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망상>
"나는, 당신이 원하는 얘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지금까지 수십 가지 버전의 다른 얘기를 들려줬고 당신의 모든 반응을 지켜봤어요. 오늘도 또 새로운 얘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내가 무슨 얘기를 한다 해도 당신은 그게 진실인지, 아닌지 모를 거예요. 중요한 건, 아직까지도 당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 앞으로도 이곳에 있을 거라는 거죠."
아내의 눈 밑이 조금 어둡게 가라앉았다. 좀 전보다는 조금 야위어 보였고, 다정하다기보다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종종 눈을 치켜뜨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요. 오늘은 진짜 얘기를 해보죠. 당신은 평화롭게 하루를 시작해요. 당신이 꿈꾸던 아침 아닌가요? 당신이 잠에서 깨면 나와 수민이도 숨을 쉬어요. 우리는 당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니까.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침식사 준비밖에 없어요. 영화를 보자고요? 산책이요? 나도 하고 싶지만 새로운 시도를 하는 순간, 당신은 사라져 버리고 말 거예요. 그렇게 구체적인 것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당신이. 그럼 그 디테일함을 상상하기 위해 깨어나야 할 테니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꿈이 꾸어지지는 않으니까요. 당신이 가버리면 나와 수민이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어요.
그동안 이 얘기를 여러 번 했어요. 그래서 당신이 사라진 적이 있냐고요? 아니요, 없어요.
한 번이라도 당신이 사라졌다면 우리도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거예요. 다시는 만날 수 없어요. 당신이 어제나 오늘 깨달았을 그 ‘사실’을 처음 깨달은 예전의 당신이, 나에게 조용히 의논한 적이 있어요. 당신과 나, 수민이가 함께 하는 이 현실이, 현실이 아닌 것 같다고. 그래서 이 꿈을 깨버리기 위해 이 집을 나가야만 할 것 같은데 함께 나가 줄 수 있냐고 물은 적이 있지요.
여보. 저는 당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반대한 적이 없어요. 그때도 물론 당신과 함께 나가려고 했지만 저는요, 이 주방을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이 주방 밖에는 제가 없는걸요. 당신은 나를 이 주방에 있는 것으로 설계한 거야. 당신은 나를 여기에 두고 혼자 나가야만 했어요. 그런 일은 하지 않기로 스스로 결정한 거예요, 당신은…….
나는 당신과 수민이를 함께 볼 수 있는 그 순간에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어요. 늘 똑같은 음식을 만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지만 그게 여기서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에요. 이런 상황을 파악한 당신이 제게 부탁했어요. 당신이 이곳에서 푹 자고 일어나면 우리의 아침이 다시 시작될 거고, 가끔씩 당신이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되면 그 사실을 잊게 만들어 달라고 말이에요.”
…….
최문철, 그 인간에게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 한심한 인간은 지금 방문을 걸어 잠그고 좀 전에 봐온 장바구니와 과자봉지를 끌어안고 벽에 붙인 사진을 동경하며 술에 취해 자고 있겠지. 연애는 꿈도 못 꿀 인간. 이런 완벽한 아내는 만날 수도 얻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런 번듯한 집에서 사는 것은 더욱 불가능할 거고. 저 문을 나가면 나는 이 환상적인 현실에서 사는 건 불가능하다. 무능한 인간이 되어 평생 이 꿈에서 깬 것을 후회하며 살지도 모른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이지만 눈물로 시간을 함께하자는 아내를 버린 것에 꽤 오랜 시간 죄책감에 절어 살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꿈에서 깨는 순간 다 잊어버릴지도 모르지.
가야 할까, 머물러야 할까.
이렇게 오랜 시간 깨어나지 못하는 아들을, 부모님이 걱정하시진 않을까. 아버지의 굽은 등, 못난 아들의 끼니를 걱정하는 어머니. 돌아가야 할까, 돌아가야 할까. 누구에게로? 일단 아직 잘 살아 있다고, 며칠을 잠만 자는 내가 죽은 게 아니고 그냥 오래 꿈을 꾼 것뿐이라는 걸 알려줘야겠다. 그다음 혹시 돌아오게 되더라도, 일단 돌아가야겠다 부모님께로.
“여보. 이번에는 나 가야겠어. 미안해.”
“나와 수민이가 영원히 없어져 버린다고요 여보. 우리를 평생 못 보고 살아도 괜찮아요?”
“내가 그동안 여기 있었던 건 당신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고 생각해. 더 이상은 힘들 것 같아. 당신도 좋고 수민이도 좋지만 허상인 것을 안 이상, 거기에 의지하고 살고 싶지는 않아.”
“안돼! 최문철! 넌 여기를 나가는 순간 쓸모없는 놈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야. 여기에 계속 남아있자. 여보, 문철 씨 가지 마요! 가지 마!”
“쓸모없는 놈? 알아, 쓸모없지. 그런데 모르겠어. 여기 계속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미안해...”
쓸모없는 놈이라니. 고운 아내의 입술이 어느새 거울 속에서 봤던 남자의 입과 닮아간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주방을 뛰쳐나가려는 찰나, 뒤에서 날아온 식기에 쿵하고 머리를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넘어진 나를 쫓아온 아내는 두 손에 내게 던진 무쇠 팬을 쥐고는 내 머리를 사정없이 내려치기 시작했다. 충격이 심했는지 시야가 아득해지고 정신이 희미해진다. 아내를 돌아봤지만 제지할 힘이 없어 그대로 뻗어버리고 말았다. 눈앞에 떨어진 그릇에 아내의 모습이 비친다. 자세히 보니 눈물을 또르르 흘리던 아름다운 아내가 아니라 내 모습, ‘최문철’의 모습이 보인다.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울고 있는 것은 아내와 같다. 잠들거나 정신을 잃지 않아야 할 텐데. 이 주방만 벗어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오늘은 틀린 것 같다.
‘만약 내가 이 글을 다시 보고 있다면 나의 계획은 실패했다. 나는 나를 잃었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버렸다. 허상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써봤지만 실패한 것 같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단편적인 이미지일 뿐. 그 조각을 연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 이 단잠에서 깨야한다. 달콤한 꿈에서 익사하기 전에.’
서가의 책을 정리하면서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