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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시대를 준비하는 리더는 누구인가

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 노혜경(뜨인돌)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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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지혜와 상식으로 판별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가 기준이 된다.




정조가 왜 반대 세력을 극복하지 못했을까?정조의 문제점은 조금 전에 언급한 대로, 너무나 고독하고 비장한 군주였다는 점이다. 개혁은 엄청난 반대를 낳기 때문에 그것을 성공시키려면 단계적인 전략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각각의 단계마다 반대파를 설득하고 자기 편을 늘릴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말한 '여우의 지혜'이다. 하지만 정조에게는 이것이 부족했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뒤 신하에 대한 불신을 품었고, 결국 자신이 모든 걸 다 알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매사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정의롭고 가장 위대한 명군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 p. 134. 나는 군사다 : 정조, 미완의 개혁들





. 대충 15-20년 전 정도로 기억하는데, 당시의 정치바람 + 스타 수험강사들의 강의 + 몇몇 목소리 큰 역사 논객들의 주장을 등에 업고 정조가 일약 스타로 떠올랐던 시기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접근성 좋은 역사채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반인이 사료에 접근하기 쉬운 것도 아니어서 그런 몇몇이 목소리를 높이면 그런가보다하고 여론 전체가 기울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과정에서 광해군의 '백성을 위한' 중립외교나, 정조독살설을 포함한 영조-사도세자-정조와 노론 세력간의 대를 이은 갈등 같은 기존 학설을 부정하는 이야기들이 꽤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사극의 나라답게, 이런 떡밥들은 여지없이 영상화되어 재생산되었다.


. 그런 시각에서 정조를 다룬 대표적인 사극이 '이산'과, 특히 '한성별곡'이다. 이산은 정순왕후가 정조 말기에 노론쿠데타를 주도한 것으로 그리고 있으며, 한성별곡은 아예 정조 독살설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지금에야 정조가 심환지를 비롯한 노론 대신들을 자기 뜻대로 조종한 수많은 편지들이 발견되었고, 사실 그 편지들이 없더라도 실록을 조금만 찾아보면 그런 음모론들이 말도 안되는 불쏘시개(....)라는 걸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기에 더 이상 노론이나 정순왕후를 악의 축으로 설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영화 '사도'에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노론의 음모가 아닌 아버지 영조와 아들 사도세자의 성격차이와 교육방식의 갈등에서 온 것으로 그려냈고,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는 정순왕후를 더 이상 악역으로 설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물론 노론음모설을 앞장서서 주장했던 논객이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도의 내용에 대해 반박하는 일도 있었지만, 이제는 일반인들조차도 조금만 품을 들이면 그의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까.





정조의 최대 단점은 신하를 불신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피해의식,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늘 조급함이나 망설임으로 나타났다. 일이 잘 안 되면 정조는 늘 주위의 부하를 탓했다. 이런 분위기의 조직은 결코 역량을 최대로 발휘할 수 없고, 변화에도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정조가 매사에 엄청난 노력을 한 것은 분명하다. 정말 훌륭하고 탁월한 일도 많이 했다. 그러나 노력에 비해 가시적인 효과가 적었다. 특히나 정조 사후 조선 사회가 급속도로 혼란에 빠져들어 이른바 '세도정치'로 불리는 시기로 접어든 것은, 자신을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생각하는 리더십의 오류가 절대적인 원인이 되었다.

- p. 344. 정조, 내가 바로 만천명월주인옹이다





.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만물노론설'이 힘을 잃으면서 정조에 대한 평가도 조정되고 있다. 물론 정조는 기존의 고평가된 부분들을 빼더라도 인정받을 부분이 많은 훌륭한 군주지만, 한때 내세워졌던 '보수적인 신권에 맞섰지만 젊은 나이에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한 "비운의 개혁군주"'이미지는 상당부분 거둬졌다. 실제로 정조는 '문체반정'이나 '만천명월주인옹' 일화에서 보듯 누구보다도 유학적이고 보수적인 군주였으며, 재위기간 내내 권력을 독점하고 견제장치를 무력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정조가 죽자 무력화된 견제 시스템으로 인해 권력을 잡은 집단이 다른 계파들을 숙청하는 일이 반복되었고, 결국 소수계파에 의한 세도정치로 조선은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 노혜경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일성록 편찬이나 금난전권 폐지 같은 정조의 업적을 확실하게 언급하면서도, 통치기간 내내 권력을 독점하는데 치중했던 정조의 정치적 한계 역시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분명 정조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그 능력을 통해 정국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러나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던 18세기 말의 조선에 맞는 정책을 펴는 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정조 혼자서는 역부족인 일이었다. 결국 정조가 홀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만의 군대와 직속 세력을 키우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익숙한 과거의 질서를 고집하고, 당시 개화되던 새로운 문화를 통제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기존 군대는 갈수록 약화되었고 소외된 신료들의 반발이 커지면서 정조 시대의 정치는 전면에서는 폭탄 선언, 뒤로는 서신 정치라는 비정상적인 방식에 점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25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재위했으면서도 결국 그의 시대와 그의 개혁은 많은 문제점을 후대에 떠넘긴 채 '미완'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아쉽게 들릴 수도 있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정조에게 25년이 더 있었다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영조가 정말 놀라운 점은, 이렇게 목숨을 위협받는 위험한 상황에서, 더욱이 자신이 버리는 돌이 될 가능성이 지극히 높은 상황에서도 할 일을 다했다는 것이다. 민정을 살피고, 백성의 고통을 이해하고, 자신이 나중에 왕이 되면 펼칠 정책의 계획을 확실히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보통의 왕자였다면 이런 상황에서 민정을 살피고 국정 계획을 세우는 것 자체가 공포일 뿐 아니라, 자신이 세자로 선택되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만 증폭시켰을 것이다. 차라리 눈을 감고 외면해버리면 마음이 조금 편해지기도 한다. 혹여 세자가 몸이 약해 어쩌면 자신이 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다고 해도, 간신히 그 희망만 조심스레 품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영조의 특별한 성품, 그를 특별한 왕으로 만든 비결이 바로 이것이다. 절망적인 상황, 꿈을 가지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영조는 꿈을 가졌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계획까지 세웠다. 그 결과, 균역법과 탕평책처럼 백성이 가려워하는 곳을 긁어주는 여러가지 개혁 법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 p. 21. 왕이 되고프면 민정시찰을! 연잉군의 준비





. 18세기 후반이 정조의 시기였다면 그 앞의 50년은 영조의 시기였다. 향년 81세, 재위 52년으로 조선사에서 가장 장수한 군주이자 가장 오래 집권한 군주인 영조. 영조하면 가장 유명한 키워드는 당연히 '탕평'과 '사도'일 것이다.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숙종의 총애를 받아 형인 경종의 경쟁자가 되었고, 노론의 지지를 받으며 세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 대신 소론의 정치공세로 인해 죽기 직전의 처지에까지 몰렸던 영조. 언제 사약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던 위기의 상황에서 경종이 먼저 죽으면서 극적으로 왕위에 올랐지만 즉위 초부터 소론의 반발과 이인좌의 난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즉위한 지 30년이 지나서도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소론의 잔당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 거기다 드디어 반대파가 사라지고 정국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한 그 시점에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넣어 죽인 '임오화변'이 터진다. 임오화변에 대해서는 그동안 온갖 이야기가 있었고 (역시나) 노론음모설이 상당 기간 기승을 부리기도 했지만, 결국은 아버지와 아들의 성격차이와 교육문제로 인한 비극으로 정리되는 모양새다. 이렇듯 영조에 대해서는 탕평과 사도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 영조시대를 이야기하기엔 영조의 집권기간이 길어도 너무 길었다. 무엇보다 정치와 권력다툼에만 몰두해도 될 정도로, 영조 시기는 그렇게 태평한 시기가 아니었다.


. 종종 인터넷에서 '민중으로 살아남기에 최악의 시기'로 이야기되는 17세기. 임진왜란으로 온 국토가 피폐해진 상태에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차례로 겪고, 간신히 숨을 돌릴만하다 싶을 즈음 경신대기근이 조선을 직격한다. 2년에 걸친 냉해와 가뭄과 전염병으로 당시 조선 인구 1,500만 명 중 100만 명이 사망했다. 일반 백성 뿐 아니라 신하와 왕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배층이 사망할 정도로 가혹했던 대기근.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25년 후에 터진 을병대기근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1695년부터 1699년까지의 5년 동안 150만 명 가까운 이들이 사망한 최악의 대기근이었다. 겨우 50년 안쪽으로 인구의 7-10%가 죽어나가는 대기근이 두 번이나 발생했던 것이다. 다행히 을병대기근 이후 숙종이 20여년을 재위하면서 대동법 확대와 화폐경제 시행을 통해 경제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 놓긴 했지만, 대를 이은 영조 역시도 피폐해진 민생에 집중하고 전쟁과 기근으로 흐트러진 사회 체제를 바로 잡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었다.





찬반 양론이 팽팽했던 청계천 공사가 이렇게 대성공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건, 청계천 준설이 주변 사람들만의 이익이 아니라 서울 전체 주민의 이익이라는 점을 납득시킨 덕분이다. 우리는 보통 어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예상비용, 수익 등을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하지만 구성원으로 하여금 그 프로젝트가 궁극적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끔 하는 데에는 소홀하기 쉽다. 인간은 어떤 프로젝트가 바로 자기의 일이고 자기에게 구체적인 이익이 될 때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창의와 혁신에 관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법이다.

- p. 236. 반대가 많은 대형 사업, 관건은 공감이다





. 이 책에는 그런 시대적인 책무를 안고 있었던 영조가 펼쳤던 여러 정책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때까지의 낡은 법 체제를 완전히 처음부터 재편한 '속대전'의 편찬, 팽창하는 한양을 기능적으로 정비한 청계천 공사, 여염집 탈취 금지령과 사우를 타겟으로 한 서원 규제까지 영조는 시대 변화에 맞게 체제를 정비하고 변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조리들을 고쳐나갔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반발이 없을 수는 없었겠지만, 영조는 때와 상황에 맞게 기다림과 경청과 정치적인 기술을 발휘해가며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이를 통해 사회가 안정되었으며 백성들이 생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렇게 영조가 50년 간 다져놓은 체제와 쌓아놓은 경제력은 고스란히 정조 시대의 자산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 역사를 들춰보면 들춰볼수록, 눈에 확 들어오는 문구나 화려한 이상보다는, 묵묵히 체제를 보수하고 착실하게 곳간을 쌓아두는 것이야말로 위기 속에서 나라를 지탱하고 위기가 끝난 후의 발전과 변화를 준비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걸 알 수 있데 된다. 그렇게 이 책은 위기의 시대 한가운데에 있던 영조라는 인물을 통해 어떤 이가 진정한 지도자인지,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은 어떻게 변화에 대비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확인하게 해준다.





영조는 친경을 부활시키되 그것이 낡은 전통의 반복으로 끝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근엄하기만 했던 행사에 축제적인 성격을 더했다. 그래서 감옥의 죄수를 석방했고, 과거 시험도 열었던 것이다. 조선 사회는 축제 문화에 인색했다. 농업에서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근면과 절약이라고 생각했던 탓이다. 반면 유럽에서는 도시는 물론이고 농업이 중심인 작은 읍 규모의 마을에서도 전통적 축제를 치르는 곳이 많았다. 도시는 상공업과 무역의 중심이기에 당연하고, 농촌 마을도 이미 농산물이 상업과 연결되어 소비와 교류의 장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사회는 상공업이 확산되며 전통 농본 사회로부터 변화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상공업이 농업 발전의 적이자 망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탄하는 사람도 많았고, 상공업의 가능성과 재산 증식 노력을 보면서 더 절약하고 검약하면 상공업이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다. 농업적 마인드로 상공업을 본 것이다. 이런 현상은 사실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고정가치와 고루한 생각은 사회의 행동이 변해야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바뀜을 주도할 수 있는 것이 축제 문화다.

- p. 252. 전통의 부활, 재창조 : 영조의 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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