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017년, 영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뒤 작가로서의 삶을 뒤로하고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이 시기에 대해 기록하였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대가는 썼다. 창작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일상에 대한 강렬한 회의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오는 묵직한 무기력감. 그로 인해 나는 물 먹은 스펀지같은 일상을 보내다 아무 이유 없이 자꾸만 아프기 시작했고, 음식도 거부하며 44킬로까지 빠진 후에야 작가 생활로 다시 돌아왔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지, 라는 다짐과 함께. 그때가 2020년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만들어냈던 미비한 작업물들. 주변 작가들이 의미 있는 발자취를 하나 둘 남기고 있을 때 나는 그 어떤 발자국조차 남기지 못했던, 초라한 작가 지망생이었다. 가끔은 놓인 상황에 초조해져 흰 캔버스를 앞에 두고 점 하나를 찍지 못해 고민했던 적도 많았다. 인간은 좀처럼 변치 않는다는 걸 몸소 증명이라도 하듯 2017년 9월 8일의 일기장에 적었던,
“나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정답이 보이지 않는 어둠에 갇힌 사람 같은 기분이 드는데, 어떻게 다른 이들은 자기 인생에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일까? 주변을 둘러보면 나 혼자만이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눈이 먼 사람인 것 같다.”
와 같은 삶을 2020년부터 2022년까지 되풀이하며 보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다 예기치 못했던 인생의 다양한 파도들에 휩쓸려 무력하게 가라앉기도 하였다. 그러다 인생의 어느 한 지점을 만나 보편적이고, 소소하게 보내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말로는 작품을 준비한다고 말했다. 그러곤 창작과는 동떨어진 시간들을 보냈다. 여느 삶을 지향한다면 나쁘진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어둠에 대해 살풀이하는, 통상적인 삶을 살고 싶었으므로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표로부터 멀어지며 시간이라는 늪에 감겨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가끔 공방에 나가 작업을 하며 촘촘히 살았기에 뭐가 잘못된 지도 알 수 없었다. 보통의 삶으로 하루하루 채워나가다 보니 발작적 감정의 요동을 요하는 예술가의 삶과는 자꾸만 동떨어져갔다. 필연적 이게도 영감은 오지 않았고, 과거의 영광에 취해 예전 작품 작 중 한 부분인 매달린 사람에 대한 연구를 집착적으로 하다 그렇게 거진 일 년을 보냈다.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지 도저히 모르겠는 상태로.
그렇게 과거의 영광에, 일상에, 그리고 평범한 나날들에 감겨 빠져 갈 때쯤 나는 작업 동지와 함께 작업실을 구해 나왔다. 그리고 그녀와 작업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이번 작업에 대한 주제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나는 멍청하게도 나에게 주어진 작가로서의 삶이 무한하다 믿었기에, 유한했던 시간에 천천히 녹아들고 있었다. 제대로 된 작품을 생산하지 않았던, 창작자로서의 무의미한 시간들. 그 늪과도 같은 시간에 천천히 침몰하였다.’ -2023.12.14
예전 Narrative of my life 시리즈를 만들 때도 일기 속에 적힌 한 줄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하였으니, 이번에도. 그리고 2024년에는 유의미한 살풀이들이 내 손끝에서 나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