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앓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요즘 꽤나 아팠다.
처음에 별 거 아니겠지, 하고 넘겼던 눈 알레르기가 시발점이 되어 얼굴 전체가 부어버렸고 고름 투성이의 눈 때문에 눈을 뜰 수 조차 없었다.
건조한 계절에서 습한 계절로 넘어가면 눈에 자주 이상이 생기는 편이라 익숙해서 무시했는데, 이번 에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 편두통으로까지 연결됐다. 몸에서 보내는 신호를 무시한 덕에 며칠 동안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다.
이렇듯 괜찮겠지, 하고 대충 넘기는 내 습관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타인에게 상처 받았던 말, 행동들에 대해 피곤하게 따지고 들기 싫어 상처를 축적하다 혼자 곪아 터지곤 한다.
정상적인 방식이라면 -혹은 건강한 방식이라면- 상대와 대화로 갈등을 풀고, 서로 왜 그랬는지 이해한 후 갈등의 시간을 밑거름 삼아 더 끈끈한 사이가 되겠지만, 관계에 대한 믿음이 없는 편인 나는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적당히 혹은 완전히 차단하는 것으로 끝을 낸다. 그래서, 유학 시절에는 관계로부터 오는 지리멸렬함을 영국으로 도망치는 것으로 털어냈는데, 한국에 정착한 이후로는 차단할 수 없는 관계들이 늘어나서 상처의 무게감도 짙어졌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별 거 아닌 것처럼 넘기는 일도 꽤나 익숙해진 모양이다.
최근엔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넘겨버렸던 문제들이 켜켜이 쌓여 목 밑까지 차올랐는데, 정작 나는 별 생각이 없다. 노력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도 않고 그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다.
그저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노력해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이렇게 살다 보면 어떻게든 결론이 나겠지, 라며 나는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을 적당히 넘겨버리고 있다.
그래도 과거의 나는 이런 태도를 어떻게든 고치고 싶었는지 ‘상처가 엉켜있는 실타래 같아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적어놨던데, 현재의 나는 그 실타래를 풀고 싶은 에너지도 의지도 전혀 없는 것 같다. (가정의 문장을 쓰는 이유는 내가 변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기 때문이다.)
10대부터 20대까지, 그리고 30대 초까지.
관계로부터 오는 기쁨과 슬픔이 타인에 비해 컸던 나는 이미 그 증폭을 느끼느라 내 삶의 마지막 에너지까지 전부 끌어다 쓴 모양이다. 꼴랑 30대 초반의 막바지를 달리고 있을 뿐인 나인데, 인생의 쓴 맛을 다 알아버린 사람처럼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두지 않고 그저 하루를 빼곡히 채우는 것에 열중한다.
아침에 (최근엔 고통 속에서) 일어난다. 아침을 챙겨 먹는다.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린다. 점심을 챙겨 먹는다. 집안 정리를 한다. 커피를 내려 마신다. 커피를 다 마시면 또 글을 읽고 그림을 그린다. 8시가 되면 멍멍이 산책을 시킨다. 돌아와 멍멍이 발을 닦인다. 근력운동을 한다. 샤워한다. 유튜브를 보다가 잔다. 그러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내 기질이 기어코 나타나면, 내 마음 저 구석에 짓눌린 상처를 꾸역꾸역 찾아내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
그 상처들은 대충,
폐허. 누구에게도 공유할 수 없는.
친구. 사는 방향성이 달라지면 결국엔 멀어지는.
연인. 기간제 베프며 세상에서 깨지기 가장 쉬운.
사랑. 허상인.
믿음과 신뢰. 모래성 같은.
이런 식이다.
여름이 왔다.
나는 앓았고,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