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 지 너무 오래되어 120일이 지났다는 알림을 받은 지 한 달이 넘게 지났다.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아니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내게 주어진 일은 이미 글 속에 파묻혀 살 수밖에 없게 했지만, 그 양식은 공문서에 갇혀 있고, 계획서와 보고서, 회의의 알림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나를 울타리 안에 두고 글을 다시 쓰려고 하니 글이 써질 리가 없었다. 갇혀있는 글에서 더 헤어 나올 자신조차 없었다.
매일 카페를 다니면서 글감을 꺼내보려고 했지만, 결국 도돌이표처럼 다시 공문서이고, 계획서였고, 보고서였다.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조차 오늘은 어떤 업무를 하였고, 내일은 어떤 업무를 해야 하고, 어떤 일은 마감일이 언제까지인지를 정리하는 주중 계획서이고, 월중 계획서였다.
쓰기를 멈춘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지만, 아무렇게나 쓰인 글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만큼 더 비참한 일은 없다. 나를 버려두는 행위 같았다. 그래서 '쓴다'라는 행위에 더 사명감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다 문득 카페에 앉아서 그저 쓰자, 뭐든 쓰자는 글들을 보고 있다가, 내가 쓴 글의 하찮음이 나의 하찮음보다 덜 하리라는 생각에 글을 다시 끄적여보기로 했다.
이렇게 글을 던져두고 또 며칠을 나의 하찮음에 젖어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의 글을 던지는 행위 자체가 나의 하찮음을 덜어내는 행위라고 스스로 위로해본다.
어떤 유명한 작가는 초고는 쓰레기와 같다고 하고, 퇴고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는 그 날 것의 투박함을 좋아한다. 물론 이 글을 다시 수정하고 수정하면서 나의 생각이 더 잘 드러나게 되고, 나의 생각이 더 투영되면 글이 더 유려해지고, 더 잘 읽히게 되고, 더 많이 읽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초고 또한 나고, 퇴고가 여러 번 된 원고 또한 나다.
첫날의 내가 내가 아닌 것이 아니듯, 둘째 날의 나도 내가 아니지 않다.
5월 어느 날의 나를 던져두고, 또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해봐야겠다.
다음, 어떤 날의 내가 또 쓸 맘이 생기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