주도 경제를 키우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독립한 많은 신생 개발도상국은 '수입 대체'를 주창하며 과거 식민지 시절 지배국에 의존하던 경제를 개혁하고, 국내 산업을 키우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일본에게 이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고 애쓰는 대신, 일본은 그 의존도를 유리하게 이용해서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산업과 기업을 키우는 다양한 제도를 만들어 발전시켰다.
- p. 198. 경제 기적.
. 처음에는 그 세세함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런 내용들이 철저하게 인과관계에 따라 설명되고 있기 때문에 초반의 몇몇 개념만 포기하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따라가면 그 다음부터는 아, 그렇구나, 그렇겠구나 하며 이야기가 풀려간다. GHQ의 재벌 해체부터 관료들의 국가 장악,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서 경제정책에만 올인할 수 있던 초기의 행운, 이로 인한 정치와 경제의 결합, 그 결과 찾아온 경제발전, 이에 대한 미국의 견제와 버블경제의 시작, 버블이 터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착륙을 시키기 위한 노력,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태거트 머피는 이 모든 게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뼈대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드라마나 만화를 통해 파편적으로 알고 있던 - 하게타카라든가, 시마 시리즈라든가, 올웨이즈 3번가의 석양이라든가 하는(^^;) 기존에 접했던 이야기들이 책을 읽는 동안 각각의 자리를 찾아들어간다.
엔화의 가치가 급격히 오르면 자칫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전통 수출주도형 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지고, 관료들의 지휘가 아닌 시장의 힘에 의해 경제 성과가 결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엔의 가치가 오르는 것을 막아야 했다. (중략) 핵심은 쓸데없는 공공사업에 의도적으로 돈을 낭비하는 것이었다. 낭비라고 한 것은 실제 공공사업 프로젝트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예산을 지출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프로젝트 자체가 경제적 효율성을 증가시키는 효과를 별로 가져오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출에는 수출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수익으로 인해 창출된 초과 수요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수익이 농촌의 '하얀 코끼리' 사업이 아니라 도시의 생활수준을 개선하는 데 사용되었더라면, 가계 수입이 늘어나 해외 수입품을 구매하기 시작하면서 엔화의 가치가 올라가는 리스크에 직면했을 것이다. (중략) 일본은 수출로부터 얻은 수익을 다나카의 지역구에 있는 작은 기차역에 커다란 보여주기식 역사 건물을 짓는 식으로 '낭비'함으로써, 늘어나는 무역 흑자가 엔화의 평가절상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끊었다.
- p. 444. 정치.
. 특히 이 책은 일본의 현대 정치사를 하나하나 읽어주는 몇 안되는 책이다. 사실 고이즈미 이전 총리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을까. 나만 해도 하루키 책을 읽다가 겨우 다나카 가쿠에이의 이름 정도만 들어본 정도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20세기 후반의 '풍운아' 오자와 이치로 같은 인물은 전혀 몰랐다. 아이러니한 건 히로가네 켄시의 '정치9단'이나,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은과 금' 같은 만화를 달달 외울 정도로 봤으면서도 정작 이 만화 주인공의 모델이 오자와 이치로라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정치9단의 카지 류스케는 오자와의 보통국가론을 그대로 읊는 인물이고, 은과 금에서는 아예 오자와의 이름을 따서 '이자와'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일본 정치사의 주요 사건을 그대로 본따와서 각색할 정도였는데도.
오자와는 일본이 '보통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통이라고 한 것은 일본이 '보통' 정치, '보통' 외교정책, 정치의 명확한 통제하에 있는 '보통' 군대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중략) 오자와는 두 가지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 돈을 뿌리는 능력이 아닌 명확한 정책 비전을 제시하는 능력으로 경쟁하는 진정한 양당제도 시스템과 (2) 정치에 의한 관료사회의 통제가 그것이다. 다나카는 강력한 정치인이라면 관료를 본인의 뜻에 따라 움직이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자와는 다나카의 정치수단을 단지 예산의 성심성 배분을 통해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치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사용하고자 했다.
- p. 464. 정치.
. 책의 후반부는 이런 오자와 이치로가 자민당 중심의 '1955년 체제'를 무너뜨렸지만 한 차례 주저앉았고, 그럼에도 다시금 부활해 민주당 정권 창출을 이끌었지만 고이즈미와 아베에게 차례로 패배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는 모습을 중심으로 일본의 정치사를 풀어낸다. 이는 관료 중심의 정치와 정치인 중심의 정치가 대립하는 과정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태평양 전쟁 지도자들의 후손과 그들에게 반대하는 이들간의 대립이기도 하다. 결국 이 대립이 격화되면서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한 과거사 문제가 현대 일본 정치의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고, 특히 21세기에 들어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우익 정치인'들은 이 이슈를 강경하게 주장하는 게 표가 된다는 걸 깨닫고 정권 유지를 위해 국제관계를 희생시키고 있다. 이런 구도를 모른다면 마치 같은 정치인들이 사과와 망언을 반복하며 말을 바꾸는 것처럼 보여지겠지만, 실제로는 사과하는 이들과 망언을 하는 이들이 처절한 정치싸움을 벌이며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마치 우리가 계속 정권교체를 거듭하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 스탠스를 달리하는 것처럼.
정치적 책략의 대가였던 고이즈미는 우정 민영화 법안의 부결이라는 악재를 거꾸로 이용해 총선에서 자민당의 압승을 이끌어냈다. 2005년 8월, 법안이 부결되자 그는 총리의 고유 권한을 발동해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총선을 실시하도록 했다. 고이즈미는 새로운 총선을 본인이 이끄는 개혁 세력과, 우정 민영화 법안을 가로막는 야당 연합 세력(그리고 자민당 내부의 반대 세력)사이의 대결 구도로 몰아갔다. 자민당 내부와 외부를 막론하고 자신의 정적들에게 시대착오적이라는 낙인을 찍었던 그의 솜씨에 대부분의 국민이 손을 들어주었고, 자민당은 선거에서 일본 정치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다나카의 정치 시스템이 마침내 완전히 붕괴한 것처럼 보였다. 2005년 총선 결과 자민당 안에 남아 있던 다나카 군단의 마지막 세력이 초토화되었고, 간 나오토와 오자와 이치로의 민주당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느껴질 만큼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그리고 고이즈미는 3선 총리라는 일본 정치에서 보기 드문 궁극의 영예를 얻었다.
- p. 487. 정치.
. 그래서 이 책을 읽고나면 우리가 일본에 대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누구를 상대로 어떤 외교를 펴야 하는지가 흐릿하게나마 펼쳐지는 느낌이다. 또한 개개인적으로는 코로나 기간 내내 폭등세로 일관하다 코로나가 끝난 후 등락을 거듭하던 부동산을 포함한 자산시장이 이제 또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시작한 초입에서, 우리의 현재와 일본의 버블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그렇기에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 지를 고민하고 예상할 수 있게 된다. E. H. 카가 말했던 것처럼 역사가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이 책은 국가는 물론 우리 개개인에 대한 더할나위 없이 '선명한 거울'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GHQ의 자이바쓰 해체 정책에 의해 자이바쓰는 경제 부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관료 기구처럼 변형되었다. 경제부처 내 혁신관료들의 직계후임은 1940년대 중반 폐허가 된 경제를 물려받았지만, 그들이 누리는 권력은 오히려 전쟁 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자이바쓰, 군대, 내무성과 같은 강력한 경쟁 기관들은 해체되었고, 도지 라인은 긴축 경제를 이끌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수단을 관료들에게 넘겼다. 도지는 당시 일본에서는 어떤 정권이었다고 해도 정치적 이유로 인해 불가능했을 정책들을 강제로 실행해버렸다. 긴축재정과 균형예산과 신뢰 가능한 고정환율이 그것이다.
평상시라면 이러한 정책의 조합은(2010년 초반 남유럽에서 보았듯이) 대규모 빈곤과 심지어 혁명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평상시가 아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미국은 군대에 보급하기 위해 무기를 제외한 모든 물자를 끝도 없이 발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납품을 받으면 달러로 대금을 지급했다. 일본인들은 이 전쟁 특수를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불렀다. 도지 라인에 더해 수출의 급증은 일본이 폐허가 된 경제를 재건하는 데 최상의 경제적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일본으로 쏟아져 들어온 달러는 해외 직접 투자에 의존하지 않고도 산업 재가동에 필요한 생산설비를 수입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따라서 일본은 국가 경제 운영의 최종 결정권을 스스로의 손안에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 p. 196. 경제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