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망상
‘만약 내가 이 글을 다시 보고 있다면 나의 계획은 실패한 것이다. 나는 나를 잃었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버렸다. 허상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실패한 것 같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단편적인 이미지일 뿐. 그 조각을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이 단잠에서 깨야한다. 달콤한 꿈에서 익사하기 전에.’
서가의 책을 정리하면서 우연히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안정된 일상을 순식간에 불안 속으로 던져버린 글. 이 깜찍한 글은 내 흔적과 문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데, 내가 이런 글을 적었던 기억은 없다. 몇 번의 접힌 자국과 약간 색이 누렇게 바랜 형태. 언젠가의 내가 썼을 것이라는 짐작만 하게 한다. 아마 어린 시절의 내가 쓰려던 소설의 일부인가? 어떤 글을 쓰려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약간은 자극적인 문구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판타지 무협소설에 빠져 신비로운 경험에 대한 소설 작문을 여러 번 시도한 적이 있다. 그 시절의 내게는 장문을 쓸 정도의 지구력이나 인내심이 없었기 때문에 순간순간 머리를 스치는 문구를 보이는 대로 메모해놓곤 했다. 연속적으로 작성하지 않은 메모를 차후에 취합하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꽤 참신한 글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교과서 안의 여백, 메모지, 연습장 등 가리지 않고 떠오른 문장과 상황을 써 두고 연인을 찾는 것처럼 내 문장을 찾아 헤매었다. 결국 철지난 교과서나 이곳저곳 흩어진 연습장 조각이 쓰레기 통으로 향하는 바람에 내 상상 속의 세계는 소각장으로 직행했고, 그런 실연의 고통이 반복되다보니 문학도로서의 내 꿈도 허탈한 한숨과 함께 사그라져버렸다. 조각난 내 소설은 단 한 번도 완성되지 못했다. 내가 상상한 기억의 조각만 둥둥 떠다녔을 뿐, 그 파편을 정성스레 조합할 능력은 없었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소설을 쓴다기보다 방황하는 청소년의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망상을 글이라는 매개로 표현한 것일 뿐일 수도 있겠다.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이 메모는 아마 소각장의 화염을 운 좋게 피한 파편이리라.
새벽 쓰레기차에 실려 떠나간 내 꿈을 오랜만에 떠올려 본다. 10대의 내가 주로 생각했던 것은 현실의 허망함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진짜가 아니고, 실제로 존재할 ‘나’도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내가 아니라 이 이면의 세계에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던, 매일 똑같은 하루를 보내야하는 학교생활을 원망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나에겐 빛같은 생각이었다. 지금에 와선 ‘네 상상 속의 너도 지금 너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은 마음에 지난 시절에 대한 딱하고 답답한 마음이 든다.
“아빠, 식사하세요.”
수민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내 딸. 또래보다 큰 키와 예쁜 얼굴에, 훈육의 수고 없이도 스스로 알아서 몸가짐을 반듯이 할 줄 아는 기특한 딸이다. 내게 자녀가 생긴다면 지금 내 눈 앞에서 방긋거리는 수민이의 모습이기를 늘 바랐다.
서재에서 나가 주방으로 향하니 주방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며 얼굴을 쏙 빼고 있는 내 딸이 보인다. 앙증맞은 두 손으로 미닫이문을 슬쩍 닫더니 장난기 가득한 가느다란 눈매를 만들고 암호를 말해야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얼굴을 찌푸려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수민은 까르르거리며 아빠의 표정이 재미있게 보이지만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암호가 아니라며 조그마한 입술로 노래하듯 내게 말한다. ‘오늘’, ‘엄마’, ‘수민이’, ‘아빠’ 같은 의미 없는 단어를 불러대며 수민이의 웃음을 원 없이 만끽하고 있는데 장난은 그만하고 들어오라는 아내의 다정한 부름에 ‘사랑해’라는 곱고 부드러운 단어를 딸에게 전달했다.
“통과!”
반 공기쯤 담긴 현미밥, 급하게 만든 깻잎무침과 가지볶음, 그리고 닭 가슴살 샐러드로 아침을 시작한다. 서재에 있을 때 아내가 요리하는 기척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앉아있기에도 황송한 이 풍성한 식단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새삼 신기하다.
"식사 잘했어요, 여보. 그런데 언제 일어났어? 나 서재에 있었는데, 부엌에 당신이 있는 줄 몰랐네.”
“음. 언제 일어났지? 매일 제가 하는 일이라 순식간에 해버렸어요. 당신이 책방에서 너무 집중했나보네요.”
“그랬었나? 옛 추억에 조금 빠져있기는 했지. 나 이제 양치하고 출근할게.”
“여보, 출근이요?”
“응. 왜?”
“어디로 출근을 해요?”
“어디긴, 회사 가야지.”
“당신……. 이미 오래 전에 그만 뒀잖아요.”
“응? 내가 회사를 그만뒀다고? 하하하, 이 사람이 농담은.”
“이 사람이 또……. 좋아요, 당신이 출근할 그 회사는 어디예요?”
“회사는 그야…….”
잠깐, 내가 회사를 그만 뒀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