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집을 비운 사이
딸이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 일을 본 후에 화장실 문을 열고도 화장실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 경험상 이런 경우는 보통 안 좋은 일 즉, 변기와 관련해서 안 좋은 일이 생겼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딸은 그런 내 경험을 확인이라도 시켜주고 싶었는지 난감하고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엄마, 변기 막혔나 봐요.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살면서 러시아와 한국 최소한 두 나라에서 변기를 뚫어봤을 나였다. 변기가 막히면 뚫으면 될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두 팔을 걷고 호기롭게 양변기에 다가가서 압축기를 이용해서 막힌 곳을 중점적으로 열심히 뚫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변기는 내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때 딸이 번득이는 아이디어라도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 제가 변기 물을 내려볼까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지만 변기를 뚫은 경험이 많지 않았고, 일상생활에서 그다지 논리적인 사고를 잘 못하는 나의 빈 틈을 딸에게 들켰다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조금, 그것도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래, 어쩌면 정말 기적같이 변기에 막힌 것이 내려갈도 모르잖아.'
이렇게 나는 나 자신을 짧게 설득한 후에 딸에게 말했다.
-그래, 한 번 내려봐.
하지만 이 말을 하고 30초도 채 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한 말을 주워 담고 싶었다. 딸이 변기 물을 내리자 변기 물이 변기 밖으로 넘쳤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치였다. 변기가 뚫리지 않았는데 물을 더 부었으니 물이 넘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순간 화도 나고 창피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나 역시 생리현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나도 곧 화장실에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아니 확신이 들자 나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또다시 압축기로 막힌 곳을 뚫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나아진 것은 없었다. 아까보다 힘이 빠졌고,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변기를 못 뚫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 문득 나와 딸은 우리 집에 있는 압축기가 부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엄마, 이거 너무 안 좋은 것 같아요. 새로 사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아. 우리 같이 사러 가자.
이렇게 해서 나와 딸은 **소에 가서 압축기를 샀다. 집에 와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이 오기 전까지 변기 막힌 것을 뚫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무장한 채 변기 뚫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압축기도 생각보다 강력하지 않았다.
-아까 5000원짜리로 살걸 그랬나 봐. '초강력'이라는 말이 자꾸 걸리네. 아...
-그러게요, 엄마. 그걸 샀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후회를 하면서도 열심히 작업을 한 결과 드디어 막힌 변기가 다소 힘겨운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윤미야, 아빠가 이 압축기 보면 뭐라고 할까? 알아볼까? 아니면 모를까?
-사실대로 얘기할까요?
-글쎄. 아빠가 먼저 물어볼 때까지 말하지 말자.
-네.
-윤미야, 그런데... 나...
-네.
-양말이 아무래도 축축한 것 같아.
-아!!!!!!!
-아닐 거야. 진짜 그런 건 아닐거야.