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섭 Nov 09. 2021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그래도 된다는 건 아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굉장히 연약한 존재이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다른 동물들과 비교하여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거니와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정신적인 상처를 받는 것에도 굉장히 민감하고 조심스럽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화할 때 나오는 부사들 중 '사실, 솔직히, 내 생각에는, 주관적인 얘기지만'이 굉장히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 또한 앞선 이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부분 또한 어떤 공식적인 연구나 논문에 근거하지 않은 지금까지 나의 인생에 비추어 본 주관적인 의견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공 분야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관심 있어하는 부분이 인간관계라는 카테고리이지 싶다. 

 

  내가 인간관계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접했던 본 카테고리의 명대사는 '그럴 수도 있지.'였다. 인간관계와 관련된 어떤 영상이나 보거나 서적을 읽어봐도 공통적으로 한 번은 나오게 되는 인간관계의 해독제와도 같은 말이었다. 그 사람의 언행에도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니 '그럴 수도 있다.'하고 이해하라는 의미이다. 의미 그대로만 생각해본다면 굉장히 유토피아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며 세상에 갈등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관계라는 카테고리가 항상 핫이슈인 것을 보면 저런 마인드가 대중적이게 되고나서부터 새로운 부작용이 생긴 건 아닐까 싶다.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내가 A라는 개념을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가정을 하자. 여기서 A라는 개념은 인간관계 안에서의 어떠한 개념이다. 예를 들면 '친구사이라면 약속시간을 1시간 정도 어기는 것쯤이야 이해할 수 있지.'와 같은. 나는 A라는 개념을 이미 상식이라는 범주에 넣고 있기 때문에 대중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믿고 있을 것이며, 나와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더더욱 그럴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부분에서 갈등이 빚어지지 않는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믿음을 잃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점점 더 큰 사회로 나아가면서 여러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어느 순간 나의 믿음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점점 '그럴 수도 있지.'라는 인간관계의 마법과도 같은 주문이 생각보다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은 내가 제 삼자의 경우일 때 효과적인 주문임을 알게 된다. 


 어느 누구도 먼저 갈등을 일으키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인드를 장착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대중적으로 퍼지다 보니 어느 순간 무의식적으로 누구나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일 누구나가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럴 수도 있지.'의 동사를 실제로 행해도 되는 건 아닐까? 내가 그런 행동을 한다고 해도 적어도 내 주변의 사람들을 위와 같은 생각으로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곧 나는 궤변 속에 빠지게 된다. 보통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을 가장 많이 하게 되는 때는 내가 다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거나 타인에게 일어난 갈등 속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했을 때이다. 정작 자기 자신에게 빚어진 갈등 속에서는 저런 생각을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유튜브의 유명한 영상들이나 인간관계 범주에서 유명한 책들은 모두가 저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들은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히려 저런 마음을 가지지 못하면 속이 좁은 사람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더불어 '그럴 수도 있지.'가 아닌 '그러니까 그래도 되겠다.'와 같은 사려 깊지 못한 태도를 취하게 한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그럴 수도 있지의 주인공이 되기 전에 다시 한번쯤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이다. 오히려 더욱 단단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솔직한 담화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지금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근데 내 생각은 좀 달라.'라고 생각할 것임을 나 또한 '그럴 수 있지.'라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작가의 이전글 간호사에게 필요한 자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