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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미술에서, 읽는 미술로, 그리고 대화하는 미술로

미학 오디세이 2권 - 진중권(휴머니스트) ●●●●●●●○○○

by 눈시울
미학 오디세이 2.jpg


작품은 '작가-텍스트-독자'의 게임이다.




예술계가 자격을 부여하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게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뒤샹이라는 예술가가 창조한 것은 무엇일까? 물론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예술 작품은 아닐거다.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샘을 만든 것은 변기 공장의 노동자들일테니까. 그럼 그는 과연 무엇을 창조한 걸까? 그것은 바로 '코드(Code)', 즉 하나의 변기를 예술 작품으로 간주하는 사회적 '관습'이다. 그가 '샘'을 전시회에 보냈을 때, 사회에는 아직 변기에 예술 작품의 자격을 부여하는 관습(코드)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엔 커튼이 드리워져야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예술계는 분명히 이 작품에 예술의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현대 미술에 관한 책을 들춰보라. 이 작품은 틀림없이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거다. 이 차이를 낳은 것은 무엇일까? 물론 변기를 전시회에 보낸 뒤샹의 장난이다. 이 장난을 통해 결국 그는 새로운 코드를 창조했다. 변기까지도 예술 작품으로 변신시킬 수 있는 그런 코드를....

- p. 202.




. 그동안 현대미술에 대한 책을 몇 권 리뷰하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현대로 오면 올수록 미술은 점점 대상에 대한 아름답고 정돈된 모방에서 작가의 의도가 우선시 되는 강렬한 메시지로 바뀌어갔다. 물론 르네상스나 그 이전의 중세시대라 해서 그림에 작가의 의도나 메시지가 없었을 리 없고 현대라 해서 모방이 없을 리 없겠지만,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대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 기존의 작법과 일반적인 인식보다는 작가 개개인의 눈과 손이 우선시된다. 그렇게 미술은 실제 자신의 눈에 보이는 색과 빛을 우선시한 인상주의(그 이전의 렘브란트를 잊어서는 안되겠다)와, 찰나마다 바뀌는 빛과 형태의 변화를 모두 잡아내려 했던 세잔을 거쳐 표현하려는 대상이 품고 있는 모든 속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세잔의 뜻은 이어받았지만 세잔의 방법론으로는 이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피카소와 마티스로 이어진다.





하나의 정물화를 그리기 위해 그는 100번의 작업을 필요로 했고, 하나의 초상화를 위해 모델을 150번이나 자리에 앉게 했다. 우리가 그의 작품이라 부르는 것도 사실 세잔 자신에겐 그림을 그리기 위한 습작에 불과했다. 왜 그래야했을까? 그건 그가 어쩜 이룰 수 없을지 모르는 목표를 추구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고전주의와 인상주의의 대립을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뚜렷한 윤곽과 고유색을 가진 대상의 항구적인 모습을 포착하라고 하는 고전주의의 요구와, 대상에 반사된 빛이 눈에 부딪힐 때의 순간적 인상을 포착하라는 인상주의의 요구를 어떻게 일치시킨단 말인가.

- p. 63.




. 그렇게 피카소와 마티스의 시대에 이르면, 흔히 미술작품이라고 할 때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일반적인 외형을 아름답게 모방'하는 시대는 끝이 난다. 화가들은 대상의 변화를 그려내고, 속성을 그려내며, 메시지를 그려낸다. 점점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 그림을 보는 이들 역시도 그림을, 그림 속에 담겨져 있는 메시지를, 그리고 화가의 눈에 투영된 대상을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보는 것에서 읽는 것으로 바뀔수록 읽는 이의 생각이 개입될 여지도 많아진다. 물론 읽기를 위한 기본적인 규칙(가이드라는 표현이 더 적당할지도 모르겠다)은 있다. 하지만 작가가 더 이상 대상의 정해진 형태를 따라가지 않는 것처럼, 독자 역시 작가의 눈과 생각을 전적으로 따라갈 이유가 없게 되었다. 이제 미술을 읽는 건 강의나 퀴즈가 아니다. 대화다. 논쟁이다.





놀이처럼 예술 작품도 닫혀 있으면서 동시에 열려 있다. 즉 작품의 텍스트 자체는 닫혀 있어 그 누구도 그걸 변경할 수는 없지만, 그 완결된 텍스트에서 저마다 다양한 의미를 끄집어낸다. 작품은 '작가-텍스트-독자'의 게임이다. 이 삼각형의 게임 속에서 독자는 늘 바뀐다. 물론 그때마다 게임의 내용과 의미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작품의 삶은 한번에 끝나는 게 아니다. 작품은 후세의 해석에 열려 있다. 따라서 작품이 가진 '근원적' 의미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시대마다 열어주는 각각의 의미가 다 근원적이다.

- p. 165.





. 개인적인 얘기를 잠깐 해보자면, 우연히 이 책을 읽는 중간에 미국여행을 갔고, 시간을 할애해 이런저런 미술관에 들렀다. 그렇게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세잔은 시각적 단편들을 마치 모자이크의 단편처럼 취급하여, 그림 속에 이 조각들을 하나의 구조적 전체로 짜맞추려고 했다" 라든가, "피카소는 대상으로부터 형태를 해방시켰다. 마티스는 거기서 색채를 해방시켰다", "더 이상 (칸딘스키의 시대에 이르면) 점, 선, 면이 합하여 구체적 형태를 이룰 필요가 없다. 대상을 재현하려 했던 고전적 회화는 재현대상을 가리키는 일종의 '기호'였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은 더 이상 그 무언가의 '기호'이기를 그친다. 기호의 성격을 잃은 이상, 작품은 논리적으로 일상적 사물과 구별되지 않고,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사물이 되어버린다. 여기서 현대 예술의 오브제화가 시작된다." 처럼 글로 읽을 땐 마냥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문장들이 이해가 간다. 그림을 작가의 상상을 통해 말로 변환하고, 말을 다시 독자의 상상을 통해 형태로 변환하는 과정은 생략되고, 그냥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 그들의 생각이 전달이 되는 것이다. 마치 예능 프로 '고요 속의 외침'에서 몸동작을 보고 문제를 맞추던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답지를 읽으면 바로 답을 알게 되는 것처럼. 그림을 글로 힘들게 '변환'해 준 저자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역시 그림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림을 보는 것이다. :)


. 이렇게 미학의 개념으로부터 시작해 인상파 이전까지의 미술사를 소개했던 1권과, 세잔과 피카소와 마티스를 소개하고 (살짝) 뒤샹을 언급하면서 모더니즘까지의 미술사를 다룬 2권이 끝이 났다. 2권의 끝에서 진중권은 주관과 객관, 이런저런 사상 간의 충돌을 이야기하면서 모순을 넘어 이들을 종합해 전체상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넋두리를 하지만, 이런 생각들이 으레 그렇듯 결국 '다양한' 관점을 '폭넓게' '종합'하는 수밖에 없다는 건, 어울리지 않게 화두 흉내를 내어 질문을 던진 저자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의례적으로 해본 말에 괜히 어울리다 주화입마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





예술은 순수한 상상력, 한갓 공상이 아니라 사물의 참모습의 '미메시스'다. 따라서 예술 작품이 주는 즐거움은 감각적 쾌감이 아니라 재인식의 즐거움이다. 또한 예술 작품의 해석은 작가인 천재의 의도를 그대로 재구성하는 게 아니다. 예술 작품은 독자가 참가해야 비로소 성립하는 '놀이'로, 이 안에서 독자는 텍스트의 규칙을 지키는 가운데 나름대로 의미를 끄집어낸다. 미메시스 놀이. 칸트 이후의 서구 형식미학에 대항하려고 했던 새로운 진리 미학의 핵심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 p.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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