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망상
어렸을 때는 소설을 끄적이기도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꿈이 있었고, 열정도 있었다. 무엇보다 밝았다. 세상도, 나도 모두가 밝았다. 물론 지금이 나쁜 것은 아니다. 이 큰 집에서 아이와 아내와 함께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고 있으니까. 편안하다, 편안하다.
식사를 하라는 아내의 목소리를 듣곤 서둘러 식당으로 향했다. 단정하고 부지런한 아내, 예의 바르고 밝은 아이 수민이. 즐거운 아침식사를 끝내니 문득 피곤해져 다시 침실로 향했다. 침실은 혼자 조용히 쉴 수 있는 2층에 있었으면 좋겠는데... 다리가 이끄는 대로 2층으로 올랐다. 무거운 문, 어두운 침실. 매트리스, 쪽지. 이런 건 딱 질색이다. 나를 흔드는 것들.
어렸을 때도 그랬다. 상황이 만족스럽게 돌아간다 싶으면 알 수 없는 힘이 내 삶을 흔들어 놨다. 20대에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는데, 그게 표절이라고 수상이 취소됐다. 같은 소설 동아리에 있던 놈 하나가 서랍 속에 있던 내 소설을 다른 대회에 몇 달 전에 발표해버린 것이다. 한쪽에선 수상이 취소됐는데, 한쪽에선 신인작가로 데뷔하게 됐다. 상금도 받고, 인세도 받았다. 그런데 친구들은 나를 도둑놈이라 불렀다. 분명히 받았던 상금은 내 통장에 있기도 했고 없기도 했다.
작가의 길을 포기했던 나는 IT 회사에 취직하게 됐다. 거기에선 능력을 인정받고 분명히 부장까지 십 수년을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대리님'이란 호칭 밖에 떠오르질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잘 나가는 작가가 되어 사인을 하고 있기도 했고, 글 도둑놈으로 몰려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 쪽지를 적어 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가장 행복한 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또다시 흔들려고 하는 악마 같은 사람. 그 사람은 부장인가, 대리인가, 작가인가, 도둑인가. 가늘고 긴 창으로 이른 노을빛이 스며든다. 순식간에 사라질 노을빛, 그 붉은빛을 바라보며 다시 잠이 들었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나는 결국 내 삶을 찾은 거다.
"문철아, 문철아"
멍한 정신을 날카로이 갈라놓은 목소리. 누군가 나를 깨우고 있다. 아직 밤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 아내인가? 몸을 일으켰다. 긴 창 밖으로는 회색빛 밤이 고요히 지나가고 있다. 힘겹게 꿰어놓은 꿈을 뚝, 끊어버릴 것 같았던 또렷한 목소리. 당신은 누구입니까.
"문철아, 왜 이렇게 오래 자니. 일어나서 밥 먹어야지."
저 위에 있던 창이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다. 회색빛 밤이 반짝, 빛을 내더니 풍경에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벽이 흔들렸다. 문이 더 두꺼워야 한다. 벽이 더 두꺼워야 한다. 창을 더 가늘게 닫아야 한다. 들리지 않게, 보이지 않게 막아야 한다. 이제야 되찾은 삶을 또다시 혼란과 절망 속으로 던져버릴 수는 없었다.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침대 밑으론 1층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있었는데, 나는 그 사다리를 잡고 1층으로 기어내려갔다. 2층 침실의 문을 꼭 닫고, 더 깊은 곳으로 빛이 들지 않는 곳으로 꾹꾹 눌러 내려갔다.
큰 방이다. 모든 것이 갖춰진 커다란 방. 내 서재보다 더 큰 서가, 화려한 가구와 햇빛도 울고 갈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있는 곳. 고풍스러운 책상과 안락한 소파, 한편에 마련된 세련된 카페 공간까지. 기다린 소파에 몸을 누이고 휴식을 즐기기로 했다. 편안하다, 편안하다. 너무 편안하고 행복해서 그런가. 눈물이 차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