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파줄게!
어릴 때부터 나는 엄마, 아빠, 오빠 심지어 친구들의 귀까지 파 주었다. 나름 학교에 소독솜과 귀이개를 가져가는 준비성까지 보이며.. 지금 생각하면 조금 웃기긴 하지만 귀를 파 주는 건 정말 재미있었다.
재미를 떠나서 조금 더 로맨틱하게 생각해보아도 좋았다. 흔히 드라마 속에서는 종종 '여자의 무릎에 누워있는 남자친구, 그 남자친구의 귀를 파주는 여자의 모습'이 달달하게 나온다.
하지만 남편에게 여러 번 물어보아도 늘 같은 대답이 왔다.
"아냐, 괜찮아~내가 할게!"
"냅둬 냅둬~~"
다정한 목소리와 말투 하지만 그의 다정하지 않은 거절에 조금 토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설득하기도 했다.
"아니 귀 파는 건 귀 청소하는 거라 오히려 깨끗한 거야. 이게 왜 싫어?"
몇 번의 반복된 거절을 받고 그 뒤로는 포기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것도 생리현상과 비슷한데.. 남편은 다른 생리현상은 큰 부끄러움 없이 자연스러운 걸로 받아들이며 하나씩 텄다. 그런데 그에게 유독 귓속은 보이고 싶지 않은 곳이었나 보다. 들키고 싶지 않은 구역이었나 보다.
생리현상을 들키다
5년 동안 아무 생리현상도 트지 않았던 내게 결혼생활은 어쩔 수 없이 생리현상을 들킬 수밖에 없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잠결에 들려온 내 소리에 수치스러워 잠이 깨고 슬쩍 남편을 보았다. 핸드폰 게임을 하며 아무렇지 않아 하는 남편의 모습에 뒤늦게 그의 얼굴을 가렸다.
"들었어? 들었냐구~~~ㅠㅠ"
내 속상한 목소리에 남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응? 뭐 어때~~ 자연스러운 건데~"
정말.. 남편이 단순하게 받아들여줘서 마음은 한결 편해졌지만 수치스러움이 여러 번 반복될 때마다 아직도 부끄럽고 힘들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상황을 남편의 상황과 대조해보면 남편도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나는 그걸 설득하며 강요하려고 했다니..^^
정말 미안하고 민망했다. 그래서 내 재미와 로망을 넣어두고 남편의 수치스러움을 지켜주기로 했다.
그런데 어쩌면 조금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귓속을 볼 권한을 내게도 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남편은 초기에는 등에 난 피부병도 못 보게 했으며, 초기의 나는 꼬르륵 거리는 내 눈치 없는 뱃속 소리도 듣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씩 우리의 생리현상을 부끄러움이 아닌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였다.
사람에 따라 수치스럽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부분이 다를 수 있으니 그 부분만은 터치하거나 설득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야겠다. 그리고 부끄러움이 자연스러움이 될 수 있도록 천천히 기다려 줄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서로 트지 않고 어느 정도는 지켜줬으면 하는 부분도 있다.
사람에 따라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기준이 다르듯이, 부부사이에 배려해줬으면 하는 생리현상의 기준도 다르기에 그 부분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를 나눴다. 다행히 우리는 둘 다 대놓고 생리현상을 트는 분위기가 아니라서 그런 부분으로 서로에게 실망하거나 짜증을 내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서로의 생리현상을 들킨다면 귀엽게 넘어가는 것뿐. 다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트는 범위가 넓어지거나 점점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다시 한번 조율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 부부, 내숭과 생리현상 어디까지?]
[나]
- 상대방의 생리현상은 귀엽게 봐주고 조용히 넘어가주자
- 상대방이 수치스러워하는 생리현상을 억지로 트라고 강요하지 말자
- 아무리 서로가 점점 편해진다고 해도, 상대가 싫어하는 상황(ex. 밥 먹을 때)에서는 너무 대놓고 생리현상을 트진 말자
[남편]
- 생리현상은 자연스러운 거니까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고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자
- 나는 생리현상으로 자기한테 환상이 깨지거나 싫어하지 않으니까 너무 억지로 힘들어하거나 숨기지 말고 조금씩 편해지면 좋겠어. 부부니까 서로가 조금씩 더 편해지면 좋을 거야
부부는 한 집에서 '서로 다른 둘'이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서로의 삐걱거림이 신경 쓰일 때도 있을 것이다. 사소한 것부터 거창한 것까지 모든 걸 맞추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맞추며 살아가는 그 자체를 의무감으로 생각하며 귀찮아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대신, 재미있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하나씩 솔직하게 털어놓는 대화가 쌓일수록 우리의 삐걱거림은 줄어들었고, 맞춰가는 시간들은 어느새 웃으며 이야기하는 소중한 추억거리가 되었다.
* 부부사이 조율일화 <돈, 육아, 생리현상, 스킨십, 시댁, 친정, 친구, 애정표현 등>은 꾸준히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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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